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서 바쁜 일상을 보내다, 지난 주말엔 오랜만에 본가에 다녀왔다. 한달 만이었다. 밤 10시 넘어서야 느지막히 집에 도착했고, 엄마는 늘 그렇듯 거실에서 뜨뜻하게 데워진 전기장판 위에 누워 드라마를 보고 계셨다. 나는 곧장 씻고 그 옆에 붙어 앉아 엄마가 덮고 있던 이불을 내 쪽으로 슬쩍 끌어당기며 물었다. "저건 또 무슨 내용이래?" "여자애가 원래 눈물 한방울도 없던 애인데 시한부 되고 남편 태도가 바뀌니깐..." 얼마나 재밌는지 엄마는 짧게 말하다 깔깔대며 웃으셨다. 오케이, 3화 정도면 내용 금방 따라잡을만 하다 생각하며 엄마 옆에 누웠다.
드라마가 끝나고는 리모콘을 잡아들어 16번을 눌렀다. 평소 엄마는 자신이 좋아하는 프로가 언제 어느 채널에서 하는지를 모르신다. 그래도 아빠는 그걸 참 잘 알아서 9시엔 JTBC를 틀었다 10시에 TvN을 틀었다 11시에 MBC를 틀었다 하며 엄마의 스케줄에 맞게 티비를 리드하신다. "봐, 내가 딱딱 알아서 잘하지? 내가 틀어주는 대로만 보면 완벽하잖아"라고 으스대면서 말이다. 하지만 그런 아빠도 지금은 먼 지역에 계시고, 나는 한달에 한번꼴로 본가에 오기에 엄마의 드라마 패턴을 업데이트해서 파악할 순 없지만, 그래도 한가지는 확실하게 안다. 토요일 밤 11시면 동치미를 한다는 것. 누가 나오든 무슨 토크를 하든 엄마는 늘 그 프로를 재밌게 보신다는 것.
"여기 엄마 좋아하는거 한다" 나는 무심한 척 채널을 16번에 고정시켜주었다. "게다가 본방이야 이거" 본방인지 재방인지 모르고 보는 엄마를 위해 어필 한번 해보았다. 늘 그렇듯 부부관계, 고부관계에 관한 갈등을 두고 시원한 속풀이 사연과 눈물을 자아내는 사연들이 소개되고 있었다. 엄마는 "에이, 오늘은 내가 좋아하는 애들은 별로 안나왔네" 라더니 이내 깔깔대며 웃고 계셨다. 보다가 본인의 이야기가 생각났는지 과거의 일을 풀어내시기도 했고, 나도 내 이야기로 응답했다.
부부싸움 후 남편이 아무렇지 않게 치킨 먹으러 가자고 해서 화났다는 출연자의 말에 나는 한마디 덧붙였다. "어 나도 저래 엄마, 내가 저 남편스타일이고 S가 저 여자 스타일이거든" "그래? 그럼 S는 너랑 싸우면 대화를 어떻게 풀어간대?" "이제 서로의 차이를 알고 인정하는데 내가 회피형이니깐 내가 고쳐야지." "그래, 결혼 전에 미리 싸워보고 해결할 줄 알아야해" 라며어느새 우리만의 토크를 이어가고 있었다.
동치미에서 다루는 주제는 20대 미혼인 나와는 전혀 관계 없는 이야기지만, '아직도 저런 생각을 갖고 있다니!' 놀랄 정도로 옛날옛적 사고방식의 발언도 나오지만, 그런 건 크게 상관없다. 그저 엄마와 같이 깔깔 웃다가, '왜 저런 말을 한대니' '아이고 안타까워라' 리액션도 했다가, 관련해 우리끼리 수다를 떠는 게 좋은 거니깐.
본가에 오면 나는 이런 순간이 제일 행복하다. 주말 저녁에 엄마와, 그리고 가족들과 TV를 앞에 두고 끝없이 수다를 떨고, 가끔은 야식을 먹기도, 마스크팩을 하기도, 전기장판 위에 한 이불 덮으며 따뜻함을 공유하기도 하는 그 시간이 참 좋다. 그래서 부모님이 무슨 프로그램을 틀든 나도 그 곁에서 그저 보는 시늉을 하면서 함께 있는 것이다. 내용을 전혀 모르는 드라마든, 시어머니와의 갈등을 하소연하는 토크쇼든. 또 그걸 가만히 보고 있으면 은근 재밌기도 하고 말이다.
물론 콘텐츠의 재미로만 따지자면, 방에 들어가서 짧은 유튜브 콘텐츠를보는 게 이득일 것이다. 하지만나 혼자서 스마트폰이나 노트북으로 내 취향의 콘텐츠를 골라보는 건 언제 어디서든 할 수 있다. 반면 사랑하는 사람들과 여유로이 널부러져 같이 무언가를 보는 시간은 나이가 들수록 쉽게 얻어지지 않는 듯 하다. 그래서 그 시간이 참 소중하고 귀하게 느껴진다.
특히 나는 부모님이 코로나 시기에 3년 동안 외국에 거주하신 계기로, 우리 가족이 함께 하는 소중함을 더 절실히 느끼게 됐다. 어느 날에는 거실에서 혼자 TV 채널을 돌리다 동치미가 나오는 걸 보고는 엄마에 대한 그리움이 확 밀려온 적이 있었다. 원래 우리가 같이 보던 건데 그럴 수 없는 상황이 참 씁쓸했던 것이다. 그리고 요즘도 나는 그런 생각이 든다. 내가 머지않아결혼하고 나면 지금처럼 엄마 다리 위에 내 다리를 편하게 얹어놓고 우리끼리 헝크러진채 깔깔 웃으며 TV를 볼 일이 얼마나 있을까?
엄마도 그런 마음을 느끼는걸까. 함께 TV를 보다가 내가 잠깐 핸드폰 충전하거나 씻으러 자리를 뜨면, 엄마는 계속 큰 소리로 말하시곤 한다. '저것 좀 봐봐. 글쎄 너무 웃기잖아 얼른 나와서 봐봐' 라면서 말이다. 그 부름에 난 또 금세 그 옆으로 달려가고, 그 시간이 좋아서 끝없이 TV를 보다보면 우리의 주말 밤은 늘 쉬이 끝나지 않았다.
지난 주말도 우리는 그렇게 동치미를 보다 잠들었으니,
지금은 소소하지만 언젠가는 사무치게 그리워할 수도 있을, 그런 행복을 누린 밤이었다.
바쁘더라도 이 행복은 앞으로도 신경 써서 챙겨야겠다. 누릴 수 있을 때 실컷 누려야겠다는 마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