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브런치북 Reflections 14화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Alfie Nov 18. 2020

Rain

비를 맞을 자유

샌프란시스코는 저번주부터 드디어 우기가 시작되었다. 올 해 들어서 처음 내린 비였으니까 장장 11개월동안 한 번도 비가 내린적이 없었던 것이다. 한국에 있었을 때는 이렇게 비를 고대한 적이 거의 없었는데, 캘리포니아 전역에 가뭄이 심하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어서일까 아니면 난방을 틀기 시작하면서 부쩍 건조하다고 느껴서일까 비가 참 그리웠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비가 내리는 풍경을 보고 있으면, 비에 대한 나의 생각이 완전히 바뀌었던 사년 전의 그 순간이 떠올라서 기분이 좋다. 


미국에 막 도착하고 첫 겨울, 첫번째 우기를 맞으면서 난 한 가지 스스로 뿌듯하다고 해야할까 통쾌하다고 해야할까 재미있다고 해야할까 여러모로 스스로 신나했던 것이 있었다. 장마철 내내 한번도 우산을 쓰지 않고 계절을 보냈다는 것이다. 주로 어디를 가든 차를 타고 다녔던 탓도 있겠지만 비가 아무리 억수같이 쏟아지는 날도 그냥 점퍼에 달린 후드를 쓰고 걸었다. 한국에서도 아주 가끔 그런 적이 있었지만 사실 한국은 뭐랄까 문화적으로 그렇게 하면 안되는 나라였기에 난 매번 우산을 안쓰면 이상한 사람 취급을 받는 것 같았다. 그런데 미국에 와서는 정말 신기하게도 아무리 비가 대차게 쏟아져도 길거리에 우산을 안쓰고 다니는 사람이 절반은 되는걸 보니 '나도 안써도 되는구나' 라는 무언의 허락을 받은 것 같았다. 난 그래도 꼭 후드라도 쓰고 다녔지만 그마저도 안쓰고 아무것으로도 머리를 덮지않고 걷는 사람들이 참 많았다. 하루는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날 새로 이사할 집을 보러갔다가 아파트 사무실 직원과 잠깐 오분 정도 거리를 같이 걸어가게 되었는데 내가 혹시 우산을 같이 쓰겠냐고 물어보았더니 쿨하게 '괜찮아요 이건 그냥 물이잖아요?' 라는 대답을 듣게 되었다. 한껏 멋을 낸 옷차림에 세련된 메이크업을 한 젊은 흑인여성이었는데 난 그런 사람이 그렇게 말을 할 수 있다는 데에 굉장히 신선한 문화충격을 받았다. 


'이건 그냥 물이구나' 


어렸을 때부터 산성비를 맞으면 머리가 빠진다는 등의 교육을 아주 열심히 받아서일까 젖어서 돌아다니면 감기걸린다는 원칙속에 살아서일까 비는 어느새인가 인간을 병들게 하는 그런 존재, 오염된 물이었다. 그런 비를 다시 undemonize 할 수 있게된 계기가 바로 그 때 였던 것 같다. 그렇게 우산사기를 거부한 첫 장마를 지내면서 나는 어렸을 때 내가 비맞는 걸 좋아하던 때가 있었다는 기억도 떠올랐다. 아마 초등학교 저학년쯤 되었을까 그 때 나는 여름에 비가 아주 시원하게 쏟아지는 날이면 신이나서 엄마에게 비맞으러 나갔다 오겠다고 선언을 했다. 가벼운 옷차림에 맨발에 샌들을 신고 집을 나서고는 한참을 물웅덩이에 발을 첨벙거리다가 돌아오곤 했다. 그때 그 순간의 비는 그렇게 가벼운, 즐거운, 건강한 것이었다. 오염되지 않은 그냥 물로써 존재했던 순간이 내게도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비를 되찾기까지 이십여년이 걸렸다. 


자연과의 관계회복이라고 부를 수도 있겠고, 자연에 대한 트라우마의 극복이라고 할 수도 있겠고, 자연과의 화해와 해방의 순간이라고 부르고 싶기도 하다. 비를 맞을 수 있는 자유를 다시 얻게 된 것은 그런 거창한 이름을 붙여도 좋을만큼 spiritual 한 경험이었으니까.  


Siren's rave, 2019



이전 13화 Home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