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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비눈 Nov 18. 2021

사과를 잘 깎게 되었다는 것은

위에서 아래로만 흐르는 그것, "사랑이네."


"사랑이네." 


한 달 전, 우리 집에 놀러 온 친구가 내가 사과 깎는 걸 보고 한 말이다. 

내가 과일 깎기를 싫어한다는 걸 알기에, 스스럼없이 과일을 깎는 모습에 놀란 것이다. 그 순간 내가 많이 변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결혼할 때 “나 과일 깎는 거 싫어해. 과일 깎아야 하는 순간이 오면, 꼭 오빠가 해.”라는 다짐을 받을 정도였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여러 명 모여 식사를 하고 나면 꼭 과일을 후식으로 먹는다. 우리 집에서야 안 하면 그만이지만, 시부모님 앞에서 과일 깎는 것이 스트레스 일 것 같아 미리 신랑에게 당부한 것이다.




아이가 태어난 지 6개월, 사과를 먹을 수 있는 나이가 되었다. 여전히 사과 깎는 일이 유쾌하진 않았으나, 아이가 먹을 수 있는 과일이 사과밖에 없었기에 사과를 깎아 주었다. 아이는 처음 맛보는 달콤함에 사로잡혀 사과를 먹고 또 먹었다. 그때부터 하루에 하나씩 사과를 먹게 되었고 나의 칼질 솜씨는 점점 늘었다. 



예전엔 사과를 보면 한숨부터 나오며 스트레스받았지만, 지금은 대화를 하면서도 사과를 꽤 예쁘게 깎을 수 있게 되었다. 나의 이 변화를 보고 친구는 '사랑'이라 불렀다.





내가 과일 깎는 것을 두려워하게 된 것은 부모님의 말 때문이었다. 학창 시절, 집에서 사과를 처음 깎는데 서툰 솜씨에 "아이고, 맛있는 과육은 다 버리고 씨만 먹겠네." 소리를 들었다. 과일 깎는 것이 처음이니 당연한 실수였고, 질책이 아닌 웃어넘길 정도의 가벼운 농담이었다. 



그다지 상처로 남은 것도 아니었는데 왜인지 그날부터 과일 깎는 것이 두려웠다. 그래서 독립하여 자취할 때도 깎는 과일은 먹고 싶어도 사지 않았다. 내가 사는 과일은 겨울엔 귤, 여름엔 씨 없이 껍질 채 먹는 포도, 두 가지뿐이었다. 






스스로 절대 사지 않을 과일은 단연 수박이다. 무겁고 양이 너무 많은 데다 자르기도 보관하기도 어렵다. 씨를 발라내는 것도 귀찮고 껍데기 처리 역시 번거롭다. 



하지만 아빠는 여름이 되면 2주에 한 번꼴로 수박을 사 오신다. 다른 과일도 많은데 왜 귀찮은 수박을 자꾸 사 오는 건 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래도 수박의 달콤하고 시원한 맛은 좋아해서 엄마가 잘라 내어 주면 슬그머니 앉아 먹었다. 




독립한 지 얼마 되지 않은 20살 여름날, 친정에 놀러 와서 시간을 보내고 자취방으로 돌아가려 할 때, 엄마가 수박을 가져가라고 했다. 고마움보다 수박을 들고 가는 노고와 잘라먹을 귀찮음이 앞서 짜증이 났다. 



"나 수박 안 좋아해. 안 들고 갈래." 내 마음을 눈치챘는지 엄마는 잠시 기다리라며 부엌으로 갔다. 그리고선 냉장고에서 꺼낸 수박을 칼로 숭덩숭덩 잘라서 통에 담아 내 손에 쥐어주었다. 


"그래도 들고 가. 여름에 수박을 먹어야 더위를 견디지." 썩 내키지 않았지만 못 이기는 척 받아 들고 집으로 향했다.





올해도 6월이 되자마자 아빠는 수박 한 덩이를 가져왔다. 주말 부부를 하는지라 주말이면 짐도 많은데, 기어이 무거운 수박을 들고 온 것이다. 엄마는 수박을 받아 들어 먹기 좋은 크기로 잘라 쟁반 위에 예쁘게 담았다. 그중 어떤 수박은 씨가 있고 어떤 수박엔 씨가 없었다. 



엄마, 아빠는 씨가 있는 수박을 들고 먹기 시작했다. 그리고선 씨 없는 수박을 나와 내 딸에게 건넸다. “너 씨 있는 거 싫어해서 수박 안 먹잖아. 이거 먹어.” 



그때 한 달 전 들은 친구의 말이 귓가를 스쳐 나도 모르게 입 밖으로 흘렀다. “사랑이네.” 


못 들은 것인지, 못 들은 척하는 것인지 엄마와 아빠는 아무 말도 없었다. 무거운 수박을 짊어지고 온 아빠와 온 힘을 다해 수박을 자르고 씨를 골라내는 엄마의 마음은, 사랑이었다. 




내가 엄마, 아빠에게 한 적 없고
엄마, 아빠는 할머니, 할아버지께 한 적 없는 사랑이었다. 




왜 사랑은 아래로만 흐르는 걸까. 

왜 사랑은 아래로 흐르기 전엔 위의 사랑을 눈치 채지 못하는 걸까.


사랑의 물살이 방향을 틀어 위로도 흐를 수 있을까. 



사랑의 물살에 못 이겨 나는 계속 아이를 향해 흐르겠지만, 가끔은 뒤를 돌아 내 위에서 나를 밀어주는 그 마음을 지그시 바라본다.










현재 저희 딸내미는 4살이에요!

사과를 좋아하던 아이는 무럭무럭 자라 사과 킬러가 되었습니다.

내년엔 사과로 토끼 모양도 만들 수 있게 되려나요?ㅎㅎㅎㅎ


내가 상상하지 못했던 것을 자연스레 하게 되는것, 그게 부모인가봅니다.




사진 출처: 핀터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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