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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봄 Jul 22. 2024

회사도 덕질도, 40대에 졸지에 신입

 처음은, 뭐든지 서툰 법이다. 하지만 이 당연한 논리가 정작 나에게 닥쳤을 때는 좀처럼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가 없다. 처음이라서, 익숙하지 않은 일이라서 못할 수도 있고 서투를 수도 있다는 너그러운 마음은 다른 사람들을 볼 때만 생겨나고, 나 자신에게는 자꾸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곤 했다. 새로운 일도 척척 잘해 내는 사람도 많은데 넌 왜 이러는 거야, 처음 하는 거라 못한다는 건 비겁한 핑계일 뿐이야, 라며 자신을 담금질하는 게 더 익숙한 사람이 나다.


 원체 변화에 민감하고 안정을 추구하는 성격상 낯설고 어색한 걸 좋아하지 않는 기질은 업무에 있어서 더욱 두드러졌다. 잘 모르는 일, 그래서 내가 못할 수밖에 없는 새로운 업무를 맡을 때마다 극도로 스트레스를 받았고 그 일을 완수할 때까지 몇 날며칠 잠 못 이루며 전전긍긍했다. 어쩌다 실수라도 하거나 원했던 결과가 나오지 않았을 때는 역시 무능력한 탓이라며 심하게 자책하며 한없이 굴을 파고 들어갔다.


 여름의 초입, 드라마 <선재 업고 튀어>를 뒤늦게 보기 시작했을 때는 자괴감의 굴을 한참 깊이 파고 들어가던 시기였다. 몇 달 전 예고도 없이 갑작스럽게 회사에서 팀 이동을 하게 된 이후, 나는 새로운 팀과 업무에 적응하지 못하고 겉돌고만 있었다. 나이는 40대인데 생전 처음 해 보는 일을 맡으니 늙은 신입이 되어버린 셈인데, 직급으로는 회사 내에서 단단히 자리 잡아야 하는 위치이건만 실질적 경력은 회사에 갓 입사한 직원과 다를 바 없으니 그 부조화에서 오는 괴로움이 컸다.


 '선배님 가르쳐주세요!'라고 천진난만하게 물어볼 수도 없는 늙은 신입, 한참 어린 후배들이 연차 오래 쌓인 나보다 훨씬 똑똑하고 일도 잘하는 상황, 자신감이 급격히 떨어지고 그동안 회사에서 보낸 세월이 통째로 부정당하는 기분이었다. 이 나이에, 이 연차에, 모르는 것 투성이라는 사실에 스스로를 자책하한껏 위축된  업무 시간 내내 압박감을 느끼다가 퇴근하면 녹초가 되어버렸다.


 깜박깜박 방전 램프가 켜진 상태에서 얼마 남아 있지 않은 힘을 바닥에서부터 바득바득 긁어모아 집을 정리하고 아이를 돌보고 나면, 모두가 잠든 조용한 밤이 찾아왔을 때 정말로 한 줌의 에너지도 남아있지 않았다.


 손가락 까딱할 힘도 없지만 걱정은 흘러넘쳐 쉽사리 잠들지 못하는 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OTT를 틀어놓고 멍하니 누워있는 것뿐이었고 그때 만난 게 <선재 업고 튀어>였다. 그리고 그 드라마와 배우 변우석은 자꾸만 동굴을 파고 들어가던 나에게 다정히 손짓해 준 한 줄기 희미한 빛이 되었다.


 드라마를 보고 울고 웃으며 잠시나마 스트레스와 온갖 시름을 잊었고, 주인공 선재에 빠져들며 덕질의 세계에도 발을 디뎠다.


 회사에서 이 나이에 신입이 되는 건 괴로운 일이었지만, 덕질 세계의 첫 경험은 똑같이 모르는 것 투성이어도 설렘과 즐거움의 연속이었다. 팬카페에 가입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의 공식 굿즈는 어디서 언제 사야 하는지, 생전 처음 접하는 경험을 하며 어리버리 헤맸지만 과정 자체가 즐거웠고 시간을 쪼개 변우석의 사진과 영상을 찾으며 피곤하기는커녕 활기가 넘쳤다.


 덕질은 열심히 해야 한다는 의무도 없고, 무엇보다 '잘한다'의 기준도 없다. 좋아하는 배우의 사진과 영상을 빠짐없이 보면, 그의 스케줄을 다 꿰고 있으면 훌륭한 팬인가? 그저 각자의 자리에서, 나름의 방식으로 나의 스타를 응원하고 아껴주면 그뿐. '이 나이 먹었으면 이 정도 덕질은 했어야지'라는 통념존재하지 않는다. 나처럼 중년의 나이에 처음으로 덕질을 할 수도 있는 거고, 10대 소녀보다 더 적극적이고 전문적으로 덕질을 하는 호호 할머니가 있을 수도 있다.


 낯설지만 두렵지 않은 덕질 세상의 신입 노릇에 충실하다 보니 단순히 류선재라는 캐릭터에 반한 시기를 넘어 배우 변우석이 뿜는 성실하고 긍정적인 에너지에 영향을 받게 되었다. 요즘 유명인이 말하고 행동하는 방식을 따서 '00적 사고'라고 종종 부르는데, 라이징 스타인 변우석도 인터뷰에서 말한 내용들이 인용되며 그의 성실하면서도 선하고 단단한 마음을 칭하는 '우석적 사고'라는 단어가 등장했다.


 기사를 통해 보도되는 '우석적 사고'는 힘든 일이 닥쳐도 긍정적 믿음을 갖고 버텨내는 힘이다. 모델로 나름 잘 나가다가 배우로 영역을 넓히는 시도를 하며 8년간 작은 배역도 마다하지 않은 그는 오디션에 수없이 떨어졌다고 한다.


 변우석은 인터뷰에서 "힘들 때마다 나한테 '시험'을 준다고 생각하고 보상이 있을 것이라는 마음으로 이겨내는 편이다."라고 지난 시간을 버텨낸 경험을 담담히 이야기했다. "시험을 넘어서면 보상처럼 무언가가 뒤따를 테지만 여기서 포기한다면 제자리일 것"이라고 생각했다는 것. 독한 마음을 품고 악으로 버티거나 잘해야겠다는 욕심으로 스스로를 괴롭히는 것과는 결이 다른 성실함. 스스로를 의심하는 힘든 시간을 지나 '그럴 수 있지'라고 어느 정도 내려놓고, 대신 현재의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는 단단함. 나보다 어린 배우에게 힘든 시간을 이겨내는 법을 배우는 중이다.


덕질도, 회사도, 처음은 어렵다. 나는 여전히 회사에서는 젊은 친구들 사이에서 고군분투 중이고, 오늘도 새로 접하는 덕질 용어에 어리둥절해하고 있다. 하지만 덕질이 제아무리 낯설어봤자지, 변우석을 응원하는 마음만 한결같으면 되는 거 아닌가. 회사 일도 어려우면 어떤가. 내가 여기서 포기하지 않고 더 성장한다면 의미 있는 고생이지. 오늘도 이렇게 '우석적 사고'를 적용하려 애쓰며 덕질의 긍정적 효과를 몸소 실천하려 애쓰는 하루다. 변우서기*, 난 니 팬이잖아.




*변우서기는 오타가 아닌 팬들이 변우석을 부르는 애칭입니다.


*본문에 사용한 사진의 출처는 tvN 드라마 <선재 업고 튀어> 공식 홈페이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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