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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omBom Mar 30. 2024

UNIT 03. 버려지고 채워진 물건

MONO PROJECT ARCHIVE

레드, 오렌지, 핑크, 와인, 그린, 블루, 브라운, 베이지, 화이트, 블랙. 온갖 컬러 팔레트로 나열된 색들은 지금까지 모아진 반스(VANS) 스니커즈의 모음들이다. 단연 블랙 컬러의 코어클래식 어센틱 모델은 뒤축이 닳아 신기 어려울 때까지 신고 신다가 새로 사기를 네 번째 반복하고 있다.


반스는 1966년에 시작된 브랜드다. 내가 주로 신고 있는 어센틱 모델의 시작은 ‘#44’라는 이름의 데크 슈즈였다. 배를 타는 선원들이 미끄러지지 않도록 만들어진 고무 밑창이 특징이 되는 신발로, 당시는 남성들의 패션 아이템으로 선보였다고 한다. 지금 정립된 스케이트 보더를 위한 스니커즈의 이미지를 갖게 된 건 당시 미국의 사회적 배경과 연관한다.


60년대 말, 미국은 변화에 대한 목소리가 곳곳을 통해 모이기 시작한 시기이기도 했다. 반전의 메시지와 변혁을 외치고 히피 문화가 부각되는 시기, 독타운 에라(Dogtown Era)로 불리던 때의 미국의 10대들은 거리로 나와 반전 운동을 펼치고 그들 만의 문화를 만들어 가기 시작했다. 다수의 10대들이 그래피티로 메시지를 표출하고 스케이트보드를 즐기며 자유롭고 반항적인 그들 만의 문화를 확산해 나가고 있었다. 반스 #44가 어센틱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얻으며 스케이트 보더의 스니커즈로 자리매김하게 된 시기이기도 하다. 물에서 미끄럽지 않게 만들어진 밑창은 스케이트보드를 탈 때 미끄럽지 않은 스니커즈로 신겨지며 패셔너블 아이템으로 자리 잡은 클래식이 되었다.


60년대 10대들의 선택을 받았던 브랜드는 이후 미국의 유명 할리우드 스타들의 선택을 받으며 확산되었고 또 일본 도쿄 시부야 멋쟁이들의 선택을 받으며 시장을 확장하게 되는 계기를 마련했다. 60여 년의 세월 동안 젊음을 대표하는 브랜드로 사랑받고 여전히 현재 진행형으로 음악과 예술의 여러 장르와 혼합하며 스트리트 문화를 이끌어가고 있다. 브랜드가 특정 문화를 대변하고, 이를 넘어서서 아이콘이 되어가는 과정은 언제 들어도 매력적인 이야기가 아닐까 싶다.


브랜드 찬양에 가까운 반스 사랑이지만, 맹목적 애착과 수집가적 면모가 있는 것은 아니다. 나에게 반스, 그 중에서도 단연 코어클래식 어센틱 모델의 가장 큰 매력은 만만함이다. 3cm 남짓 높이에 평평한 바닥, 캔버스 천으로 둘러진 간단한 모양의 스니커즈다.


어떤 차림에 신어도 딱 떨어지는 느낌이 들어 거의 매일을 신나게 신고 있다. 블랙 슈트나 H 라인 스커트 같은 포멀한 차림에도 어색하지 않게 세련된 느낌을 줄 수 있고, 복숭아뼈가 살짝 드러나는 길이감의 데님 팬츠나 치노 팬츠에 신으면 상큼하니 걸음이 신나진다.


평평하고 단단한 바닥이 걷기에 최적화된 신발은 아니다. 무게감도 있고 단단한 쿠션은 오래 걸으면 발목과 발가락에 적지 않은 고통을 주기도 한다. 머리가 복잡하면 일단 걷고 보는 습성이 있어 걷기 좋은 러닝화 하나쯤 두고 걷기를 운동으로 즐기면 좋겠지만, 대부분 하루의 머리가 복잡한 순간은 퇴근과 함께 찾아오는 법. 그런 날은 집에서 한참 떨어진 역에서 내려 집까지 3~4km를 걷는 선택을 한다. 출퇴근 차림에도 만만히 잘 어울리고, 그런대로 40~50분 정도의 걷기는 거뜬하게 버텨줄 수 있는 신발로 십여 년 넘게 함께하고 있으니 역시나 애착의 물건이 될만하다.


그렇다고 스니커즈 마니아들처럼 신고 들어와서 밑창을 닦아주고 진열해 보관하는 그런 일들은 없다. 세탁도 하지 않는다. 물에 들어갔다 나온 스니커즈는 매력이 떨어진다는 느낌은 나만 가지는 걸까? 일단 스니커즈의 뒤축은 낡아가고, 캔버스 천은 헤지고, 이리저리 치이며 먼지도 묻고 그러다 수명을 다해가면 잘 보내주고 새 신을 맞이하는 게 내 애착의 방식이다. 나에게 온 이상 아주 잘 활용해 주겠다는 마음가짐으로 열심히 신으며 나의 방식으로 애정하고 있다.


문득 반스를 애착하는 방식으로 사람을 사랑한다면 실패 없는 사랑이 가능할까 싶은 뜬금없는 생각도 한번 해본다. 낡아지면 버리고 새것을 취하겠다는 의미는 아니다. 있는 동안 충실하게 사랑해 주되 계속 내 곁에 머무르리라는 기대는 없이, 넘치지 않게 적당한 모양으로, 끝을 생각하며 미리 애달프지도 않고, 이렇게 적절히 잘 들어맞는구나 하며 예쁘다 말하는 마음. 꽤나 마음에 드는 정의다.


깨달음도 주고, 애착하여 잘 신겨지고, 적당히 잘 어울려줘 고마운 이 애착의 물건은 그렇게 쓰임을 다하여 또 비우고 채워지는 나의 물건이다.



UNIT 03. 버려지고 채워진 물건

NAME.   반스(VANS) 코어클래식 어센틱 블랙

FROM.   미국

SINCE.   1966

PRICE.   69,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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