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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장 쫄깃한 마이너스 로드

극적인 홍콩 탈출기

by 봄날의 봄동이

지난 이 년간 스탭 티켓으로 비행기를 이용하며 마음 편하게 탄 적은 거의 없었다시피 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심장 쫄깃했던 경우를 떠올려 보면 홍콩을 떠나던 때인 것 같다. 홍콩을 완전히 떠나며 가족여행으로 유럽을 들렀다 함께 한국으로 돌아오는 일정이었어서 반드시 제때 비행기를 타야했기에, 그 노선에서 이용할 수 있는 여러 항공사 중 최대한 안전한(?) 혈육 항공사의 ID50 옵션으로 예약해 두었다. 그런데 며칠 전까지도 여유 있는 편이던 좌석상황이 점점 나빠지더니 당일이 되자 마이너스로드가 되어버렸다. 즉 남은 좌석보다 예약한 승객이 더 많은 상태. 대기하는 스탭 중에서는 내 순위가 가장 높았지만 남은 좌석이 마이너스면 방법이 없으니 순위가 무슨 소용이랴.


출국 날 살던 집도 정리하고 나왔으니 기적처럼 타던, 튕기던 어쨌든 무거운 짐을 끌고 공항으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카운터에 가서 일단 줄부터 서 보니 아니나 다를까 오늘 로드가 안 좋아 스탭은 승객 체크인이 다 끝나고 나중에 오라고 시간을 알려주었다. 공항 한구석에서 혈육과 연락하며 기다리는데 남은 자리가 -6이어서 내가 봐도 단체 노쇼라도 나지 않는 이상 아무래도 오늘 탑승은 어려울 것 같았다. 마음은 비우고 일단 시간이 다 되어 카운터로 다시 갔더니 이미 스탭 명단을 보고 있는지 미스 김이냐며 일단 앞에서 조금만 더 기다리란다.


앞에 앉아 둘러보니 직원들은 무언가 열심히 의논하고 있었고, 주변에는 다른 스탭으로 보이는 사람들도 서성이고 있었다. 나, 동양계 아저씨 한 명, 같이 여행하는 듯한 젊은 서양인 여러 명. 혈육을 통해 스탭 예약 상황을 들어 알고 있었기에 '아, 저 사람이 2순위 ID90 구매자, 저 그룹이 그다음 순위 버디티켓 예약자구나' 보기만 해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어차피 나는 스탭 중에서는 1순위였으므로 내 관심사는 이 비행기에 도대체 빈자리가 하나라도 나냐는 것이었다. 단 하나만 나도 일단 나는 탈 수 있었으니까. 앉아 있다 보니 서양인 그룹은 포기했는지 캐리어를 끌고 떠났고 그 자리에는 직원들과 스탭은 나와 아저씨, 두 명만 남았다.


기다리다 답답해서 한쪽 구석 카운터로 가서 혼자 있는 직원에게 상황을 물어보니 놀랍게도 나는 아직 가능성이 있으니 조금만 더 기다려 보라고 했다. 다른 후순위 스탭들은 가능성이 없어 돌려보냈다고. 그래도 아직 희망이 있구나 싶어 계속 기다리는데 옆 카운터에서 나를 불렀다. 아직 안 온 승객이 있는데 컷오프 시간이 거의 다 되어가니 일단 짐부터 부치고 있자고. 혹시라도 마지막에 승객이 오면 못 탈 수도 있지만 이 시간까지 안 오면 아마 노쇼일 것이라며.


역시 정말 럭키야 생각하며 고맙다고 얼른 짐을 컨베이어 벨트에 올리고 경유지에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이야기하고 있는데, 갑자기 오른편에서 어떤 서양계 여자가 소리를 지르며 울면서 아이까지 한 명 데리고 카운터로 뛰어들어왔고 그 뒤에는 현지인 중년 남성이 따라 쫓아오고 있었다. 설마 했는데 진짜 마지막 순간에 승객이 온 것이었다. 나로서는 희망이 사라진 데다 도대체 이게 무슨 소란인가 싶어 머리가 어질어질한데 여자가 소리지르는 것을 대충 들어보니 아마 시간에 늦어 택시비도 안 내고 뛰어와서 기사가 쫓아온 모양이었다. 직원들이 몰려가 기사분과는 광둥어로 대화하며 상황을 정리하고, 패닉이 된 여자 승객의 수속을 도와주며 진정시켰다.


실낱같은 희망이 사라진 나는 씁쓸하게 벨트에서 내 짐을 다시 내렸고 캐리어를 끌고 구역을 떠나며 마지막 카운터에 있던 직원에게 '그럼 이제 나 오프로드인거 맞지?'하니 놀랍게도 아직 두 자리가 더 있으니 마지막 이 분만 더 기다리란다. 세상에나 아직 남은 자리가 있었다니 놀랍고 반갑기도 하면서 그 이 분이 얼마나 길게 느껴지던지. 피가 마르는 듯한 이 분이 지나고 드디어 다시 옆 카운터에서 나를 불러 최종 수속을 해 주었고, 새벽시간 이사 준비로 지친 데다 여러가지로 긴장감 넘치는 상황에 짐을 부치는데 손이 다 떨렸다. 그러면서 또 환승편도 로드가 안 좋아 지금은 첫 섹터밖에 못 준다며 연결편은 경유지에서 다시 확인해 보라고 했지만 일단 제때 홍콩을 떠나는 게 어딘가 싶어 티켓을 받고 서둘러 탑승하러 들어갔다. 그 와중에 또 럭키비키하게 복도석까지 받아 편하게 갈 수 있었다.


이어 경유지에서도 역시 마지막까지 기다리긴 했지만 무사히 또 티켓을 받아 가족여행을 일정대로 무사히 마쳤다. 첫 티켓을 받고 혈육에게 카톡으로 상황을 알리니 혈육도 그 로드에 결국 탑승한 것을 놀라워하며 정말 운이 좋았다고, ID50으로 끊어서 그나마 탈 수 있었던 거라고 했다. 실제로 그날 뒷순위 스탭은 탑승하지 못했으니까. 하지만 진짜 승자는 나 다음 2순위, ID90으로 저렴한 가격에 끊어 마지막 한자리를 결국 차지한 그 아저씨가 아닐까?ㅋ 물론 나는 이미 충분히 쫄깃했어서 무사 탑승한 것만으로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홍콩에서 함께 보냈던 혈육의 생일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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