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뿌라비다바다 Nov 24. 2023

나는 분홍색 바지를 입을 수 있을까?

도원 - 문득

인터넷으로 옷을 구경하다가 분홍색 와이드팬츠가 보였다. 흠칫했다. 분명 예쁘지만 평소의 나라면 절대 입을 수 없는 바지다. 나는 요즘 분홍색 바지를 볼 때마다 흠칫한다. 최종면접에서 분홍색 바지를 입었던 친구가 떠오르고, 또 그 친구는 붙었고 나는 떨어졌음이 상기되기 때문이다. 



면접에서 그런 색깔의 옷을 어떻게 입고 올 수 있느냐면, 내가 지원한 직종은 창의성과 개성을 요구하는 PD직종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몇일동안 빈틈없이 실무 미션들을 주며 지원자들을 최종적으로 파헤치는 단계였으니 꼭 편하고 자유로운 복장을 입고 오라는 안내가 있었다. 


나는 그동안 PD 면접을 꽤나 여러 번 보면서 실감한 것이, 방송사마다 직군마다 정도의 차이가 있겠다만 면접에서 마주한 많은 PD들은 스타일이 굉장히 자유분방했다. 당장 쇼미더머니에 출연할 것 같은 힙합 스타일, 40대가 넘어 보임에도 귀엽고 발랄한 아이돌 스타일, 뭐라 형용할 수 없지만 자유로움을 풀풀 풍기는 패션들. 준연예인 복장이었다. 학생때도 면접관들을 보면서 '이야 방송국에서 일하는 사람들답다'라며 놀라곤 했는데, 정장류만 입는 보수적인 직장을 다니면서 면접을 보러가보니 더욱 큰 이질감을 느꼈다. 우리 회사의 상사분들을 떠올려보면, 그리고 출근길 지하철의 수많은 직장인들의 모습과 비교해 보면 확연히 달랐다. '40대에 저런 패션이 가능하다니' 83년생인 10CM 권정열님을 볼때마다 하는 생각을 면접관분들을 보면서 하곤 했다.  



이러한 직종의 최종면접 단계에 올라간 나로써는 무엇을 입고 가야 할지 꽤나 고민되었다. 현 보수적인 직장에서 점잖은 블라우스, 슬랙스류를 입고 출근한지 어느덧 4년차. 회사만 오고가는 내게 화려한 사복도 딱히 없었던지라 당장 내가 가진 자유분방한 옷이라곤 고작 청바지 하나 뿐이었다. 면접까지 남은 몇일을 두고, 내 캐릭터를 진하게 각인시킬만한 옷을 살 틈도 없이 회사는 바빴다. 


면접장에 가서 최종 단계까지 올라온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니, 나만 복장을 고민한 것은 아니였다. 분홍색 바지를 입고 온 친구도 "무얼 입어야 할지 몇일이고 고민했다"고 했다. 그런 고민의 흔적이 느껴지는 것이, 확실히 그 친구는 본인만의 개성을 잘 풍기는 스타일을 장착하고 왔다. 그리고 그 스타일은 어쩐지 면접관들의 분위기와 결이 참 비슷했다. 그리고 합격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 친구가 분홍바지를 입어서, 패션이 좋아서 합격했다는 말은 결코 아니다. 면접에서 보여주는 결과물이 당연 제일 중요하다. 하지만 사람의 캐릭터를 파악하는 데 있어서 그 사람의 머리, 옷 등에서 느껴지는 아우라는 아무래도 큰 몫을 차지하는듯 하다. 싱어게인 1에서 이무진이 독특한 음색으로 노래를 기깔나게 잘 부르기도 했지만, 야생에서 튀어나온 고양이같은 자유분방한 머리가 그의 개성을 더욱 돋보이게 해준것처럼 말이다. 특히 해당 시즌에선 실력자들이 죄다 곱슬머리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어 심사위원들은 "역시 펌을 하고 나온 사람이 최고"라는 말을 우스갯소리로 하기도 했다. 



그런 분위기는 하루 아침에 만들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평소엔 그렇게 안다니던 사람이 갑자기 인위적으로 어떠한 스타일을 따라할 순 없을 것이다. 그렇게 한다면 본래의 모습을 숨기고 어색하게 잠깐 변신한 것뿐일테다. 평소 무채색 계열의 튀지 않는 옷만 입고 다니려는 내가 개성있는 척 하겠다고 갑자기 분홍색 바지를 입고 나타날 순 없는 노릇인 거다.


내 옷장을 보니 정말 지독하게도 무채색 계열의 옷들만 있었다. 검정색, 회색, 베이지색, 흰색. 이 네 색을 벗어나는 색이 없었다. 내 방에 놀러온 친구는 열어진 옷장 안을 보고 웃으며 어떻게 색이 이리 한결같냐고 신기해했다. 그래서 나도 다양한 색의 옷을 시도해봐야겠다 생각하지만, 막상 옷가게에 가면 또 다시 비슷한 옷들에만 입을 수 있는 용기가 생기는 거였다. 그렇게 된 데에는, 괜히 옷때문에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컸던 것 같다.


돌이켜보니 나는 옷으로 사람들에게 튀는 걸 상당히 두려워했다. 나름 눈에 예쁘다고 생각해서 옷들에 한명이라도 '식탁보같아', '잠옷같아', '색이 어두운데?' 등의 가벼운 코멘트를 남기면, 나는 다시는 옷을 입지 못했다. '남자들은 와이드팬츠와 꽃무늬를 싫어한다더라'는 말을 듣고 내가 좋아하던 취향도 기꺼이 포기했다. 그리고 최근엔 흰색 롱패딩을 샀는데, 지난 몇년간 검정 롱패딩만 입었다보니 '혹시 흰색이 회사에서 눈에 띄진 않을까?' 몇일간 걱정이 되는 거였다. 


내가 타인의 눈치를 참 많이보고 특정한 틀을 깨는 걸 두려워한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그런 내게 있어서 분홍색 바지를 입는 사람이란 고정된 틀을 쉬이 깨고, 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용감한 캐릭터로 보였다. 


면접관들도 이런 내 캐릭터를 바로 파악했던 것일까, 최종면접에서 자기소개를 하고 내게 날라온 첫 번째 질문은 '살면서 일탈해본 적 있냐'는 것이었다. 곰곰히 생각해봤지만, 없었다. 모두가 맞다고 하는 길을 그저 성실하고 부지런히 따르기 바빴던 천생 모범생인 나는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무리의 공통된 행동에서 홀로 빠져나와 독단적인 행동을 한 적이 없었다.


한편 또다른 합격자 친구는 본인을 소개하길 '남들이 안하는 걸 하길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그 예로 한겨울의 졸업식에서 하복을 입고 등장해 사람들의 놀라움을 샀고, 또 그런 시선을 즐긴다고 했다. 나로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으니 입이 떡 벌어졌다. 


몇일 간의 면접을 보고 최종 불합격을 받은 나는 꽤 오래 괜한 자책감이 들었다. 나는 왜 분홍 바지를 못입을까. 나는 왜 남들과 정반대로 행동해본 적 없을까. 나는 왜 지금껏 일탈 한번 해본 적이 없을까. 사람들이 맞다고 하는 길을 있는 힘껏 달릴 줄만 알았지, 다른 길로 새어나갈 생각조차 해본 적 없다니. 학창시절 내내 한번의 흐트러짐 없이 착하고 바르게만 자란 내 자신이, 튀는 것을 두려워하는 내 자신이 새삼스레 답답하게 느껴졌다.  


PD 준비를 보류하고 남들이 좋다고 하는 직장에 첫 발을 들인 것 역시, 정상의 범주를 벗어나는 걸 두려워했기 때문이었다. '졸업하면 최대한 빨리 취업을 해야해', '꿈도 좋지만 안정적인 직장부터 갖고 그때 다시 생각해봐' 라는 말들에 끄덕일 뿐이었다. 그리고 보수적인 회사에 들어가선, 원래 있던 나만의 색채마저도 빠른 속도로 옅어져가는 현실이었다. 직장인이 돼서 부단히 노력하지 않는 한 내 개성을 이리도 쉽게 잃어간다는 걸 깨달았다.


문득 지금의 나를 캐릭터화한다면, 이모티콘으로 만든다면 어떤 모습으로 그릴 수 있을까? 그 캐릭터는 무엇을 하고 있을까? 생각이 들었다. 특색 있었으면, 반전 매력이 있었으면 좋겠는데. 신나게 춤을 추고 있었으면, 우쿨렐레 연주를 멋드러지게 하고 있었으면, 글쓰기에 몰입하고 있었으면 등 온갖 바람이 들었다. 내가 되고픈 나의 모습에 대해 마음 속에 내재돼있는 욕구가 그러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바람과 다르게, 지금의 나는 그저 점잖은 복장을 입으며 출퇴근 하고 주말만을 기다리는 직장인, 그런 특색 없는 캐릭터가 아닐까 하며 괜한 우울감이 들었다. 


그런 시점에 우연히 한 그림책을 보게 됐다. 나의 가라앉은 마음을 대변하는 제목이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야>



주인공은 자신만의 색을 찾겠다며 모험을 떠나고 그 과정에서 "이렇게 돼볼까?" "저렇게 돼볼까?" 하며 정신없이 다양한 색들을 스쳐 지나간다. 그리고 좌절한다. "나는 영원히 나만의 색을 찾을 수 없을지도 몰라" "나는 대체 무엇이 될 수 있을까?" 


그리고 집에 돌아와 거울을 보고 여기저기서 다양하게 조금씩 묻혀온 색깔들을 보며 깨닫는다.


나는 모든 색을 가졌어. 나는 모든 것이 될 수 있어.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서 무엇이든 될 수 있어


일탈하려는 마음 없이 남들이 옳다고 하는 바른 길만 걷느라 특색이 부족하다고, 나만의 명백한 캐릭터가 없다고 우울해했던 나였는데. 곰곰히 돌이켜보면 나도 30여년을 살며 여기 저기서 조금씩 내가 좋아하는 색들을 묻혀 왔음을 깨달았다. 비록 특정한 강한 색채는 없지만 나도 모르게 내 안에 알록달록 여러 색깔의 경험들이 쌓여 있을 것이었다. 예를 들어, 아직 아르페지오 주법까진 못익혔더라도 적당한 리듬으로 우쿨렐레를 연주할 줄 알고, 비록 지금은 다 까먹었지만 한때 라틴 문화에 관심을 가져 스페인어 공부에 몰입하며 한달살이 했던 적도 있고, 비록 방송국 PD만큼의 능력은 아닐지라도 여기저기서 영상을 기획하고 출연했던 경험이 있었다. 어렸을 때부터 글쓰기를 잘해서 그동안 상도 많이 받았다. 그렇게 작은 색깔이어도 분명 알록달록한 색들이 내게도 묻어 있다는 자신감이 들었다. 그리고 앞으로 내가 좋아하는 색깔들을 여기저기서 묻혀가다보면, 어떤 색이 유독 진하게 나오고 또 색들이 섞였을때 어떤 오묘하고 아름다운 색이 나올지 모를 일이겠지. 


그러기 위해서 나는 어떤 색을 내게 묻히고 싶은지 솔직해져보려고 한다. 남의 눈치는 보지 말고. 

내가 원하는 옷을 입고, 원하는 취미를 새로 배우고, 원하는 것을 시도해보고. 

그렇게 나만의 캐릭터를, 나만이 걷는 길을 쌓아 가보자고 되뇌여 본다.



오늘의 노래
- 도운 <문득> - 
http://bit.ly/47GOVuB


지나온 시간들은 차곡차곡 모여 
지금의 나를 만들었고 이젠 보여 
한걸음 한걸음 내디뎠던 나 
숨 가쁘도록 걸어온 길 위 
가득히 채운 발자국만큼 
나를 지나쳐 간 수많은 순간들
하나 둘 천천히 떠올리다가 
문득 그런 생각이 난 들었어
구름 아래 떠가는 꽃가루 같네 
어디서 떠오를지? 어디에 도착할지?
아무도 모르겠지



이전 08화 83세 할무니의 첫 강원도 여행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