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BomBom Mar 30. 2024

UNIT 06. 기억을 담는 물건

MONO PROJECT ARCHIVE

그릇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는 요리와 무관했다. 중학교 3학년이 되던 해, 학교에서는 처음으로 방과 후 활동에 도예부가 생겼다. 단순한 호기심에 시작한 방과 후 활동에서 처음 접한 도예는 고등학교에 가며 잊힌 활동이었다. 학교에서 하는 것이다 보니 별도의 물레 같은 장비를 들여서 한 활동은 아니고, 흙을 넓은 판 모양으로 밀어 손으로 감아 올리거나 두드려 만드는 정도의 작업들이었다. 처음 만들었던 게 컵과 숟가락이었던 걸로 기억이 난다.


이후로는 생각하고 있지 않았던 도예가 다시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 건 일에 지쳐 하루하루를 보내던 2014년도 즈음이었던 것 같다. 일의 대부분은 줄곧 자리를 지키고 앉아, 파워포인트나 엑셀과 씨름하며 숫자와 도형들을 이리저리 옮겨 리포트를 만드는 일들이었다. 물론 그것 역시 나름의 목적을 가진 결과물이자 페이퍼 몇 장으로 큰 거래 금액이 오고 가고 실적을 만드는 수단이 되는 것은 맞다.


그럼에도 어딘가 ‘실체 없음’에 대한 목마름이 큰 시기였다. 종일 이어지는 회의와 잦은 야근의 반복으로 인한 피로함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종일 쉴 틈 없었던 머리와 손에 비해 남겨지는 결과물이 종이 몇 장 혹은 파일 몇 개라는 것에 대한 허무함도 있었던 것 같다.


그때 머리에 다시 떠올랐던 것이 도예였다. 손에 잡히는 흙, 그리고 미적 감각을 떠나 컵이든 접시로 완성되어 내 손에 쥐어지는 결과물이 생긴다는 것이 다시 도예를 배우겠다고 결심한 계기였다. 그렇게 찾아간 삼청동 골목 안 공방. 일주일에 토요일 하루, 오전 10시부터 3시간 동안, 일주일의 나머지 시간과 전혀 다른 공간으로 분리되어 보내지는 시간은 늘 설렘이었다.


처음 등록하고 한 달 정도는 예전의 기억과 같이 흙을 판 모양으로 밀고 두드리거나 코일을 감아 올려 컵을 만드는 작업들을 했다. 한 달 정도 익숙해지면서 물레에 앉아 작업을 익히기 시작했다. 전통적으로 발로 돌리는 물레는 아니고 자동으로 발을 밟았다 떼는 전기 물레다. 누름의 힘에 따라 돌아가는 속도를 조절하고 팔의 힘으로 그릇의 모양을 잡아가는 일이 그렇게 쉽지는 않았지만 물 묻은 손에 닿아 부드럽게 형태를 잡아가는 흙의 감촉이 주는 재미가 좋았다.


그릇이 완성품이 나오기까지 꽤 긴 시간을 필요로 하는데, 우선 흙을 잘 주물러 안의 공기를 빼는 꼬막 밀기 작업을 한다. 작업을 거친 덩어리 흙을 물레의 중간 지점에 잘 부착하고 나서는 밥그릇을 만들지 컵을 만들지, 혹은 접시를 만들지에 따라 밑판의 넓이를 다르게 잡아주는 작업을 한다. 물레가 돌아가는 흐름에 맞춰 흙을 올렸다 내려주며 넓이와 높이를 잡아간다. 그렇게 물레 안에서 중심점을 맞춰두고 나면 원하는 그릇의 넓이와 깊이가 되도록 구멍을 키워가며 그릇의 형태를 잡아간다. 여기서 잠시 멈칫하고 다른 생각이라도 하면 그릇의 모양이 틀어지거나 좌우 비대칭의 모양이 나오기 십상이다. 물론 선생님이 옆에서 보고 계시다가 모양을 잘 복구해 주기는 하지만. 얼마나 유연하게 곡선을 만들며 그릇의 형태를 잡아 갈지가 실력에 따라 결정된다.


물레 위에서 형태를 잡은 그릇은 그 상태에서 젖은 수건이나 비닐에 덮여 건조 작업을 거친다. 일주일에 한 번만 공방에 갈 수 있다 보니 물레 작업한 그릇은 다음주 에나 만날 수가 있다. 일주일의 건조를 거친 그릇 모양의 흙은 뒤집어서 굽을 깎는다. 굽을 잘 깎아야만 그릇의 무게를 가볍게 하고 바른 형태로 바닥에 놓일 수 있는 그릇이 완성된다. 여기서 빚으면서 틀어진 형태를 균형에 맞춰 수정할 수 있는 한 번의 기회가 더 주어지는 것이다. 굽을 깎아 완성된 그릇은 또다시 일주일 후에 만날 수 있다.


일주일 동안 건조 작업을 거쳐 바싹 마른 흙에 색을 입히는 작업이 이루어진다. 색을 입히기 전에 사포를 사용해 그릇의 표면을 매끈하게 하는 작업이 필요한데, 고르게 유약이 시유 될 수 있도록 하는 작업이다. 사포질이 끝나야 유약 작업을 거치게 되는 것인데, 나는 주로 밝은 색 바탕에 두 단계 이상의 진한 색으로 포인트 붓질을 더해 얼룩을 만드는 작업을 많이 했다. 유약의 종류에 따라 담갔다 꺼내는 덤벙 시유를 하거나 붓으로 그릇 전체에 펴 바르는 시유 방법을 하기도 한다. 유약을 바른 그릇이 가마로 들어가 제 온도에 알맞게 구워 나오면 비로소 흙덩이가 그릇이 되어 나온다. 일주일에 한번 공방에 가서 작업을 하다 보니 물레 작업을 거쳐 그릇이 되어 손에 오기까지 보통 4주의 기간을 거쳐야 만날 수 있는 것이다.


한 단계씩 과정을 거쳐 완성된 그릇이 내 뜻대로 결과물이 나오는 것도 아니다. 유약이 많이 흘러 겹쳐진 부분은 색이 좀 더 진할 수도 있고 나름 균형을 잘 잡았다 싶은 그릇도 완성되어 보면 한쪽 방향으로 살짝 내려앉아 있는 경우도 있다. 그럼에도 길고 긴 지난한 과정을 거쳐 완성된 그릇을 볼 때마다 깨지지도 않고 잘 살아준 그릇이 고마울 따름이다. 빚는 동안 공기를 잘 빼지 않는 경우 가마 안에서 그릇이 깨져 나오기도 한다.


이렇게 시작한 도예를 햇수로 6년 정도 배웠다. 6년의 시간 동안 친구들의 집들이 선물부터 결혼 선물로 만든 식기와 엄마가 요청한 화분을 비롯해 주로 받는 사람을 떠올리며 어울릴 그릇을 만드는 작업을 했다. 지금도 내가 만든 그릇은 연한 핑크색의 수프 볼을 빼고는 집에 가지고 있는 것이 없다. 대부분 다른 집들의 주방으로 가서 그 집에 맞는 역할을 하고 있다. 내 목적은 그릇보다는 그릇을 만드는 과정과 이를 통해 나오는 실체에 있었으니, 그 결과물이 다른 사람에게 가서 잘 쓰인다면 그것만큼 기쁨이 또 없다는 생각이었다.


도예를 하기 시작하면서는 그릇을 보러 다니는 일 자체가 즐거웠다. 그릇이 모아진 곳들에 가면 모양을 살피고 색을 살피며 나중에 저런 건 한번 만들어야지 하는 생각들로 가득했다. 그러다 보니 아이러니하게도 만든 그릇은 남에게 주고 내 그릇은 사서 쓰는 모양새가 되었다. 여행을 가도 그 지역의 잡화점들이나 유명한 작가의 개인 숍 등을 기웃거리기도 하는데, 자연스럽게 취향을 저격하는 그릇들은 같이 비행기를 타고 와 그릇장에 자리하기 시작했다. 물론 비싸서 살 수 없는 정도의 그릇은 눈요기에 만족했지만 사용감이 좋을 법한 형태의 그릇들은 하나씩 사기 시작했다. 정말 말 그대로 하나씩 샀다. 접시도 컵도 짝으로는 절대 사지 않는 이상한 나만의 법칙 같은 것이 생겼고, 집에 누가 놀러 와도 같은 밥그릇과 같은 컵에 무언가를 먹을 수는 없다.


플리마켓이나 빈티지 상점에서 수집한 그릇들도 꽤 된다. 자기 외에도 유리그릇도 꽤 많이 모아졌는데, 이가 빠져서 사용할 수 없는 위스키 잔을 비롯해 컵 받침으로 사용하면 좋겠다 싶어 모으기 시작한 빈티지 타일들까지 종류가 다양하다.


그러면서 알게 된 그릇이 스튜디오엠(STUDIO M)의 그릇들이다. 여행을 갈 때마다 고정해서 들리는 가게가 생겼고, 몇 번이고 발걸음해 사왔다. 스튜디오엠은 1950년에 설립된 일본의 마루미츠(MARUMITSU)라는 회사에서 1988년에 선보인 브랜드이다. 가정에서 사용하는 생활 식기를 다양한 라인으로 선보이는 브랜드인데, 꽤나 다양한 컬렉션을 보유하고 있다. 그릇 바닥에 스튜디오엠의 이름과 함께 해당 컬렉션이 양각되어 있는 것이 시그니처인데, 가지고 있는 것 중 가장 좋아하는 것이 라비고테 시리즈이다.


빈티지한 화이트 바탕 위에 녹색과 노란색의 꽃무늬를 손으로 그려 넣은 제품인데, 그냥 그릇만 봐서는 어디 플리마켓에서 70년대 생산되어 쓰다가 나온 것 같은 느낌을 준다. 꽃무늬는 손으로 그려 넣어서 비슷한 형태는 있을 수 있어도 공장에서 찍어낸 것 같은 동일한 그릇은 나올 수가 없다. 묘하게 촌스러운데 정감이 가는 스타일이라고 해야 할지. 가장 좋아하는 형태는 세로로 길게 뻗은 보울 형태로 소스나 잼, 반찬 등을 담기에 적당한 높이의 그릇이다. 보통 간단하게 과일이나 견과류를 담는데 많이 사용하고는 있다.


밖에서 사 온 음식이라도 담는 그릇을 달리하면 먹을 때의 기분이 남달라지는 경험이다. 비싼 그릇들로 채워진 식탁은 아니지만, 각각의 쓰임에 따라 형태와 색을 가지고 있는 그릇에 매치하여 담긴 음식을 먹을 때면 보기에 좋아 음식 맛도 더 잘 즐기게 되는 기분이다. 물론 기분 탓이다. 하루 중 한 번 이상은 나의 식탁 위로 올라오는 그릇에는 소소한 취향과 이야기가 담긴다. 담기기에 따라 모양을 달리하며 그릇 하나에 축적되는 기억도 여러 갈래로 쌓여가고 있다.



UNIT 06. 기억을 담는 물건

NAME.   스튜디오엠(STUDIO M) 라비고테 시리즈 오벌 보울

FROM.   일본

SINCE.   1988

PRICE.   2,640円


이전 06화 UNIT 05. 기운을 북돋아 주는 물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