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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Reflections 1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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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lfie Nov 12. 2020

Helpless

무력함, 당혹, 초조함, 트라우마

평온한 당직저녁 갑자기 어느 의사에게서 급히 와달라는 콜을 받았다. 상황이 매우 급박하게 돌아가는 듯 했고, 내가 요청받은 것은 충격이 큰 가족들을 좀 위로해달라는 것이었다. 40대 후반의 이 여성환자는 평상시와 다름없는 하루를 보내다가 일상적인 검진을 받으러 병원을 들렀었고, 그리 별거아닌 작은 수술을 해야할 것 같다는 말을 들은 후에, 바로 몇 시간뒤 오늘 밤을 넘기기 힘들 것 같다는 청천벽력같은 소식을 듣게 된 것이었다. 그래서 갑자기 온 가족이 병원으로 소집되었고 그들은 환자가 있는 병실에도 들어가지 못한 채 병원 복도에서 망연자실한 상태로 어쩔줄을 몰라하고 있었다. 이런 일은 샌스란시스코에서 가장 큰 이 병원에서도 정말 흔치 않은 일이었고 의료진들도 굉장히 당혹스러워하고 있었다. 큰 충격에 휩싸인 환자의 남편과 자녀들은 할 말을 잃은 듯 침묵만 흐르고 있었고 그 중의 어린아이 하나만이 칭얼거리며 주변을 배회하고 있었다. 어떤 말도 위로가 되지 않았고 대화가 거의 거부된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이 말이 안나오는 상황에 잠시 같이 앉아 초조함을 나누는 것 뿐이었다. 그리고 나는 잠시 후 필요할 때 꼭 다시 불러달라는 말을 남기고 자리를 떠났다. 


나중에 몇 시간이 지났을까 환자는 드디어 수술실에서 빠져나왔고 남편과 가까운 자녀 몇명이 병실에 모여 다시 한번 나에게 와달라고 요청했다. 환자는 옅은 미소를 띄우며 인사를 건넸고 남편과 자녀들은 곁에서 계속 훌쩍이고 있었다. 그때 밖에 나갔다가 방금 돌아온 듯한 환자의 딸이 가쁜 숨을 내쉬며 병실로 들어왔고 환자는 매우 들떠서 그녀에게 소리쳤다. 

"사왔어?" 

딸은 코카콜라 캔 하나를 내려놓으며 대답했다. "이 근처에 살 데가 없어서 이십분이나 걸어갔다왔어." 그리곤 종이컵에 콜라를 따라서 환자가 마실 수 있도록 칫솔같이 작은 브러쉬 끝부분에 그 콜라를 적셔서 건넸다. 

"하하... 시원해." 그녀는 마침내 병원에서 파는 다이어트 콜라가 아니라 진짜 콜라를 몇 방울 혀 끝에 적시고는 작은 해방감을 누리고 있었다. 그녀의 웃는 얼굴을 본 가족들도, 간호사도, 나도 그제서야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그날의 비극은 그렇게 소소하고 아름다운 풍경으로 마무리가 된 듯 했지만, 사실 병원에서 일하기 시작한뒤로 내가 직접 목격했던 가장 힘겨운 트라우마중의 하나였다. 나중에 그 때 어땠었느냐고 묻는 어느 동료의 말에 그 순간을 다시 회상하며 난 이 말이 가장 먼저 튀어나왔다. 

"그 때 그 환자의 남편 앞에 일단 앉았는데... 등이 너무 뻗뻗하게 굳어져서 한 이십분? 삼십분? 더 이상 거기에 있을 수가 없었어요... 거기 계속 같이 있어야 했겠지만, 난 도망치듯이 일단 빠져나올 수 밖에 없었어요." 

가시방석이라는 말이 가장 적합한 표현일까? 어쩌면 그것과도 조금 달랐다. 가장 지루하고 잔혹한 영화 속에 내가 같이 갇혀있는 듯한 느낌. 그게 내가 그 날 경험한 2차 트라우마였다. 내 일이 아니지만 내 일이었다. 환자의 비극와 나의 비극 사이에는 항상 명확하게 경계선을 긋는게 이 일의 가장 중요한 프로정신이라고 생각했었고, 난 나 자신을 지키기 위해 항상 엄격하게 그 원칙을 지켜온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날 그 새벽 병원 2층 로비 대기실의 의자는, 익숙했던 관객석이 아니라 아차하는순간 빨려들어와버린 카메라가 돌아가는 세트장 안이었던 것이다. 몇일 뒤 그 때 그 환자의 일에 관련되었던 모든 사람들이 다시 한번 회의에 소집되어 모였고, 의료진들은 그 날의 상황에 대해 의견을 나누면서, 아주 잠깐 '다들 괜찮아요?'라고 스치듯이 언급했다. 그 일로 트라우마를 겪고 있을 지 모를 사람들을 케어해주는 역할로 앉아있던 것이 바로 나였지만 나조차도 그 질문을 제대로 대답하지 못했다. 


여기에 대체 어떤 해결책이 있을까. 그 때 그 좁은 회의실에 불려왔던 사람들은 다 그때 나처럼 어라? 하는 순간 그 비극 속으로 빨려들어갔을까. 뻗뻗하게 굳어진 등을 차마 등받이에도 기대지 못하고 앉아있다가 도망치듯 뒤돌아 나왔을까? 이 글을 쓰면서 마음을 정리하는 것은 아마 그 때의 나에게 다시 한번 '괜찮아요?'라는 말을 거는 시도일 것이다. 마음은 뇌가 아니라 내장 어디쯤, 몸에 있다고 하던데. 나의 무력감과 초조함과 당혹스러움은 그 때 그 등허리에 솟아나 있었던 것 같다. 카메라 앞에서 새하얗게 질린 신인배우처럼. 그리고 나는 또 한번 묻는다. 이번의 나는 카메라 감독? 조명감독? 아니 소품담당 막내 정도 되는걸로 치고. 


'그 등허리 괜찮아요?' 


Fruit of anxiety,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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