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양 - 봄봄
봄이 사뿐히 다가왔다. 얇아진 외투에 따스한 온기가 스며들고, 코끝에 살랑거리는 바람이 스쳐 지나간다. 쓸쓸해보이던 나뭇가지 끝에 꽃망울들이 사탕같이 올라온 것을 보니, 어쩐지 내 마음도 달콤하다.
이런 봄을 은은히 느끼며 독서를 하고 싶었던 나는, 도서관에 가 통유리 너머 바깥 풍경을 볼 수 있는 바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햇볕을 쬐며 책을 읽다가 고개를 들어 창밖을 보면, 봄을 즐기는 사람들의 눈부신 미소를 볼 수 있었다. 대학교 신입생 열댓명이 잔디밭에 돗자리를 깔고 큰 원으로 둘러 앉아 있는 모습, 꺄르르 웃으며 적은 폭으로 힘껏 뛰어다니는 아기와 그 보폭에 맞추는 아빠의 모습. 그들을 보며 기분 좋게 집중력을 흐트리고 있는데, 웬 커다란 나무가 시야에 들어왔다.
딱 크리스마스 트리같이 생긴 나무였고, 길 한쪽에 대여섯 개 정도 줄지어 있었다. 그런데 가만 보니, 그 나무들은 손 반뼘마다 전구알이 달려 있는 긴 전깃줄에 칭칭 감싸져 있었다. 크리스마스 트리처럼 생겼다고만 생각했는데 정말 그 용도로 쓰였던 것이다. 겨울에 반짝이는 모습으로 봤더라면, 제법 화려하고 예뻤을 텐데... 사람들의 시선이 온통 벚꽃으로 옮겨가는 지금, 저 나무들은 왜 아직도 전깃줄에 꽁꽁 휩싸여 편하게 몸을 가누지 못하고 있을까. 봄바람에도 나뭇잎을 살살 움직이지 못하고 있을까. 이건 마치, 가수가 온갖 메이크업과 착장을 과하게 하고 무대에 서서 사람들의 환호를 받았는데, 콘서트가 끝나고도 왜인지 본연의 편안한 모습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는 아주 찜찜한 상태일 것이다. 저들은 과연 언제까지 수십개의 전구줄을 달고 있어야 할지. 봄, 여름, 가을이 지나고 또 다시 겨울이 올 때까지 계속 무게를 버티고 있어야 하는 건 아닐지 걱정이 되었다.
이렇게 나무에게 묘한 동정심이 들 때, 문득 엄마의 핸드폰 벨소리가 떠올랐다. 항상 기본 벨소리던 엄마의 휴대폰 벨소리가 어느 봄날, '로이킴'의 '봄봄봄'으로 설정돼 있었다. 전화가 오면 엄마는 항상 설거지나 요리 등 무언가를 하다가 뒤늦게 받았으니, 그 벨소리는 기타 선율로 시작하는 인트로부터 하이라이트 구간('그대여~ 너를 처음 본 순간~) 까지 꽤 길게 울려 퍼졌다. 그때마다 나는 봄기운을 만끽할 수 있어 좋았다.
그 후 나는 독립해 지내다가 오랜만에 본가에 가보면, 엄마의 벨소리는 여전히 봄봄봄이었다. 계절이 세 번 바뀌는 동안 변함 없었다. 봄엔 그 소리가 참 정겨웠는데, 다른 계절에도 울리는 걸 듣고 있자니, 피식 웃음이 났다. 푹푹 찌는 열대야에 자전거를 타며 더위를 달랠 때도, 울긋불긋한 단풍잎들을 보며 뒷산을 걸을 때도, 꽁꽁 무장하고 나왔지만 시린 겨울바람에 패배를 선언하며 금방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도, 엄마의 핸드폰에선 늘 봄봄봄이 울려 퍼졌다. 계절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노래에, 지나가던 사람이 슬쩍 쳐다보면 괜한 부끄럼도 들었다. 이건 로이킴 목소리가 아무리 감미로워도 용납되지 않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그 부끄럼이란 것도 '1초'의 감정이었을 뿐, 나는 그저 엄마가 저 노래를 좋아하겠거니 무심코 넘기며 '1년'을 흘러 보냈다.
또 다시 봄이 찾아왔다. 엄마의 벨소리가 제격인 계절이 돌아오다니, 괜스레 반가웠다. 그리고 봄이 또 우리를 떠나가려는 섭섭한 때에, 나는 엄마에게 물었다. 엄마는 왜 사계절 내내 벨소리를 바꾸지 않는 거냐고. 한참이나 뒤늦은 질문이었다. 그리고 돌아온 대답은 간단했다. "친구가 설정해준건데, 어떻게 바꿔야 할지 모르겠어" 흠칫했다. 미처 생각지 못했던 대답. 아니, 사실 내가 조금만 신경썼다면 충분히 눈치챌 수 있는 대답이었다. 이상하게 여겼으면서 왜 그동안 벨소리 한번 바꿔주지 않았을까. 왜 엄마한테 진작 이에 대해 물어보지 않았을까. 나의 지나친 무심함에 어떤 핑계도 댈 수 없었으니, 난 그저 웃으며 상황을 넘길 뿐이었다.
홀로 겨울에 멈춰있는 나무, 봄에 멈춰있는 엄마의 벨소리...누군가의 귀찮음과 무심함으로 인해, 모두가 쉽게 따라가는 시간의 흐름에 뒤쳐지게 되는 존재들이 있다. 계절에 맞는 기운을 온전히 만끽하지 못하는 존재들이 있다.
봄이 다가오는 요즘, 혹시 주변에 아직 봄의 온기를 느끼지 못하고 시린 겨울에 갇혀 있는 존재가 있진 않은지 둘러보면 좋겠다. 그리고 우리의 시간을 미처 따라오지 못하는 존재가 있다면, 손잡아 이끌어주어야겠다. 같이 이 시기를 누릴 수 있도록. 함께 봄에서 여름, 여름에서 가을, 가을에서 겨울로 사뿐히 건너갈 수 있게 말이다.
오늘의 노래
- 양양 <봄봄> -
https://youtu.be/VFHhduHG04I
이제 곧 또 봄이 오겠구나
앙상한 나무가 슬퍼보이지 않으니
너는 곧 초록의 옷을 입겠구나
이제 곧 또 봄이 오겠구나
테이블 위 먼지 훌훌 털어내면
봄에 밥상이 차려지고
넘치는 햇살에 나는 흥에겨워
춤이라도 추겠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