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BomBom Mar 30. 2024

UNIT 05. 기운을 북돋아 주는 물건

MONO PROJECT ARCHIVE

전기밥솥을 버렸다. 어느 날 문득, 집에 있는 전기제품의 선들이 다 미워 보였다. 특히나 전기밥솥의 둥그런 모양에 달린 선이 어쩐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있어도 잘 사용하지 않는 전기밥솥을 비롯해 전기포트와 전자레인지까지 집에서 모두 치워버렸다. 여전히 주변 사람들은 집에서 어떻게, 무엇을 해먹고 사는 거냐고 묻고 나는 충실하게 물은 주전자로 끓여먹고 전자레인지로만 조리할 수 있는 음식이 집에는 없다고 대답한다. 그리고 밥은 냄비밥을 해먹는다는 말에 다들 "그 귀찮은 걸 한다고?!"라는 반응이다.


그렇다. 냄비밥은 전기밥솥보다 귀찮다. 그럼에도 편리함 대신 선택한 주물냄비의 가장 큰 강점은 이쁘다는 것이다. 흰색과 회색의 오묘한 중간 색깔의 냄비는 사이즈도 작고 소중한 12cm이다. 가스레인지에 조심해 올려 두어야 기울지 않고 자리를 잡을 수 있는 정도의 바닥 크기다.


일주일에 주물냄비와 만날 수 있는 시간은 많아야 두 번, 주에 한 번도 가스레인지 위로 올려지지 못하는 날이 더 많다. 그럼에도 손이 제일 많이 가는 위 찬장에 올려두고 다른 그릇을 꺼낼 때마다 들여다보며 "음, 나는 냄비 밥도 지어먹는 사람이지" 하면서 자기만족감에 기뻐하곤 한다.


스타우브(STAUB)는 1974년 프랑스에서 시작된 조리기구 브랜드다. 브랜드를 처음 접한 건 대학을 졸업하고 들어간 1년짜리 패션스쿨 과정에서 만난 교수님과 인연부터다. 프랑스에서 텍스타일 디자인을 전공한 교수님은 앞머리가 있는 단발머리에 항상 붉은색 립스틱으로 존재감을 뽐내던 사람이었다. 누군가를 초대해 정찬을 대접하는 문화가 자연스럽게 몸에 밴 교수님은 우리 클래스 친구 모두를 본인의 집으로 불러 다채로운 식기들과 음식들로 모두의 눈과 입을 즐겁게 해줬다.


코코뱅(Coq au vin, 와인 속 수탉)이라는 음식도 태어나 처음 맛본 날이었다. 닭고기와 각종 야채, 향신료에 와인을 넣고 오래 끓여 낸 요리. 하얀 레이스 천 위에 올려진 블루 패턴의 그릇들, 그 사이 유리잔들 틈에 쨍한 빨간색의 주물냄비가 통째로 올려지던 기억이 선명하다. 이렇게 자연스럽고 우아한 식사라니, 식탁 위를 점령한 모습들에 부러움과 선망의 눈빛들이 오고 가며 즐긴 시간이었다.


그렇게 잠시 기억에 사라졌던 주물 냄비가 전기밥솥의 자리를 대신하고 나의 식탁으로 올라왔다. 1인 가구의 밥해 먹기는 그리 만만한 일이 아니다. 양이 많아 소진을 못하거나 오래되어 버려지는 식재료가 생각보다 많고 무엇보다 영양에 맞춰 밥을 먹자면 밥상에서 냉동식품과 가공식품의 자리를 대체할 반찬들로 자리를 채워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평일은 전투 모드의 직장인으로 하루에 쓸 에너지를 비축하기 위한 식사에 의미를 둔다면, 주말만큼은 잘 지은 쌀밥에 된장찌개도 끓여보고 달걀말이에 나물 반찬도 하나 얹어보는 집 밥의 호사를 누려보려 갖은 애를 썼다. 그렇게 차려진 한 끼에 바로 숟가락이 갈수는 없는 일. 역시나 인증 사진으로 혼자도 잘 챙겨 먹으며 스스로를 아껴주고 있는 어른 놀이를 해야 한다. 그럴 때 사진에는 밥그릇에 덜어진 밥이 아닌 스타우브 주물냄비가 통으로 식탁에 올라오는 것이다.


집에서 독립해 나온 이들을 자취한다는 표현으로 주로 말한다. 한자어 '자취(自炊)'는 '손수 밥을 지어먹으면서 생활함'을 의미한다. 일본어에서는 이를 분리해서 사용하는데, 1인 가구를 ‘一人暮らし’, '혼자 살다'의 의미로 사용하고, ‘自炊’는 '손수 식사를 준비하는', 즉 ‘밥을 스스로 지어먹는지’ 여부에 사용한다. 일본어를 기준으로 해석하자면, 나는 월요일에서 금요일까지는 혼자 사는 사람이지만 자취하는 사람은 아닌 것이다. 스스로 자기 밥을 지어먹는 행위를 분리하여 사용할 만큼, 식사를 준비하고 먹는 행위에 대한 일본의 남다른 해석을 알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요즘은 유튜브나 SNS에 식사를 기록하고 공유하는 다양한 사람들이 많아져 보는 재미가 있다. 매일 해먹는 밥이 일상이라면 차려진 밥상 사진 하나에 '좋아요' 누르고 세팅한 식탁을 보며 남의 숟가락과 젓가락에까지 관심을 두고 스크랩을 하지는 않을 것이다. 밥을 지어먹는다는 행위 안의 여유를 발견하기 때문은 아닐지.


우리는 자주 밥을 챙기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하기도 한다. 가까운 이들과의 전화 혹은 문자에 밥은 잘 챙겨 먹었는지, 뭘 먹었는지 늘 궁금해한다. 잘 모르는 사람들과 만남에는 무슨 음식을 좋아하는지 묻는 것으로 어색함을 풀어간다. 내가 주변의 사람들에게 가장 많이 묻는 끼니는 하루 세끼 중 아침식사이다. "아침은 챙겨 먹었어요?"라는 말. 간밤에 안녕하셨냐는 인사와 같은 말이다.


아침은 하루 중 내가 가장 여유롭고 싶고 가장 중요하다고 여기는 시간이기도 하다. 정신없이 일을 하다 보면 간단히 혹은 건너뛰기도 쉬운 점심시간이 지나고 저녁시간은 가볍게 때우며 넘어가는 일이 많다. 의도대로 쓰일 수 있는 시간이 아침에 대부분 몰린 나로서는 하루의 시작인 아침이 안녕한 지가 중요한 이유이다.


2024년, 안녕하고 싶은 아침을 위해 1월 1일부터 '아침식사는 꼭 집에서 챙겨 먹기'를 목표 중 하나로 넣었다. 아직은 그 약속을 잘 지켜가고 있는 중이다. 물론 부지런히 움직여 쌀을 씻고 불려 밥을 올리는 일까지는 어렵다. 1월 1일은 소고기를 넣어서 떡국을 끓여 먹었고, 평일 아침은 달걀프라이, 사과 반 개와 커피 혹은 토스트와 완두콩 브로콜리 볶음 등으로 아침식사를 챙겨 먹었다. 신년의 첫 주를 보낸 주말은 연근에 당근, 고구마를 넣어 솥밥도 지어먹어 보고 남아 돌아다니던 봄동에 된장을 풀어 국도 끓여 냈다.


한 장씩 아침의 시간을 사진첩에 누적하고 있다. 자취하는 1인 가구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시간을 아침마다 보내고 있는 중이다. 이번 주말은 간장에 재운 소고기와 밤을 넣어 밥을 짓고, 들깨가루 넣은 미역국을 같이 끓여볼 참이다. 며칠 전에 구입한 매실 절임도 고추장에 버무려봐야겠다.


잘 지은 밥 한 끼가 줄 수 있는 힘은 크다. 충분히 아낌을 받고 있다는 마음, 스스로에 대한 존중이 담긴 냄비 밥 한 그릇의 쓰임이다.



UNIT 05. 기운을 북돋아 주는 물건

NAME.   스타우브(STAUB) 화이트 트러플 라이스 꼬꼬떼 12cm

FROM.   프랑스

SINCE.   1974

PRICE.   256,000원

이전 05화 UNIT 04. 이웃을 만들어준 물건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