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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omBom Mar 30. 2024

UNIT 09. 감정을 읽어주는 물건

MONO PROJECT ARCHIVE

몇 년 전 드라마의 주요 인물이 했던 대사 중 한 구절이다.


내 원체 이리 아름답고 무용한 것들을 좋아하오. 달, 별, 꽃, 바람, 웃음, 농담, 뭐 그런 것들.


무용(無用)하다, 쓸모가 없다는 말에 붙은 아름다운 단어들이 생각에 맴돌아 몇 번이고 곱씹어 보게 된다. 아름답다는 것의 기준 역시 개인적인 선호에 따른 것이겠지만, 목적 없이 아름다움을 소유하고 싶은 인간의 기본적인 욕망은 다 같은 것이 아닐까 싶다. 물론 소유할 수 없고 영원하지 않아 더 아름답다고 느끼는 것들도 있다.


예술이라는 것은 본래 기술과 같은 맥락에서 인간에게 결실을 주는 창조적 활동의 의미로부터 출발했다고 하는데, 18세기 이후로 좀 더 직관적이고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미의 기술을 구별하는 개념으로 사용이 되었다고 한다. 예술 그 안에서도 종이 위로 표현된 그림에서 생각들을 발견하는 순간의 기쁨이 좋다. 오래 공부한 지식체계나 전문적 견해를 가질 수 있으면 좋겠지만 그저 보는 것만으로 느낄 수 있는 감흥이다. 물론 관심을 가지니 알고 싶고, 그러면서 하나씩 알아가는 기쁨 역시 크다.


작품 외에도 미술관이나 박물관의 공간을 통해서 많은 위로를 받고 있다. 틈이 날 때면 어느 곳이든 가깝게 갈 수 있는 미술관으로 걸음을 옮기곤 한다. 바쁜 일상에서 한숨 돌리며 온전히 ‘본다’는 행위에 집중해 그림을 마주할 수 있는 공간으로 들어간다는 것 자체의 즐거움을 알아버린 것이다. 언제 어디서든 쉽게 찾아갈 수 있는 영감의 공간이 있다는 것은 서울살이의 혜택 아닌 혜택 아닐까 싶다.


근래는 여러 해, 여러 날에 걸쳐 부암동에 위치한 ‘환기미술관’을 찾아갔다. 작가 ‘김환기’의 뜻을 담아 배우자이자 지원자인 작가 ‘김향안’이 1992년에 북악산 자락에 터를 잡은 미술관이다. 미술관 내부는 중앙이 탁 트인 공간으로, 빛이 중앙으로 몰려 들어와 따뜻하고 생명력이 느껴진다. 경사지에 위치하고 부암동 안쪽 골목에 있어 처음 찾아갈 때는 조금 불편함을 느낄 수도 있겠다. 부암동이라는 동네가 주는 느낌에 완벽하게 들어맞는 미술관인 것 같아 더 사랑스럽다. 보통 걸어서 미술관에 가도록 외출 코스를 잡는데, 경복궁역에 내려 청운초등학교 길 쪽으로 쭉 올라가면 45분 남짓의 거리가 된다. 미술관에 들러 조용히 둘러보고 나와 자하손만두에 가서 만둣국을 한 그릇 해도 좋고, 아니면 주변의 빵집에 들러 빵을 사서 윤동주문학관 2층의 노천카페에 잠깐 앉아 쉼을 가져도 좋다. 내려다보이는 서울 풍경 맛집 중 한 곳이다.


무언가 보러 간다는 목적도 있겠지만, 외부와 어느 정도 분리된 공간에 떨어져 일상에 전혀 관계없는 무목적의 관람에 몰두할 수 있다는 것이 작은 틈이지만 여유가 된다. 일을 계기로 우연히 접하게 된 한국 추상미술에 대한 관심이 어쩌다 보니 이어지게 된 것인데, 점으로 수놓는 무한히 반복되는 행위를 통해 완성된 그림 안에 무수히 누적된 시간을 경험하는 느낌이 처음 김환기 화백의 그림을 마주했을 때의 느낌이었다.


무목적성의 행위로부터 오는 예술. 무수히 반복되면서 쌓아 올린 것에서 완성한 리듬감 같은 것들.


사회적 지위나 메시지 같은 것들을 떠나 그저 보는 사람에 따라 해석하면 된다는 태도 같은 것이라고 말해주는 것 같아 그림을 모르지만 그저 보는 것이 위로가 된다고 느꼈다. 하나 둘 그렇게 느껴가며 확장된 관심이 지금의 물건까지 오게 되었다.


‘숯의 화가’로 불리는 작가 ‘이배’의 작품을 한 전시장에서 본 이후 작품이 주는 힘에 압도됐던 기억이다. 작가가 숯을 이용한 계기는 많이 알려져 있는데, 경제적 이유가 가장 컸다. 파리를 주요 거점으로 활동하는 작가는 물감이 너무 비싸 대체할 재료를 찾다가 값이 싼 숯을 사용해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재료에 대한 비용 부담이 덜어지다 보니 그때부터 자유롭게 자신이 창작하고 싶은 그림을 뜻대로 그리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렇게 선택한 숯이지만, 숯이라는 물질이 표현하는 검정이 단순한 검정이 아니라는 생각이다. 나무가 태워지는 과정 속의 모든 에너지를 품고 남은 숯으로 그려진 그림이 주는 묘한 생명력 같은 것이 남겨진 느낌이라고 해야 할지. 그 에너지가 좋아서 작가의 작품을 좋아하기 시작했던 것 같다.


물론 숯으로 그린 원화의 가격은 어마어마하다. 미술 시장에서 국내 작가들이 주목도가 높아지면서 아마 그 값도 수억을 오가는 가격이다 보니 에디션이 부여된 판화 정도로 만족을 해야 하겠다. 물론 판화도 만만한 가격은 아니다. 구경 삼아 서울의 몇몇 미술품 옥션들이 경매에 앞서 공개하는 전시장에도 방문을 하는데, 그렇게 간 길에 이배 작가의 소형 판화를 발견하고 돌아와 경매를 통해 몇 해 전 낙찰을 받았다. 50cm X 40cm 크기의 판화를 집으로 가져오던 날, 스탠드 조명을 그림이 그려진 쪽으로 비춰 두고 다른 불은 암전 후 가만히 그림만 바라봤다. 흰 바탕에 굶고 검은 붓질로 덩어리진 선들을 가만히 보고 있으니 숯이라는 검은 덩이가 다 태워지고 남은 잔재가 아니라 열을 가득 머금어 태워지는 불덩이의 존재 같아 오히려 차분함과 동시에 힘을 주는 듯했다.


이후로는 침대 맞은편 발치 쪽 벽에 그림을 세워 아침에 눈을 떠서는 바로 마주할 수 있게 했다. 아침에 눈 떠서 5분, 잠시 멍하니 쳐다보면서 그날의 감흥을 떠올린다. 마음에 따라 그림이 읽히는 기분이 달라질 수 있는 것이 추상의 매력인가 싶은 생각도 한번 해보면서, 잠시간의 머리 비움 후 자리를 털고 일어난다. 불안을 잠재우고 ‘현재’의 감각으로 돌아오는 아침을 위한, 그렇게 감정을 읽어주는 도구로 옆에 두었다.



UNIT 09. 감정을 읽어주는 물건

NAME.   Noir 4 동판화 (작가 이배)

FROM.   한국

SINCE.   2018

PRICE.   경매낙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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