깁스하고 떠난 40일간의 산티아고 순례
'장밋빛 도시', 'Pink City'라고 불리는 프랑스 남부, '툴루즈(Toulouse)'의 거리에는 그 애칭답게 오래된 붉은빛 건축물들이 많다. 건물 하나하나 특색이 살아있어서 출입문 손잡이부터 창문 문양에까지 눈길이 갔다.
4월의 연둣빛 나뭇잎들이 팔랑이고 보랏빛의 꽃잎들에 바람이 닿을 때면 향기가 은은하게 퍼져서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어제의 두려움은 뒤로하고 빛을 향해 오늘의 걸음을 시작했다. 어제 한 번 가봤다고 숙소에서 '생 세르냉 대성당'까지는 금방이었다.
'생 세르냉 성당'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중세 로마네스크 양식의 성당이다. 세르냉 성인은 툴루즈의 첫 번째 주교로 250년경 그리스도교를 전파하다 이곳에서 순교하였다. 당시 세르냉 주교는 발이 황소에 묶여 밧줄이 끊어질 때까지 도시 곳곳을 끌려다녔다고 전해진다. 샤를 마뉴 대제가 세르냉 성인의 유해를 기증했고 프랑스에서 산티아고 콤포스텔라로 가는 '아를(Arles) 길' 위에 있어 많은 순례자들이 들른다. 위에서 내려다보면 십자가 모양이다.
공사 중이던 문을 뒤로하고 성당 주변을 한 바퀴 크게 돌아 또 다른 입구를 찾았다. 웅장하고 거대한 겉모습만큼이나 내부의 천장도 높았다. 세월의 흔적이 묻어나는 벽화들은 화려하기보다 진중한 무게감을 전해주었다.
성전 한가운데 십자가와 함께 세르냉 주교가 황소에 끌려다니는 그림이 새겨져 있었고 천사들에 의해 하늘로 들려 올려지는 조각도 보였다. 바로 위 천장 돔에는 주님과 천사들의 모습이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었다. 이 부분만큼은 햇빛을 받아 화려하게 빛이 났다.
운 좋게 파이프오르간 연습시간이 맞았다. 잠시 멈춰 앉아서 들려오는 연주 소리와 함께 십자가에 인사를 했다. '저 잘 왔어요! 감사합니다:)' 고개를 들어 성당 곳곳을 천천히 살펴보았다. 성전 왼편에 창살로 된 문과 안내판이 보였다. 안 쪽은 시간을 정해놓고 개방하는데 알 수 없는 프랑스어 사이로 보이는 숫자들 추정해볼 때 10분 정도만 기다리면 문이 열릴 것 같았다. 숨을 고르며 기다렸고 문이 열렸다.
'후~'하고 불면 색감이 옅어질 것 같은 벽화들이 곳곳에 보였다. 칠이 벗겨진 그대로 지나간 세월을 말해주었다. 이런 동양적인 색감은 오히려 우리나라의 오래된 사찰에 잘 어울릴 것 같이 이색적이었다. 염하는 곳과 석관 등이 눈에 띄는 이곳은 Crypt, '지하묘지'로 들어가는 입구였다.
'세르냉 성당'의 왼쪽 공간은 '지하묘지(Crypt)'로 이어진다.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는 오전 10시-오후 12시, 오후 2시-5시 30분, 일요일에는 오후 2시-5시 30분에만 개방된다. 성인과 신자들의 유해와 유물이 모셔져 있는 곳이라고 한다. 입장료는 2.5유로인데 순례자 여권이 있으면 무료이고 스탬프도 찍을 수 있다.
사실 나에게 툴루즈와 리옹은 '떼제 가는 길'로 갑자기 오게 된 곳이라 이곳에서 순례자 여권에 도장을 찍을 수 있다는 것도 나중에서야 알았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봤던 모든 것들은 눈과 마음으로 먼저 담게 되었다.
어쩐지 으스스했던 지하묘지를 둘러보고 위로 올라오니 사순시기 막바지 '십자가의 길' 기도가 한창이었다. 세르냉 성당 십자가의 길 성화를 보면서 루르드의 기억들이 떠올랐다. 비 맞으면서 했던 십자가의 길 기도와 절실했던 마음, 뜨거운 눈물들이 함께 떠올랐다. 툴루즈의 풍경들도 내 머릿속 어딘가를 헤매다 무언가에 의해 또 다른 기억과 추억으로 쏟아져 나오기를, 그때에도 충만해지기를 희망했다.
세르냉 성당에서 캐피톨 광장에 이르는 'Rue du Taur(황소의 거리)'를 따라 나오는 첫 번째 골목 왼편에는 보물 같은 장소가 숨겨져 있다. 발길 따라 무작정 걷다가 발견한 공립도서관 옆 작은 예배당이다.
'Chapelle des Carmelites(샤를르 데 카르메리트)'는 17세기의 채플이다. 루이 13세와 아내 오스트리아 앤에 의해 1622년 가르멜 회당으로 설립되었다. 수녀원은 프랑스혁명 때 파괴되었지만 예배당은 남아서 현재까지 갤러리나 콘서트홀로 사용되고 있다. 바티칸의 시스티나 성당(Sistine Chapel)에 영감을 받아 Jean-Pierre Rivals와 Jean-Baptiste Despax가 벽화를 그렸는데 화려하다.
골목길에 있어서 자칫 놓치기 쉽지만 무료입장에다가 천장과 벽을 가득 채운 그림들은 대단하다. 내가 방문했을 때에는 아마추어들의 그림과 의상들을 전시 중이었는데 수묵화처럼 동양 작품들도 눈에 띄었다.
밖으로 나와 다시 타우르(Taur) 거리를 따라 걷다 보면 세르냉 성당과 캐피톨 광장의 중간지점에 성당이 하나 더 나온다. '타우르 노트르 담(Taur Notre Dame)', 즉 타우르 성모 마리아 성당이다.
규모면에서는 훨씬 작지만 '생 세르냉 성당'의 축소판 같다고 생각했는데 역시 관련이 있었다.
'타우르 노트르담 성당(Notre-Dame du Taur)'은 로마 가톨릭 교회로 세르냉 성인이 황소에 끌려다니다 순교한 정확한 지점에 세워졌다고 전해진다. 전승에 따르면, 순교한 자리에 시신이 묻혔고 그 자리에 성당이 세워졌다. 산티아고 콤포스텔라로 향하는 순례길 위에 있어 순례자들이 늘어나자 12세기에 '생 세르냉 성당'을 지어 성인의 유해를 옮겼다. 원래는 'Saint-Sernin du Taur'로 불리다가 1783년 툴루즈 성벽이 철거되면서 그곳 예배당에 있던 성모 마리아상을 이곳에 옮겨오면서 'Notre-Dame du Taur'가 되었다.
벽돌, 성화, 성당 전체가 옛것 그대로를 간직하고 있어서 타임머신을 타고 옛날로 돌아간 것 같았다. 오른쪽에 보이는 벽화는 14세기 프레스코화로 38명의 인물, 야곱의 족보를 보여준다.
성전 한가운데 아기 예수님을 안고 있는 성모 마리아상이 눈에 띈다. 화려한 옷을 입은 '검은 성모님'이다. 보통의 성모상은 흰 옷을 입고 장미꽃 위에서 뱀을 밟고 묵주를 들고 있는 모습인데 폴란드 쳉스토호바의 야스나고라 수도원, 스페인 몬세라트 수도원 등의 '검은 성모님'은 세계적으로도 사랑을 받고 있다.
이곳 타우르 노트르담 성당에서 도보로 10분 거리인 가론강가에 위치한 '도라다 성모성당(Basilica Notre-Dam Daurade(Dorada))'은 5세기 초 아폴로 신전 자리에 세워진 프랑스에서 가장 오래된 노트르담(성모 마리아) 성당으로 알려져 있다.
1672년 8월, 큰 화재에서 툴루즈 성미카엘 지역을 구해 '구원의 성모님(Our Lady of Deliverance)'으로 불리는 도라다 성모님도 '검은 성모님'이다. 그 영향인지 툴루즈에서 검은 성모님을 만나는 것은 자연스럽다.
황소의 길(Rue du Taur)을 비롯한 모든 길은 '캐피톨 광장(Place du Capitol)'으로 이어진다. 서울시청이나 서울역 광장과 비슷한 '만남의 광장' 풍경이다. '가장 아름다운 시청 건물'로 불리며 현재도 사용되고 있다.
오면서 들렀던 '가르멜 예배당(Chapelle des Carmelites)' 못지않게 화려한 회화로 장식되어 있는 내부도 일부는 일반에 공개되어 관람이 가능하고 결혼식장이나 연회장으로 쓰이기도 하며 극장도 있다. 시청 건물이라 그런지 당시 프랑스 전역에 노란 조끼 시위가 확산되었을 때라 그런지 안뜰만 구경하는데도 짐 검사를 했다.
광장 오른쪽과 맞은편에는 수많은 상점과 레스토랑들이 들어서 있고 이벤트가 끊이지 않는다. 캐피톨을 보고 오른쪽 아케이드에는 프랑스 화가 '레이몬드 모레티(Reymond Moretti)'가 툴루즈의 역사와 영웅을 주제로 그린 29점의 화려한 색감의 그림들이 천장에 이어져있다.
캐피톨 광장에서 가론강 쪽으로 5분 정도 걸으면 또 하나의 툴루즈 명소, '자코뱅 수도원'이 나온다. 금요일 오후라 거리에 사람이 점점 많아지고 있어서 가는 길 내내 신경이 쓰였는데 대학교 옆에 위치한 수도원에 가까워지자 담벼락을 가득 채운 학생들로 더 정신이 없었다.
자코뱅 수도원은 13세기에 도미니코회 수도원으로 세워졌으며 가톨릭 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Saint Thomas Aquinas)의 유해가 모셔져 있다. 1789년 프랑스혁명 뒤에 수사들이 떠나고 1804년에는 툴루즈시에 소유권이 넘어갔다. 나폴레옹 때 이곳을 개조해 군인들을 위한 막사와 병기 창고, 마구간 등으로 사용하다 1847년 군대가 다른 곳으로 옮겨간 후에 수차례 복원작업을 통해 현재의 모습을 갖추었다.
생 세르냉 성당과 비슷한 탑과 웅장함 속에는 야자수 모양으로 뻗은 아치가 빛과 어우러진다. 높은 천장을 넋을 잃고 보게 되는 자코뱅 수도원의 현재는 전시회, 콘서트, 연극 등의 이벤트로 가득 차 있다.
내부 회랑에는 작은 경당들과 아퀴나스 성인의 유해가 모셔진 중앙 제대가 있고 4유로를 내면 작은 예배당과 풀향기, 새소리 가득한 정원으로 들어갈 수 있다. 금요일 밤을 맞이하는 바깥세상과 달리 한적한 수도원의 분위기가 느껴지는 곳으로 마치 다른 세계로 들어가는 기분이 든다.
따뜻한 햇빛 속에 책을 읽는 사람, 눈을 감고 기둥에 기대어있는 사람, 천천히 정원을 거니는 사람, 산들거리는 바람 속에서 분주한 존재는 날갯짓하는 작은 새뿐이었다. 열심히 보고, 사진 찍고, 다음 장소를 찾고, 천천히 다니겠다는 목표가 무색하게 또다시 옛날의 나로 돌아가 분주했던 내 모습도 잠시 멈출 수 있어 감사했다.
기둥에 기대어 앉아 한참을 가만히 앉아있었다. 벽돌 한 장, 창문 하나, 부서지고 벗겨진 틈, 수세기를 버텨온 건축물이 담고 있는 수많은 이야기들이 들리는 것 같았다. 수도원 탑 꼭대기에는 낮에도 달이 걸려있었다.
정원 안쪽의 작은 예배당에도 세월을 가득 머금은 벽화들이 색이 바랜 채 나를 기다리고 있었고 높은 천장을 가진 '식당'이라는 이름의 공간은 한 때 마구간으로도 사용되었다는 안내문구가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건축물도 사람처럼 자신이 버티려는 시간에 비례해서 전혀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를 담아낼 준비까지 해야 하는가 보다.
조용한 공간에서 시간을 보내고 나니, 다시 세상으로 나갈 에너지가 채워졌다. 가론강가로 향했다.
프랑스 남서부를 흐르는 가론(Garonne) 강은 센강, 론강을 비롯한 프랑스 4대 강 중 하나다. 금요일이라 그런지 서울의 한강 공원처럼 많은 사람들이 강을 바라보며 휴식을 취하고 있다. 중세부터 툴루즈를 지켜온 '라 그레이브 병원(Hôpital de La Grave)'과 '성요셉 예배당(Chapelle Saint Joseph)'의 돔이 강 건너 보이는데 '퐁네프(Pont Neuf) 다리'를 건너면 갈 수 있다.
익숙한 이름이다. 가론 강에도 파리 센강의 퐁네프와 동일한 이름의 다리가 있다. 영화 '퐁네프의 연인들'에 나오는 다리는 파리 센강의 퐁네프이지만, 이곳에도 연인들은 많았다. '새로운'이라는 뜻을 가진 이 다리는 이름과 반대로 툴루즈에서 가장 오래된 다리이다.
앉아서 하염없이 바라만 봐도 좋고 강을 따라서 천천히 걸으면 더 좋다. 퐁네프 다리부터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는 '미디 운하(Canal du Midi)'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뜨거운 햇살과 시원한 강바람, 간간히 들리는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기분 좋게 맴돌았다.
하지만 다리를 3개나 지나 툴루즈 경제학교까지가 한계였다. 미디 운하까지는 온 만큼의 거리를 더 걸어야 하는 상황이라 여기서 멈추는 것을 툴루즈에 또다시 올 핑계로 삼기로 했다. 미디 운하와 퐁네프 다리의 중간지점에 위치한 '브리앤 운하(Canal de Brienne)'는 Canal de Saint-Pierre라고 불리기도 하는데 미디운하와 가론운하, 가론강을 연결한다. 물줄기가 합쳐지는 부분이라 먹이가 많은지 많은 새들이 무리 지어 있었다. 평화로운 풍경들을 한참 동안 바라보는 사이에 해가 지면서 도시 전체가 노을로 물들었다.
다시 숙소로 돌아가는 길, 거리 한 복판에 있는 회전목마에도 노란 알전구에 불이 들어왔다. 툴루즈의 꽉 찬 하루가 저물어 갔다. 관광객 모드로 너무 열심히 돌아다닌 탓인지 다쳤던 발을 비롯해서 온몸이 다 아프고 입맛은 뚝 떨어졌다. 툴루즈에서는 콩 스튜인 카슐레와 푸아그라를 먹어봐야 한다던데 내 발은 숙소로 향했다.
숙소로 돌아와 하루 동안 찍었던 사진들을 보는데 셀카 외에는 온통 풍경이나 건물 사진이었다. 여유롭게 걸으면서 볼 수 있는 것만 보자고 다짐해놓고 또다시 미련하게 '툴루즈에서 꼭 봐야 하는 것' 목록을 검색해서 꾸역꾸역 아픈 발을 끌고 미션을 수행한 내 모습이 안쓰러웠다. 루르드에서 그 엄청난 기적들을 경험하고도 대도시 생활 하루 만에 다시 종종 대던 옛날의 나로 돌아온 것 같아 씁쓸했다.
인간에게도 '관성의 법칙'이 해당된다는 걸 다시 한번 느끼면서 이 여행의 감동과 깨달음이 한국에 돌아가면 없던 일처럼 될까 봐 두려웠던 날이다. 한국에 돌아온 지 벌써 6개월, '오래전 일들'이 돼버린 이 날들을 이렇게라도 하나씩 정리하려는 이유 중 하나는 여전히 작용하고 있는 이 관성을 거스르고 싶어하는 내 또 다른 관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