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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시랄라 Feb 04. 2020

아리송한 북유럽 문화 시리즈1

얀테의 법칙-가를 수 없는 옳고 그름의 양립성

“언니, 얀테의 법칙(Law of Jante)이라고 들어봤어요?”

“아니요, 그게 뭔데요?”

“북유럽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사회적 윤리 같은 건데, <너 자신을 다른 사람보다 특별하다고 생각하지 말라>는 법칙이래요… 상당히 새로운 개념이죠?, 우린 아이들한테 항상 <너는 특별한 존재>라고 얘기하잖아요… 여긴 완전 반대예요. 잘하는 애 칭찬도 하지 않는대요.”


“오, 진짜? 신선하다. 정말 새로워요, 그래서 스웨덴 아이들이 축구 경기를 해도 승부를 가리지 않는 건가요?”


매번 딸아이의 축구 매치를 갈 때마다 신기했던 것 중의 하나가 경기를 해도 몇 대 몇인지 점수를 가르지 않고 골을 넣으면 <와> 하고 축하만 하는 스웨덴식 어린이 축구가 영 익숙 치 않았었는데, 얀테의 법칙 (Law of Jante) 이야기를 듣고 보니 살짝 이해가 갈 만도 하였다. 승부를 가리는 순간 승자와 패자가 결정되고 승자에게는 칭찬과 환호가, 패자에게는 아쉬움과 부러움을 안기는 결과 지향적인 문화가 스웨덴 사람들의 평등의 가치에는 어긋나서 그런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교사 재직 시절, 아이들에게 긍정적인 피드백을 주기 위하여 항상 칭찬은 다른 아이들이 많이 보는 자리에서 한 아이를 지목하여 큰 목소리로 아낌없이 했었는데 (박수를 쳐 주라는 얘기도 가끔 했었음), 스웨덴의 얀테 (Law of Jante)의 법칙의 관점에서 바라보면 아주 못 돼먹은 행동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승부가 없는 어린이 축구>

퇴근하고 돌아온 남편에게 얀테의 법칙(Law of Jante)에 대해 알려 주었다.

"어떻게 생각해?"라는 물음에


“우와! 대박… 정말 세계 경쟁력에 뒤 쳐지는 발상이다. 그래서 똑똑한 스웨덴 사람들이 전부 나라 밖으로 뛰쳐나가는 거 아니겠어? 그 빈자리를 우리 같은 인터내셔널로 채우는 거고… 그 법칙 아주 몹쓸 법칙이구만. 아니, 잘하는 거 잘한다고 얘기를 왜 못해? 이해가 안 되네 증말… 에이!”


남편은 얀테의 법칙(Law of Jante)에 대하여 상당히 마음에 안 들어하는 것 같았다.


“난 그렇게 나쁜 거 같지 않은데… 우리나라… 음, 아이들 생각해 봐 봐, 항상 남보다 잘해야 인정받는 아이들한테 이 개념 뭔가 새로운 것 같은데? 남보다 잘 안 해도 된다. 너희들 모두가 평등하고 소중한 개개인 일 뿐, 다른 사람보다 특별할 것이 없다는 게 왜 나빠? 우리나라처럼 경쟁적인 사회구조 속에서 뭔가 따땃한 해결책이 될 수도 있는 거 아닌가?


남편은 글로벌 사회에 매우 뒤처지는 발상 이라며 다시 한번 열을 내었고, 나의 <좋기만 하고만>의 일관적인 대응이 그의 화를 부추기는지 일정 시간이 지나자 아예 묵묵 무답으로 일관하였다. 그렇게 우리의 대화는 불일치로 끝났지만, 나는 얀테의 법칙 (Law of Jante)이 갖는 긍정적인 측면에 대해 점점 더 내 생각을 확고히 하는 중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스웨덴 사회와 문화 알기>로 진행되는 30시간의 수업을 지인의 소개로 들을 기회가 생겨났다. 고등학교와 성인들을 대상으로 수업을 하는 스웨덴 사회 선생님에게 얀테의 법칙(Law of Jante)에 대하여 직접 물어볼 기회가 생긴 것이다.


“질문하나 해도 돼요?, 얀테의 법칙 (Law of Jante)에 대한 스웨덴 사람들의 생각을 알고 싶어서요…” 질문이 끝나자마자… 선생님이 제일 처음 한 말이


Oh. Janteslagen! that’s a very very bad thing.”이었다. 


옆에서 같이 듣던 학생들도 <very bad thing>이라는 선생님의 단호한 이야기에 흥미가 생기는지 모두 관심 있게 귀를 기울이기 시작하였다.

얀테의 법칙(Law of Jante)은 오래전부터 북유럽 사회를 조직적으로 컨트롤하기 위한 사회 통제 시스템으로 이용되었으며, 북유럽 사람들의 개성 있고 잘난 개인에 대한 경계심과 질투심을 이용하여 모두가 평범한 소시민으로서 사회에 잘 순응하는 인간상을 길러내기 위한 것으로 부정적인 측면이 훨씬 많다고 이야기해 주었다.


이럴 수가… 난 좋은 건 줄 알았는데…


집으로 돌아와서 구글과 유튜브를 통한 폭풍 검색이 시작되었다.


어린 시절 캐나다 부모님을 둔 덕에 영어를 독보적으로 잘했던 한 학생이 영어를 남들보다 잘한다는 이유로 친구들로부터 따돌림을 받아야 했던 경험담이 눈에 들어왔다. 영어뿐만 아니라 그녀는 폴 댄스(Pole Dance)에도 남다른 재능이 있었는데 스웨덴 학창 시절 내내 친구들에게 그녀의 재능에 대하여 이야기해 본 적도, 그녀의 댄스 실력을 보여 줘 본 적도 없다고 하였다. 그렇게 자신의 재능에 무덤덤한 세월을 보내던 중 부모님과 함께 캐나다로 이주하여 4년이란 시간을 보내게 되었고, 그곳에서 색다른 경험을 하게 된다. 폴댄스(Pole Dance)를 한다는 사실을 자연스럽게 알게 된 친구들이 그녀에게 춤 실력을 보여 달라고 요청하였고, 그녀는 자신의 폴 댄스 (Pole Dance) 실력을 태어나 처음으로 캐나다 친구들 앞에서 선 보이게 되었다. 열렬한 박수와 함께 그녀의 빼어난 춤 실력 앞에서 ‘so cool’이라는 찬사를 아낌없이 보내준 캐나다 친구들을 통해 잃었던 자신감을 찾게 되었다는 이야기는 그녀가 느끼는 얀테의 법칙(Law of Jante)의 역기능을 설명하는데 부족함이 없는 듯하였다.


한 미국인은 자신이 이해하는 얀테의 법칙(Law of Jante)을 그가 참석한 모임의 색다른 상황을 통해 서술하였다. 그는 자신을 초대한 친구들 사이에서 뛰어난 입담과 재치로 만담을 펼치고 있었는데, 대중들의 호감 어린 시선이 그에게로 꽤 많은 시간 동안 집중되자, 어느 스웨덴 중년 여성으로부터 <그만 말하라>라는 부드럽지만 단호한 요청을 받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녀에 따르면 그가 서로 이야기 해야하는 공평한 시간의 기회를 박탈하고 있다는 것이다. 

<겸손>이 미덕이 아닌 나라에서 자라난 그가 처음 스웨덴의 얀테의 법칙(Law of Jante)을 접했을 때 그는 '이 개념이야말로 공동체에서 소외된 미국인들의 서러움을 달래 줄 수 있는 사회적인 덕목이 될 수 있겠구나' 라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하지만 결국 자신의 만담을 못마땅해하며 <그만 말하라>라고 속삭이는 스웨덴 여성으로부터 <겸손과 평등>이 아닌, 얀테의 법칙(Law of Jante)에 관한 부정적인 이질감 그리고 이제껏 경험하지 못했던 어색함을 느꼈던 것이다.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반 얀테의 법칙(Anti-Janteslagen)에 이어 스웨덴 사람들의 <부를 자랑하지 않는 겸손의 미덕>이라는 측면에서 얀테의 법칙을 설명한 기사와 에피소드들도 많이 보이긴 하였다.

인간의 욕망과 경쟁적 욕구에 <평등과 겸손>이라는 인류애적인 가치관이 북유럽을 이끌어가는 행복의 동력이 된다는 기사도 보이고, 람보르기니를 타는 스웨덴 청년들이 밤에 몰래 숨어서 사람들이 없는 곳에서 차를 몰고 다닌 다는 웃픈 사연들도 눈에 띈다.


만 열 살이 되어가는 딸아이에게도 물어보았다.

“<너 자신을 특별하게 생각하지 마라>라는 이야기가 좋은 거 같아? 나쁜 거 같아?”

“당연히 좋은 거지요. 자기 자신만 특별하다고 생각하면 뽐내게 되고 그럼 친구들이 안 좋아하니까요.”

벌써 스웨덴 물이 들어가는지 아이의 대답이 신통 방통 하다.




< 답이 없는 것을 묻고 다녔구나!>


북유럽의 전통적인 사회적 가치를 표방하는 얀테의 법칙(Law of Jante)도 매우 상대적이며 가변적인 속성을 지닌 것 같다. <나의 경험의 틀>안에서 가치의 경중을 재단하며 결론을 도출하고 그것을 정답이라 믿어 버린다면 그것 또한 자가당착적인 편협한 사고 속에 자신을 가둬 두는 것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다.


얀테의 법칙(Law of Jante)이 타인보다 잘나야만 하는 경쟁적인 여러 사회에서는 평등과 겸손, 절제의 미덕에 대한 답이 될 수 도 있겠고, 물질에서 오는 우월감이나 부끄러운 갑질 문화에 대해서는 자각적 성찰을 가능케 하는 미덕으로 작용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반면에 절대적 가치로 무장된 <평등>은 개개인의 개성이나 재능을 무시하는 <The very bad thing>으로서 스웨덴 사회의 발전과 세계 경쟁력을 저해하는 해로운 측면으로 개인을 유린할 수도 있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얀테의 법칙(Law of Jante)에 답이 있는 것이 아니라 얀테의 법칙을 적용하는 우리들에게 답이 있는 것이다. 스웨덴에서는 라곰(Lagom)이라는 또 다른 철학이 생활 속에 자리 잡고 있다. 이는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 적절함을 의미하는 말이다. 라곰의 철학은 동양의 철학인 중용이라는 단어와도 맥을 같이 한다. 치우침이 없는 균형 잡힘, 얀테의 법칙(Law of Jante)도 이러한 라곰(Lagom)과 중용의 철학 속에서 이해를 해야 하지 않을까? 부정적인 면과 긍정적인 면이 모두 존재하지만 두 가지의 상반된 면이 공존 가능한 조화로움으로 만날 때 북유럽의 전통적인 삶의 규범으로 자리 잡았던 얀테의 법칙(Law of Jante)이 개개인의 자율성을 해치지 않는 사회의 가치 실현으로 다시 거듭나게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해 본다.

<얀테의 법칙과 어긋나는 영국에서의 달리기 시합을 떠올려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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