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 PROJECT ARCHIVE
2013년도 6월 26일. 사용한지 올해로 10년 9개월에 접어들었다. 노트마다 앞장은 노트를 사용하기 시작한 날짜와 함께 사인을 넣어둔다. 사인이라고 해봐야 한글 이름을 흘려 쓰는 정도지만 받침이 없는 이름이라 얼추 그럴듯한 모양이 나온다.
로이텀(LEUCHTTURM1917)은 1917년 독일에서 시작한 문구 브랜드로, '등대'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초기에 우표와 동전 수집용 바인더 제작으로 유명해진 회사인데, 우리나라에서는 몰스킨 보다 저렴한 가격에 몰스킨 대체품으로 불린다. 개인적으로는 몰스킨 보다 종이의 질감이 좋은 의미로 더 텁텁하다고 느껴져서 펜 글씨를 잘 받아 준다는 생각이다. 브랜드 이름 아래 ‘DENKEN MIT DER HAND’라고 적혀진 문구가 있는데, ‘당신의 손으로 생각해보세요’의 의미라고 한다. 나 역시 대부분의 아이디어는 손으로 쓰여지는 것으로부터 출발한다는 생각이다. 지금도 여전히 대부분의 생각은 노트에 먼저 정리한 후 컴퓨터 파일로 옮기는 작업을 하고 있다.
내가 쓰는 미디엄 사이즈 노트는 145 X 210mm, 펼치면 A4 크기가 된다. 보기에 안정감 있고 휴대가 편리하면서도 노트로서의 기능에 충실하다. 그러니까 어느 정도의 면적을 가지고 있어 손을 올려두어 필기를 할 때 손 날이 밖으로 튀어 나가지 않으며, 적절한 그립감을 느낄 수 있는 정도의 두께이다.
나는 본래 무언가 기록해서 축적하는 것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어린 시절 제일 싫어하는 방학 숙제도 일기 쓰기였고, 개학 전날 몰아 쓰느라 내내 팔이 아파서 울면서 쓰던 기억이 많다. 여전히 메모한 것들의 대부분은 일정 시간이 지나면 휴지통으로 들어가기 바쁜데, 이 노트만큼은 그대로 모두 보관을 하고 있다. 10년 7개월 동안 14권의 블랙 커버 노트와 1권의 라일락 커버 노트가 자리해 있고, 아직 사용하지 않은 미개봉 블랙 커버 노트 2권이 같이 있다.
첫 시작이었던 2013년의 나는 맨 앞장에 광고인이자 작가인 ‘박웅현’의 ˹여덟 단어(인생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2013)의 구절을 빌려와 적었다. "EVERYTHING CHANGES, NOTHING CHANGES”, 문제의 본질을 파악하는 일. 그리고 본질이 아닌 것은 놓는 용기를 가지게 해달라는 다짐이 적혀 있다.
십여 년 전의 나는 일 자체와 동일시되어 있었다. 진행하는 프로젝트의 아이디어들 사이로 의욕적인 메모들과 다짐과도 같은 일기들이 곳곳에 있다. 그렇게 한 해를 보내고 퇴사를 고민하던 시점의 기록에는 가고 싶고, 하고 싶은 것의 목록들이 가득 채워졌다.
- 오키나와 추라우미 수족관
- 검도와 인생학교
- 도예와 도자기 스케치
- 자기 미학을 갖는 것의 고민
네 줄의 메모와 함께 뒤이어 친구들과 떠들며 적어내던 아이디어의 키워드들이 나열되었다.
- 리서치 선반
- 호기심의 레시피
- 테라피 트리
- 흥미로운 도구들
- 담금주와 된장 + 네온
당시 식문화를 중심으로 다루는 소규모 전시의 준비 단계였을 텐데, 다른 내용들은 얼추 아이디어를 발전하여 전시에 적용했던 기억이 나지만 ‘담금주와 된장 + 네온’ 만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된장과 네온을 결합해 무엇을 하고 싶었던 건지. 도무지 알 수가 없는 생각의 흔적들도 많다.
의욕의 결과물들은 노트 곳곳 리포트를 위한 이슈와 해야 하는 일들의 나열, 그리고 리서치한 내용들로 가득하다. 노트마다 빼곡한 식단과 운동 계획표, 돈벌이에 대한 궁리들까지 더해져 결국 가고 싶고, 하고 싶은 것의 리스트는 밀려서 기억에서 멀어졌다.
2015년, 프로젝트로 시작했던 단색화에 대한 관심을 시작으로 본격적으로 미술관과 박물관을 방문한 기록들이 하나씩 늘어 갔다. 갑작스럽게 맞은 코로나19가 아니었다면 내 노트는 여행의 결과물들로 축적이 되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일 년에 네댓 번의 여행을 계획하며 정리한 일정표와 가보고 싶은 곳들의 위치, 오픈 시간, 먹어봐야 할 것들과 봐야 할 것들의 리스트로 가득 찼던 노트는 2020년 3월 역병과 함께 이직을 하며 기록을 멈췄다.
이 즈음부터 일 년에 7~8개의 프로젝트를 맡아서 진행하는, 실로 일 중독의 생활이 3년 가까이 있었고 그 사이 쓴다는 행위 자체를 잊어버렸다. 쓰지 않는 동안의 나는 예민하고 불만스러운 모양이 마음 안에 자리 잡고 있었다. 일에서 오는 번아웃을 잠재운 건 2022년 9월, 다시 여행을 계획하며 쓰인 기록부터다. 기록하는 삶, 이로부터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다짐과 함께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일기라고 해도 하루의 느낌이나 감상보다는 몇 시에 일어나 뭘 먹고 하루에 몇 분을 걸었으며 무엇을 읽었는지 내용이 더 많았다. 행동의 기록이 하루를 충실하게 보낸 나에 대한 칭찬이라고 여기던 때였다. 그사이 2022년에서 2023년을 넘어오며 새로운 사람을 만났고, 또 가을을 넘기며 다툼도 없이 이별을 맞았다. 그렇게 초가을 노트의 마지막은 소설가 '김연수'의 ˹너무나 많은 여름이˼(2023)의 구절로 끝맺음 되어 있다.
그러니 좋아하는 것을 더 좋아하길.
기뻐하는 것을 더 기뻐하고, 사랑하는 것을 더 사랑하길.
그러기로 결심하고 또 결심하길.
대부분의 결심은 큰 힘이 없다지만 좋아함과 사랑함을 결심하다니, '너 없이도 잘 살아'와 '네가 내게 어떻게 이럴 수 있니' 반복하며 자아 충돌 시점이었던 나에게는 더 없는 위로가 되었다.
쓰인 노트 중 1권의 라일락 노트는 2023년 9월 이후부터 2024년 1월까지의 기록이다. 그해, 그가 여름 색 같은 가벼움도 좋겠다며 라일락 컬러의 동일한 모델을 나에게 선물했다. 물건은 죄가 없다고, 마침 이별 후에 쓰이기 시작한 노트에는 원망과 미움의 말부터 후회와 다짐으로 가득한 감정 일기가 매일 쓰였다. 하루 한 장 행동 일기가 대여섯 장의 감정 일기가 되는 순간이다. 라일락 노트가 테이블 위에 올려져 있는 게 내심 꼴 보기 싫었던지 소진이 꽤나 빨라서 다시 블랙 컬러로 돌아왔다.
물론 책장에는 14권의 블랙 커버 노트와 1권의 라일락 커버 노트, 아직 뜯지 않은 2권의 블랙 커버 노트가 나란히 자리한다. 익숙한 것으로 돌아간다고 해서 일어났고 꽤나 크게 남았던 흔적이 없어지지는 않으니, 그 기억도 물건도 그대로 버려지게 두지는 않으려 한다.
2023년 겨울 즈음부터 눈을 떠서 드는 아침 감정 살피기와 하루 중 일어난 인상적인 에피소드, 그때의 기분을 같이 기록하고 있다. 감정의 단어가 쉽게 떠오르지 않아서 감정 카드라는 보조 도구의 도움도 받고 있다. 일종의 마음을 가진 인간으로 역할하기 위한 훈련 같은 느낌이다.
지난 10여 년의 시간 동안 버려지지 않은 노트들은 돈과 일, 공부로 가득한 기록에서 안정, 깊이, 생각, 대화로 넘어오는 본질 찾아가기에 대한 삶의 '원함'을 적어내는 방향으로 쓰이고 있다. 감정을 읽어주는 한 번의 시간이 지나고 난 후에도 이 애착의 물건은 나와 함께 매일의 다짐과 걱정, 그래도 희망 같은 것들로 함께하지 않을까 싶다.
다시 돌아온 블랙 커버 노트의 시작은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2023) 속 작가의 말로 시작한다.
요컨대 진실이란 것은 일정한 어떤 정지 속이 아니라, 부단히 이행 = 이동하는 형체 안에 있다.
그게 이야기라는 것의 진수가 아닐까. 나는 그렇게 생각할 따름이다.
‘그럼에도 나아가라’는 어른의 격려 같은 말과 함께, 경험과 세월의 힘이 더해지며 만들어질 내 이야기를 계속할 것. 그게 나의 쌓아둔 것들의 쓰임이다.
UNIT 01. 쌓아둔 물건
NAME. 로이텀1917(LEUCHTTURM1917) 미디엄 블랙 소프트 커버 유선 노트
FROM. 독일
SINCE. 1917
PRICE. 29,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