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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통 편지 사랑법

무자식이 상팔자(無子息이 上八字)?

by 숲song 꽃song
『옆집 엄마는 무슨 재미로 사나?』에서는 옆집 엄마(숲 song 꽃 song)가 마흔 즈음에 써 둔 습작글 중에서 누구에게나 있지만, 누구에게도 없는 일상이야기를 하나씩 꺼내어 연재합니다. 담장너머 옆집 엄마네 살아가는 이야기 속에서 작은 웃음, 조그마한 삶의 팁이라도 챙겨가실 것이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기쁠 거예요.

나는 요즘 '무자식이 상팔자(無子息이 上八字)'라는 어른들의 말씀을 자주 생각해 보곤 한다. 아이들이 커갈수록 부모노릇하기가 쉽지 않음을 절감하고 있기 때문이다.


큰 아이가 돌이 되기 전이었다. 직장 다니랴, 아이 키우랴 하루가 어떻게 가는지 모르게 정신없이 살다 보니, 하고 싶은 일을 마음껏 할 수 없다는 사실이 못 견디게 답답해지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근처에 사는 오빠가 4살 된 조카를 데리고 놀러 왔다. 다 큰 것 같은 조카를 바라보며 '우리 애가 저만큼만 컸으면 얼마나 좋겠느냐'며 몹시 부러워했다. 오빠는 모르는 소리 말라는 듯

"커 봐라!"

단 한마디로 내 말을 일축했다. 그 뒤로도 몇 차례, 우리 애보다 앞서 커 가는 조카의 모습을 볼 때마다 내가 던진 부러움에 대한 오빠의 반응은 언제나 한마디 "커 봐라!"였다.


아이가 딱 다섯 살이 되었을 때 나는 오빠의 말이 무슨 뜻임을 눈치챌 수 있었다. 유난히 자기주장이 강하고 고집이 센 딸아이와 지극히 사소한 일로 다투는 일이 잦아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다섯 살짜리 아이와 다툰다는 사실이 우습기도 했지만, 나는 정말로 아이를 감당하기가 힘들었다. 내 아이와 나의 관계가 벌써부터 이렇다면 사춘기를 맞이할 때쯤이면 어떤 예기치 못할 갈등으로 마음고생을 해야 할까 지레 걱정이 되기도 하였다.


아이가 어느덧 고학년이 되고 보니, 아이에 대한 고민은 또 다른 모습으로 찾아왔다. 갈수록 심각해지는 취업난과 그에 발맞추어 발악하는 입시열풍 앞에서 아이를 어떻게 이끌어주는 것이 부모노릇을 잘하는 것인지 갈피를 잡기가 힘들어진 것이다. 그동안 지켜왔던 '쥐꼬리만 한 소신'마저 주변에서 떠들어대는 소리에 이리저리 흔들려 여간 힘든 게 아니다. 세상은 또 얼마나 흉흉하고 어수선한가. 그저 별 탈 없이 건강하게 잘 자라주는 것만도 큰 행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가도, 그 생각마저 오래가지 못한다. 당장 낼모레가 시험이라고 말해놓고 그저 좋아하는 책만 끼고 있는 아이를 보면 금방 쓴소리가 튀어나오려고 하니 말이다. 자녀노릇도 부모노릇도 갈수록 힘든 세상이다.




기왕지사 하늘이 내려주신 자식이 둘이나 있어 '상팔자'와는 거리가 멀어졌으니, 나는 아이들에게 이 험한 세상에서 무시로 맞닥뜨리게 될 절망과 고통의 순간에 따뜻한 위로와 희망이 되어줄 만한 정신적 유산을 하나쯤 물려주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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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마음으로 올 들어 큰 마음먹고 시작한 것이 '필통편지'였다. 만만하게 보이는 일은 아니지만, 몇 년 전에 출판되어 이 땅의 엄마들을 잔뜩 주눅 들게 했던 조양희 작가의 '도시락 편지'를 흉내 내어 보기로 한 것이다. 요즘은 학교급식을 실시해서 엄마들이 도시락을 싸지 않으니, 도시락 대신 생각난 것이 필통이었다. 아이들이 학교에 도착하면 제일 먼저 꺼내놓게 되는 것이 필통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필통을 여닫을 때마다 필통 속에 담긴 편지를 바라보며 엄마의 따뜻한 사랑과 미소를 떠올리게 될 테니 여러 가지로 참 잘되었다 싶었다.


사실, 아이들과 얼굴을 맞대고 대화를 나누다 보면 의도한 대로 대화가 이루어지지 않고 엇나가는 경우가 많다. 특히 충고와 조언이 필요한 경우에는 섣불리 말을 시작했다가 도리어 서로 상처를 받는 경우도 종종 생긴다. 편지를 사이에 두고 이야기를 하자, 아이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를 충실히 전할 수 있었다. 아이들 또한 엄마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순수한 마음으로 받아들였다. 필통편지에는 집에서 있었던 이야기나 꼭 들려주고 싶은 아름다운 이야기, 또는 학교생활이야기, 그리고 아이의 생각을 엿볼 수 있는 생각거리들을 주로 담아주었다. 어떤 날은 마땅히 할 말이 없는 경우도 있다. 그런 날은 예쁜 동시 한편이나 퀴즈, 깔깔 유머, 그리고 깨알같이 '사랑해'라는 말만 가득 채워 넣어주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평소에 자주 나누지 못하는 사랑의 표현들을 편지에 듬뿍 담아 보내주니, 두 아이들 모두 친구들 사이에서 부러움을 받는 존재가 되었다. 어쩌다 편지를 쓰지 못한 날에는 친구들이 먼저 "오늘은 왜 편지가 없냐?"라고 궁금해한다고 했다. 아침마다 편지를 보려고 아이의 필통 앞으로 몰려든다는 반 친구들을 생각하여 가끔, 깜짝 퀴즈와 함께 나눠먹을 간식을 넣어주기라도 하는 날이면 아이는 '인기 짱'이 되어 돌아왔다.


무슨 일이든지 정성이 중요하다. 필통편지를 쓰기 시작하면서부터 나의 하루는 더욱 바빠졌다. '오늘은 어떤 이야기를 어떻게 꾸며 전할까?'하고 아이디어를 짜내며 편지를 쓰다 보면 1시간이 금세 훌쩍 지나갔다. 게다가 평소에 소재거리를 많이 찾아 두어야 하기 때문에 이 책 저 책 뒤적거리는 시간도 만만치 않다. 그러나 그 덕에 예전엔 그냥 쓰레기통으로 보내버렸을 잡지며 전단지들도 꼭 한 번씩 훑어보고 필요한 것을 챙겨놓는 알뜰함이 생겼다. 편지를 쓰는 시간은 내 삶을 가만히 응시해 보는 성찰의 시간으로 자리를 잡았다.


편지를 보내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이들도 내 가방에 편지를 넣어주기 시작했다. 출근길, 주로 신호대기하면서 읽어보는 아이들의 편지는 나의 하루를 힘차게 열어주는 활력소가 되었다. 아이들 또한 내 편지를 받고 힘을 내리라 생각하면 가슴 한 구석이 뜨거워졌다.


지금 우리 집 책꽂이에는 딸아이 몫과 아들 몫 그리고 내 몫의 세 권의 편지파일이 꽂혀 있다.

세상사는 일이 어디 날마다 즐겁고 행복하기만 하겠는가? 아이들과 내가 나눈 편지들은 슬프거나 우울하거나 쓸쓸한 어느 날에 따뜻한 위안이 되고 희망이 되었다가, 두 아이가 결혼할 때쯤이면

"언제까지나 널 사랑해"


라는 말과 함께 두 아이의 손에 넘겨지게 될 것이다. 그리고 아이들이 남겨두고 간 내 몫의 편지들은 오래도록 내 곁에서 따뜻한 위안이 되어주리라.


자식이 있기 때문에 이런저런 뜻밖의 기쁨과 삶의 의욕이 솟아나니, 부모노릇이 아무리 힘들다 해도 '무자식이 상팔자(無子息이 上八字)'라는 어른들의 말씀에 자꾸 의문의 꼬리를 달고 싶어 진다.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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