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내가 빚어낸 악몽이었을지도 모르는
‘지금의 나’는 내가 가장 잘 알고 있다. 모든 사람이 자기 자신을 가장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겠지만 나는 확신하는 사실이다. 깊게는 정말 나는 어떤 사람이고 아직 전혀 모르는 내 미래를 꿈꿀 수 있는 주체라는 것까지, 그리고 얕게는 내가 무얼 좋아하고 무엇이 강점이며 또한 무엇이 결점인지까지 말이다. 오늘의 이야기는 나의 결점으로 벌어진 경험이다.
현재 내 결점을 차지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건 다름 아닌 피부이다. 전보다는 확연히 좋아졌지만 사람의 욕심은 참 끝이 없다는 말처럼, 이 부분만 좋아지면 다른 건 다 상관없다는 마음이 점점 부풀기 시작했다. 어쨌든 나는 다시금 예전처럼 좋아지는 게 목표니까. 그리고 이 과정 속의 나는 생각보다 남의 눈치를 많이 보고 있었다. 마스크 해제로 마스크를 쓰지 않고 길을 걸을 때면 나를 보는 사람들의 눈빛이 두려웠다. 내 얼굴을 스치는 그 눅진한 눈빛은 내 피부만을 보는 것 같이 느껴졌고 나를 보고 어떤 생각을 할 지에 집중했다. 눈이 마주치기라도 하면 더욱 그랬다.
‘피부가 왜 저러나 생각할 거야’
‘내 피부가 제일 안 좋다고 생각할 거야..’
몇 초간의 시선에도 나는 몇십 초를 상상의 나래로 부연하기 일쑤였다. 내가 누군가를 볼 때도 피부를 먼저 보았고 나와 비교하는 것을 물 흐르듯 자연스레 연결시키곤 했다. 이 생각은 비단 밖에서의 일만이 아니었고, 마스크를 쓰는 학교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 학교에 나보다 피부가 안 좋은 사람은 없을걸‘
’내 피부를 보면 얘네들이 나한테 안 오는 거 아냐?‘
그렇게 몇 개월을 이러한 생각들로 나를 채우고 비우고 또 채우고 비우곤 했다. 나도 이런 내가 참 싫었다. 아닐 걸 알면서도 어느 순간부터 이런 생각이 자연스레 드는 내가 참으로 어이없고 비참하다고도 느껴졌다. 오늘의 운동 속에서 본 조형물은 이 생각의 끝으로 나를 인도했다.
내가 나를 잘 알기에, 나의 흠집을 너무 잘 알기에 누군가와 마주칠 때도 내 흠집이 노출된 부분에 집착했다. 나는 그동안 ‘이 흠집만 사라지면 이런 집착에서 벗어날 수 있겠지’라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정말 나는 이 흠집이 사라져야만 이 집착의 족쇄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일까. 정말 집착의 족쇄는 집착이 비롯되는 것에서의 해방만이 해답의 열쇠인 걸까. 나는 질문을 던졌고 오늘 본 조형물은 그에 대한 답을 간절히 내포하는 것만 같았다.
나는 그동안 이리도 조그마한, 구멍 같은 시야로 사람들을 마주하고 판단하고 있었다는 것을, 나를 좋아하는 사람들, 내 곁에 있는 사람들을 모두 나의 흠집에 초점이 가해진 시각으로 바라보고 있었다는 것을 너무나 방대히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이 사실을 알게 되자 그 구멍의 시야를 조금 거둘 수 있게 되었다. 나의 주변인들은 내 글에, 내 그림에, 내 이야기에 초점을 두고 있었다. 나는 흠집에 정신이 팔려 그 부분을 정말이지 놓치고 있었다. 내가 드러내고 싶은 나는 주변의 시선과 동일했는데 말이다.
예전의 나는 피부가 안 좋은 사람을 거의 보지 못했다. 그러니까, 내 시야엔 들어오지 않았다는 거다. 예전에도 나처럼 피부가 안 좋은 사람은 분명 있었을 거다. 흐릿한 내 경험으로는, 초등학교 때 피부가 안 좋았던 친구가 있었다. 지금의 나처럼 전체적으로 붉었던 친구. 그런데 그땐 그것에 신경도 쓰지 않고 그냥 잘 지냈다. 참으로 신나게 놀았던 기억이 만연하다. 그 기억을 떠올리면 지금의 내 생각들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지 알 수밖에 없다. 정말 말도 안 되고 쓸데없는 생각들이었던 거다. 그리고 지금의 나는 그런 생각들을 번복함으로써 나를 갉아먹고 있었다.
우리는 자신이 신경 쓰는 것만큼의 시야를 가지게 되고 그 생각밖에 할 수 없게 된다. 그건 참으로 편협한 생각임이 분명한데 그 속에서는 이 생각이 내 세상이 된다.
나의 주변 하나하나를 모두 나만의 생각으로 물들인다. 아무도 하지 않는 생각들로 꾸역꾸역.
나는 더 이상 이런 생각들 속에 존재하고 싶지 않다. 원래의 나를 되찾고 원래의 시야를 되찾고, 이곳을 벗어나 진정한 여유를 되찾고 싶다. 내가 보았던 건 무엇이었을까. 손수 빚은 악몽의 한 줄기였던 건가. 나는 악몽을 보고 싶지 않다.
나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악몽을 만들어 내지 않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