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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밤 Oct 12. 2023

우리는 존재하기 위해 그곳에 모였다

2014년, 신촌 퀴어퍼레이드에서

한가로운 주말, 애인에게 다가가면 어느새 봄이가 달려온다. 어떻게 아는지 우리가 손만 잡아도 달려온다. 단속반도 이런 단속반이 없다.  

    

“봄이가 동성애를 반대하는 게 분명해” 


나의 진지한 표정에 애인이 풋 하고 웃는다. 그렇게 생긴 봄이의 별명은 도곡동 동성애 반대위원장. 우리가 스킨십을 하면 밥을 먹다가도 잠을 자다가도 오줌을 싸다가도 어김없이 나타나 가운데 자리를 차지한다. 이것이 정말 신념으로 하는 활동이라면 상을 줘도 모자르다. 하지만 사랑은 늘 혐오보다 강하다. 우리는 어떻게든 봄이 몰래 뽀뽀하고, 어떨 때는 간식으로 유인해 봄이를 문 밖으로 내쫓기도 한다. 


농담으로 한 말이지만, 우리가 이성애자였다면 그런 표현은 떠오르지도 않았으리라. “이성애 반대”라는 말은 듣지도 보지도 못했다. 매년 퀴어 축제에 가기 위해 시청역 5번 출구에 나갈 때면 숨을 먼저 골랐다. 출구로 나가기 전부터 “동성애 OUT” 피켓을 들고 다니는 사람들이 보였다. 5번 출구 밖으로 발을 내딛기도 전에 귀에 꽂이는 “동성애는 죄악입니다” 소리, 알아듣기 힘든 욕설들, 동성애가 에이즈를 퍼트린다는 가짜 뉴스가 적힌 피켓들이 줄지어 기다린다. 


운이 나쁘면 한쪽 팔을 붙잡힌 채 기도 세례를 받아야 한다. 내 팔을 붙들고 기도했던 한 중년 여성은 “불쌍한 어린양을 구원해달라”며 눈물을 흘렸다. 그녀 뒤로 “사랑하기 때문에 포기하지 않겠다”는 피켓이 보였다. 흠칫 놀라 팔을 뿌리치면 “몇 살이냐”라는 말이 나오는 혐오의 거리. 광장 입구까지 1분도 안 되는 그 길을 나는 매번 나의 존재를 ‘반대’한다는 사람들을 헤치고 나갔다. 한국에서 하루 다섯 시간가량 사랑하는 사람과 맘껏 뽀뽀할 수 있는 광장이 펼쳐진 곳, 내가 나로 존재할 수 있는 그곳으로.  

   

2014년 신촌 퀴어 퍼레이드는 또렷하게 내 마음 남아있다. 퍼레이드 행렬을 막아선 혐오 세력 때문에 5시간을 넘게 대기했다. 처음이었다. 나의 존재를 반대하는 사람들을 그렇게 가까이서 마주한 건. 꽃무늬 블라우스에 선글라스를 낀 오십 대 여성, 등산복을 입고 사파리 모자를 쓴 사십 대 남성, 성경책을 들고 나온 내 또래 청년까지. 한 명 한 명 어디선가 만나고 본 적이 있는 것만 같았다. 그 평범해 보이는 사람들이 한 시간도 안 되는 우리의 행진을 막겠다며 만든 피켓에 적힌 ‘반대’라는 선명한 글자를 봤다. 그들이 차디찬 도로에 아무렇지도 않게 눕는 장면도 봤다. 경찰에 의해 한 명 한 명 끌려나가는 장면까지. 집에 돌아갈 수도 있었는데 그러지 않았다. 나는 걸어야 했다. 나로 걸을 수 있는 한 시간이 절실했다.  

    

두 시쯤 시작됐던 소동은 해질 무렵에야 정리됐다. 트럭이 천천히 속도를 올렸고, 흥겨운 음악에 가볍게 몸을 흔들며 길을 걸었다. 어두운 밤거리의 간판 빛들을 조명 삼아. 달려오는 차들의 라이트 빛을 손전등 삼아 행진했다. 그러다 갑자기 속도가 천천히 느려지더니 행진이 뚝 멈췄다. 누군가 뛰어들어 다시 길을 막은 것이다. 속에서 뜨거운 것이 올라오는데, 누군가 노래를 시작했다. "아아 영원히 변치 않을 우리들의 사랑으로 어두운 곳에 손을 내밀어 밝혀 주리라."* 그 흥얼거림이 번져 떼창이 되었을 때, 나는 왜 내가 매년 이 행진에 나왔는지 알았다.


우리는 그날 하루 존재하기 위해 그곳에 모였다. 그리하여 싸우지 않고 싸웠다. 그날 이후 난 치밀어 오르는 뜨거운 분노로부터 놓여났다. 나의 존재를 부정하고 반대하는 사람들과 싸울 이유도, 설득할 이유도 없었다. 혐오가 길을 막고 행진을 지연시킬지는 몰라도 사랑의 노래는 막을 수 없었다. 그들이 때리고 밀치고 멱살을 잡는 순간에도 나는 여전히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언젠가 이성애자 지인이 물었다. “싫어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왜 굳이 나가서 퀴어축제를 해?” 한 번도 자신을 부정당해본 적 없는 듯한 천진한 표정에 말문이 막혔다. 그때 못한 답을 지금이라도 하고 싶다. “1년에 한 번 내가 성소수자로 거리에 나가 걷는 일이 불가능하다면, 나머지 364일의 일상은 어떻겠니. 반대로 일상에서 내 존재 그대로 환대받을 공간이 있다면, 굳이 거리로 나가 퍼레이드를 하진 않겠지. 우리는 매년 걸으면서 그 하루를 늘려갈 뿐이야.” 지인에게 이성애자 축제가 없는 이유를 물으면 뭐라고 답할까. 일상이 축제이고, 퍼레이드인 그는 그 이유를 알까.


가끔 신촌에서의 그날을 떠올린다. 그날 트럭 앞에 누웠던 사람은 우리의 노래 속에서 안전하게 귀가했다. 6년이 지난 지금 그 사람의 가슴에는 여전히 분노가 들끓을까. 시간이 갈수록 난 이상하게 차분해진다. “동성애를 반대합니까?” 대선 토론마다 어김없이 등장하는 질문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후보 시절 저 질문에 “그렇다”라고 말했던 순간도 선명히 기억한다. (이후 그는 동성애가 아니라 군대 내 동성애를 반대한다는 의미였다는 여전히 혐오가 담긴 해명을 했다.) 그런 발언이 여전히 TV를 통해 전파된다는 사실에 속은 상했지만, 타격은 없었다. 그들이 아무리 반대해도 애인과 나는 오늘도 뽀뽀하고 포옹하고 사랑할 테니까. 분노와 혐오가 들끓는 가슴이 아니라 사랑이 들끓는 가슴으로 살기를 선택했으니까. 반대 앞에서도 호탕하게 웃기로 했다.


덧. 사실 애인과 내 사이로 파고들어 안기는 센터 집착견 봄이는 사랑스럽다. 그런 그에게 사실 '동성애 반대위원장’이란 직함은 어울리지 않는다. 혐오가 그렇게 사랑스러울 리 없다.      


*해바라기 <사랑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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