요즘 들어 자주 접하게 되는 단어가 있습니다. 바로 ‘격노(激怒)’입니다. 평소엔 낯설게 느껴졌던 이 단어가, 고)채 해병 순직 사건과 함께 반복적으로 등장하면서 많은 국민의 귀에 익숙해졌습니다. 특히 윤석열 전 대통령이 해당 사건에 대해 ‘격노’했다는 보도가 나오면서, 그 감정이 실제 수사 방향을 바꾸었고, 결국 특검으로까지 이어졌다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만약 이 의혹이 사실이라면, 이는 단순한 감정의 표출을 넘어 국가 시스템을 무너뜨리는 심각한 사건이 될 수 있습니다.
이 사건의 핵심은 수사 책임자였던 박정훈 대령이 지휘하던 군 수사 결과가 대통령의 ‘격노’ 이후 뒤바뀌었고, 정작 최종 책임자는 제대 후 장군의 예우를 누리고 있다는 데 있습니다. 조직의 책임 구조가 무너지면서 책임져야 할 사람이 빠져나가고, 수사를 지휘하던 이가 희생양이 되어버린 셈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의문을 갖게 됩니다. 과연 시스템으로 운영돼야 할 국가가, 한 사람의 격노 앞에 이렇게 흔들릴 수 있는 것인가? 대통령을 보좌하는 수많은 전문가와 참모들은 왜 이렇게 무기력하게 무너진 것일까?
조직은 절대 한 사람의 감정에 휘둘려선 안 됩니다. 그 어떤 리더라 하더라도 일정 권한은 조직에 위임되어야 하고, 위임된 결정은 위법성이 없는 한 존중받아야 합니다. 그게 시스템입니다. 대통령도 한 명의 인간입니다. 모든 분야에 능할 수는 없기에, 전문성을 가진 참모와 공직자들이 보좌하고, 다양한 시각에서 숙고된 결정을 내릴 수 있도록 돕는 체계가 있는 것이죠. 이런 조직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으면, 대통령의 ‘격노’라는 감정 하나에 따라 중요한 정책 결정이나 수사가 왜곡될 수 있습니다.
고)채 해병의 순직 사건은 단순히 진상규명이나 책임자 처벌로 끝날 일이 아니었습니다. 재발 방지를 위한 철저한 진실 규명이 필요했습니다. 그럼에도 대통령의 격노가 수사를 흔들 수 있는 상황이었다는 사실은 국가 시스템에 대한 깊은 우려를 낳습니다. 다행히도 박정훈 대령은 최종적으로 무죄를 선고받고 다시 해병대 수사단장으로 복귀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결과가 모두에게 반복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조직 구성원들은 그처럼 용기 있게 대응하기 어렵습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조직의 건강함입니다. 어떤 조직이든, 특히 사람을 돕는 사회복지조직이라면, 리더 한 사람의 감정이 아닌 제도와 합의, 숙의의 과정을 통해 의사결정이 이뤄져야 합니다. ‘격노’는 조직을 병들게 합니다. 그것이 비단 한 사람의 감정 표현에 그치지 않고, 실제 구조와 결정을 흔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리더는 성찰해야 합니다. 내가 지금 분노하는 이유는 조직의 목표를 위한 것인지, 아니면 개인적 감정에 휘둘린 것인지. 그리고 리더를 보좌하는 참모진과 전문가들은 자신의 역할을 다해야 합니다. 리더의 감정을 무비판적으로 따르기보다는, 제 역할을 하며 바른 의견을 제시하는 것이야말로 건강한 조직을 지키는 길입니다.
격노는 더 이상 조직의 결정 과정에 등장하지 않아야 합니다. 특히 그것이 권력자의 감정이라면 더욱 그렇습니다. 그 감정 하나가 시스템을 무너뜨리고, 개인의 인생을 송두리째 흔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조직은 시스템으로 움직여야 합니다. 그리고 리더는, 시스템이 무너지지 않도록 감정을 절제하고, 다양한 의견에 귀를 기울일 줄 알아야 합니다.
격노가 아닌 성찰과 숙의가 조직을 이끌기를, 그리하여 더 이상 고)채 해병 같은 안타까운 희생이 반복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저의 두 아들이 건강하게 국민의 의무를 다할 수 있는 국가가 되길 기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