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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봄 Nov 14. 2023

은행나무 숲의 추억

비밀

가을이 왔나 싶었는데 진짜 짧은 2주 만에 가을이 다 가버리고 이제 겨울이다. 어제는 제주에 사는 은수작가님이 겨울 소식을 알려오셨다. 제일 따뜻하다고 생각하는 그 섬에도 겨울이 왔으니 이제 진짜 겨울이 온 것이 맞는 것 같다. 겨울이 더 깊어지기 전에 아쉬움이 가득한 이 가을 숲의 이야기를 전해야 한다.


정확하게 일주일 전에 서울에서 은행잎이 바람에 비처럼 날리고 발걸음 걸음마다 은행잎이 부딪치는 곳이 있어서 방문했었다. 동작동 국립 현충원이다. 현충원 외곽길을 따라 걷는 길은 온통 은행나무로 가득하다. 나무들이 키도 커서 손 안의 작은 카메라로는 그 웅장한 모습을 다 담을 수가 없어서 너무 아쉬웠다. 최대한 바닥에 납작 쪼그리고 앉아서 하늘과 나무를 다 담아보려 했지만 사람의 눈으로 보는 것처럼 아름다운 모습을 담아낼 수가 없었다.

현충원 은행나무길

현충원을 둘러싸고 은행나무가 심어져 있다. 은행나무 길을 하염없이 걸을 수 있다. 진짜 노란빛이 눈이 부시다. 노란색 은행잎에 햇살이 부딪쳐서 눈으로 들어오면 눈을 뜰 수가 없다. 이 은행나무길의 가장 좋은 점은 열매가 없는 수나무들로 이루어진 길이라서 은행열매를 밟을까 걱정하면서 조심조심 걸을 필요가 없고 고약한 냄새에 코를 잡을 일이 없다는 것이다.


은행나무는 수령이 30년은 지나야 열매를 맺기 시작하고 열매에서 고약한 냄새가 나고 무겁기 때문에 다른 동물들에 의해서 옮겨지는 일이 거의 없다. 그래서 우리가 보는 은행나무들은 태초의 것이 아니므로 사람에 의해 심어진 것들이다. 현충원은 신기하게도 모두 수나무들을 심어서 은행나무 열매가 떨어지는 일이 없다. 둘레길을 다 걷는 동안 인간의 실수로 심긴 두세 그루의 나무에서만 툭툭 은행나무 열매가 떨어지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은행나무 방석 위에 다리를 쭉 펴고 앉아보았다. 푹신푹신하고 은은한 향이 나서 좋았다. 은행의 성분이 기침과 천식에 좋아서 한방에서는 그 치료제로 쓰이고, 너무 잘 알려진 대로 혈행개선에 도움이 되는 성분이 있어서 추출해서 약으로도 많이 쓰인다. 은행나무길을 산책하는 동안 공기를 통해 몸에 들어오는 은행나무의 좋은 기운이 도시의 매연에 지친 몸을 정화하는 기분이다.

은행나무 숲에서 정화 중

은행잎이 이렇게나 푹신하고 풍성하게 깔려있는 곳은 본 적이 없다. 대부분 열매들이 곳곳에 지뢰처럼 숨겨져 있어서 잘못 앉았다가는 그 고약한 냄새 폭탄을 피할 수가 없다. 밟으면 툭 터져서 신발 바닥을 깨끗하게 씻어내지 않으면 집안까지 냄새가 들어오기 때문에 꼭 씻어내야 한다. 그런데 현충원은 아무 걱정 없이 은행나무 이불 위에서 뒹굴어도 된다. 한참을 뒹굴뒹굴거리면서 정화의 시간을 갖는다.


일반적으로 현충원이라고 하면 무슨 날이 되어야만 꼭 그곳에 모셔진 사람이 있어야만 방문한다고 생각을 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언제 방문해서 여유롭게 자연을 만끽할 수 있다. 해마다 가을과 봄에는 무료 음악회도 열린다. 낮에 하는 탓에 한 번도 직접 방문해 보지는 못했지만 꽤나 유명한 가수들과 군악대 장병들이 협연을 하는 형태로 좋은 공연을 좋은 장소에서 무료로 들을 수 있으니 내년에는 꼭 방문해서 들어봐야겠다.


현충원을 무서워하거나 터부시 할 필요가 없다. 좋은 마음으로 편안한 마음으로 그곳에 계신 분들과 인사도 나누고 나 사는 이야기도 하면서 산책을 하면 된다. 그분들도 요즘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요즘 사람을 보고 싶지 않을까? 역대 대통령, 독립운동가, 전쟁영웅, 시민영웅들이 모셔진 곳이라 그분들의 일대기를 돌아보며 지금의 나를 되돌아보면 또 내가 조금 더 치열하게 살아야 하는 건가 화두를 가지고 돌아오게 된다. 한 시간 남짓 은행나무 숲길을 걸으면서 상념에 잠기고 빠져나오니 다른 세상에 있다가 나온 기분이다.


도저히 카메라로 담을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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