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관음성지 4번째, 수덕사
33 관음성지 순례길. 그중 네 번째 걸음으로 충남 예산의 깊은 산속, 수덕사를 찾았다. 이름처럼 ‘덕을 닦는 곳’이라 불리는 이 절은, 백제 시대 6세기경 창건되어 1,500여 년의 시간을 견뎌왔다. 이곳은 우리나라 최초의 비구니 선방이 있었던 곳이자, 가장 많은 비구니 스님이 수행하는 사찰로도 유명하다. 그래서일까. 절에 들어선 순간부터 왠지 모를 단단함과 고요함이 마음속 깊은 곳에 번져왔다.
입구인 일주문을 지나자마자 마주한 풍경은 눈부셨다. ‘덕숭산 덕숭총림 수덕사’라 적힌 현판 아래, 붉게 바랜 기둥과 아름답게 채색된 단청은 세월의 무게를 고스란히 간직한 채 나를 맞이해 주었다. 그 앞에 한참을 서 있었다. 내가 그곳에 들어선 것이 아니라, 오랜 세월 동안 그 문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듯한 착각이 들 만큼.
계단을 따라 천천히 오르자 대웅전이 모습을 드러냈다. 수덕사 대웅전은 부석사 무량수전과 함께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 건축물로 알려져 있다. 수백 년 전, 누군가의 손으로 다듬어진 기둥과 처마가 지금까지도 숨을 쉬고 있다는 사실이 경이로웠다. 나무의 결 하나하나가 살아 있는 듯했고, 햇살에 반사된 지붕의 곡선은 마치 한 폭의 그림 같았다. 그 앞에 서 있으니,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곳에서 세상을 바라보던 옛 사람들의 마음은 어땠을까?’ 지금도 이렇게 아름다운데, 그들은 얼마나 깊은 고요와 바람을 품었을까.
그 순간, 멀리서 울려 퍼지는 북소리가 들려왔다. 붉은 가사와 회색 장삼을 입은 스님 한 분이 법고를 치고 있었다. 이어지는 목어(木魚)의 두드림, 그리고 곧장 온몸을 감싸는 듯한 종소리. 그 소리는 단순한 울림이 아니었다. 산을 타고 퍼진 소리는 이내 내 가슴 속을 두드렸다.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평온함과 울컥함이 동시에 밀려왔다.
불교의 의식구는 그저 악기가 아니다. 북은 사방 세계를 깨우고, 목어는 물속의 중생을 일깨운다. 운판은 허공을 떠도는 존재들을, 종은 지옥 속 깊은 고통에 잠긴 중생들마저 구제하려는 간절한 소리다. 그 안에는 생명에 대한 연민과 자비, 깨어남의 염원이 가득 담겨 있다.
스님이 치는 종소리는 낮에는 28번, 새벽에는 33번이라 했다. 낮의 28번은 인간 세상의 스물여덟 별자리를 밝혀 중생을 인도하려는 뜻이고, 새벽의 33번은 하늘의 33천신에게 기도를 올리는 마음이라 한다. 나는 그 뜻을 떠올리며 조용히 두 손을 모았다. 그 울림에 나의 기도를 실었다. 세상의 모든 고통이 잠시라도 멈추기를, 헤매는 이들의 발걸음이 평온해지기를.
수덕사에서의 하루는 조용했다. 하지만 그 조용함은 그저 고요한 것이 아니었다. 수백 년의 시간과 수행자들의 숨결, 그리고 스쳐간 수많은 이들의 기도가 녹아든 고요였다. 나는 그 고요함 안에서 나를 만났고, 마음 한구석이 조금은 환해졌다.
그리고 알게 되었다. 그 종소리는 단순한 쇠의 울림이 아니라, 오래전부터 지금까지 이어지는 ‘법의 소리’였다는 것을. 나를 일깨우고, 나를 부르는 메아리였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