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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omBom Mar 30. 2024

UNIT 02. 곁에 둔 물건

MONO PROJECT ARCHIVE

라미(LAMY)* 펜을 사용하기 시작한 첫 기억이 정확하지가 않다. 아마 사회생활을 시작한 시점에 출장지에서 구입했을 것이다. 회사를 막 다니기 시작했을 무렵, 한 달의 절반은 해외에서, 절반은 한국에서 지내는 삶이었다. 말이 좋아 해외출장이지, 이제 막 일을 시작한 스물다섯의 나에게는 스무 살 이상 차이가 나는 상사들을 모시고 다니는 일들이었다. 만나는 클라이언트들 역시 회사 대표, 임원과의 미팅들이니 그야말로 매번 초조함과 긴장을 달고 살던 시절이었다.


뭐든 기세라고, 프로페셔널을 뽐내고 싶었던 나는 그럴듯한 옷차림에 하이힐을 캐리어에 싣고 다니며 지니고 다니는 물건들로 어른스러움을 보이고 싶었다. 누군가에게 허세로 비칠 행동이 나에게는 거친 풍파로부터 날 지켜주는 부적 같은 존재들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세련됨을 무장하고 싶어 선택한 물건이 라미 사파리(Safari) 블랙 만년필이었다. 웃긴 건 라미 사파리는 1980년 당시 10~15세 청소년을 대상으로, 쓰는 즐거움을 알려주기 위해 1980년에 개발된 디자인이다. 그리 고급스러운 만년필은 아니라는 것이다. 물론 지금까지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만년필로 불리며 대표적인 제품이 되었지만, 적당한 가격에 깔끔한 디자인으로 가성비 좋은 정도의 펜인 것이다. 어떤 브랜드 인지도 모르고 몇 만 원이나 하는 펜이니 고급 일거라며 가방 틈에, 노트 틈에 끼워 다니며 그렇게 몇 년을 함께 했다.


라미라는 브랜드에 관심을 두기 시작한 건 만년필 잉크가 흘러서 가방이 망가진 날 때문이었다. 만년필은 나처럼 마구잡이로 업무 메모를 하기에는 그리 적합한 펜은 아니었다. 잉크를 자주 갈아 끼우기도 쉽지 않고, 빠르게 글씨를 써가다 보면 잉크에 손을 전부 버리기도 쉽다. 그런 탓에 동일 브랜드의 볼펜을 살펴보는데, 내가 쓰는 펜보다 두 배 이상 비싼 가격에 팔고 있는 라미 2000 모델을 발견한 것이다. 둥그런 모양이 매끈해서 손에 쥐는 느낌 자체가 아름다웠다.


라미 2000은 1966년 처음 선보인 모델이다. 디자인의 시작점이 독일 바우하우스* 철학에 맞닿아 있는데, 브랜드 인지도를 높이고 싶었던 창업주의 아들이 당시 산업 디자인의 유행을 선도하던 가전 브랜드 ‘브라운(BRAUN)’의 디자인을 유심히 살펴보던 것이 이유였다. 그러던 중 브라운의 전 디자이너 ‘게르트 A. 뮐러(Gerd A. Müller)’와 운명처럼 만났다. 라미는 뮐러와의 협업을 통해 바우하우스 철학에 기반한 디자인을 완성했고, 1966년 소개한 디자인이 지금의 라미라는 브랜드를 대중적으로 알리게 된 대표 제품이 되었다. 브라운 하면 디터 람스(Dieter Rams)로 정의되는 느낌이 있는데, 뮐러 역시 초기 브라운의 주요 디자이너였고 독일 산업 디자인에 큰 영향을 미친 사람이기도 했으나 이름이 크게 알려지지는 않은 것 같다.


한 줄로 축약하기에는 아쉬움이 많지만, 바우하우스의 ‘형태는 기능을 따른다’는 개념이 디자인에 끼친 영향력에 감탄하여, 건축과 전시를 따라다니며 바우하우스 정신을 눈에 담기 바쁘던 나에게 라미 2000이 그 맥락을 같이 하니 그야말로 감복하며 지갑을 열어야 할 이유였던 것이다.


지금도 비슷한 생각이지만 ‘적당함’*이라는 말이 많은 것들을 선택하는데 기준점이 된다. 적시에 필요로 하는, 과하거나 넘치지 않고 지금에 맞는 것. 과거의 재현과 화려한 시절의 회고도 아닌, 쓸 수 없고 알 수 없는 미래의 모호함도 아닌, 적절함에 대한 것을 늘 생각하고 있다. 삶의 기준일뿐만 아니라, 호감을 느끼고 소비를 하는 물건 역시 적절하여 사용성이 좋은 양품들의 모음이다.


브랜드가 주는 스토리에 매료되면 이렇게 사야 하는 이유를 만들고 스스로 팬을 자처하게 된다. 동생을 비롯해 친척들의 입학 선물과 친구들의 생일까지, 여러 사람들에게 라미 펜을 선물하며 적당함의 산물을 기꺼이 나눴다. 무엇보다 쓴다는 행위, 그 행위를 의미 있게 만드는 도구를 선물한다는 것이 더 없는 기쁨이었다.


라미 사파리 블랙 만년필과 라미 2000 볼펜을 거쳐 최근 정착한 펜은 2022년 출시된 라미 사파리의 스페셜 에디션 코지 크림 컬러 수성 펜이다. 2022년 연말 여행, 도쿄 시모키타자와의 한 문구점에서 키 홀더를 구경하다 발견한 크림색이 눈에 들어왔다. 색이 주는 변화는 컸다. 무심코 꺼내 들고 쓰다가 문득 손에 쥐어진 크림 색을 발견하면 기분이 상쾌하다. 휙휙 흘려지고 방향도 삐뚜름해 보이는 두꺼운 수성 펜의 촉을 따라 쓰이는 글씨도 마음에 든다. 생각이 그대로 그려지는 느낌이다. 낙서 같은 메모들도 애정이 가게 만들어줘서 일 년 이상 잘 길들여서 쓰고 있는 애착의 펜이 되었다.


쓴다는 물리적 행동이 주는 심리적, 정신적 만족감이라는 것이 인간에게 종이와 펜을 갖게 하는 목적은 아닐까? 새해가 되면 여전히 다이어리와 펜 코너에는 사람이 가득하다.


사소한 것들이라도 내가 기억하고 있다는 것을 상기하기 위한 끄적거림 일 수도 있고, 아이러니하지만 잊어버리기 위한 기록을 해주는 것일 수도 있다. 머리의 복잡함을 휘발하고 때로는 모든 마음과 가능한 예쁜 말들을 다 그러모아 눌러쓴 연서를 보내기 위함도 있다.


결국 생각과 감정을 쌓아 올리는 쓰임이다. 디지털로 대체하여 쓸 수 있는 모든 것들이 세상에 존재하지만, 종이 위에 그려지는 글의 모양과 손안에 쥐어지는 감촉만으로도 충분히 곁에 둘 물건이다.



* 라미는 1930년, 브랜드 시작 당시부터 다른 브랜드들이 몽블랑식 디자인을 카피할 때 실용주의를 표방하며 브랜드만의 독특한 디자인을 완성하는 것을 목표로 해왔다. 그중 대표적인 디자인이 라미 2000과 라미 사파리 모델이다.


* 바우하우스는 1919년 독일에서 시작되었으며, 현대식 건축과 디자인에 큰 영향을 미친 거대 실험실이었다. 창조적 디자인 실험으로 오늘날까지 회자되는 인물과 건축, 디자인들이 다양한데 이를 중점적으로 다룬 책은 단연 문화심리학자 ‘김정운’의 ˹창조적 시선(인류 최초의 창조 학교 바우하우스 이야기)˼(2023)이라고 생각한다.


* '적당함’에 대한 생각은 ˹논어˼에 나온 ‘문질빈빈(文質彬彬)’의 인간 형용에서 비롯되었다. 외형의 형식과 내면의 본질이 잘 어우러지는 군자의 자세에 대한 내용이다. 본질이 강하여 밖으로 보이는 형식을 넘어서면 촌스러운 것이 되고, 형식이 지나쳐서 본질을 넘어서면 겉치레에 불과한 것이 된다. 둘의 어우러짐이 아름다운 군자의 모습이다. 문질빈빈의 정신과 적당함의 미학이 바우하우스의 철학과도 맥락을 같이 할 수 있겠다는 어렴풋한 생각이었다.



UNIT 02. 곁에 둔 물건

NAME.   라미(LAMY) 사파리 코지 크림 수성 펜

FROM.   독일

SINCE.   1930

PRICE.   42,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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