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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나오라 Nov 09. 2020

열등감은 커지고
자존감은 낮았던 시절

우리 집은 내가 6살 무렵 시골에서 서울로 이사를 왔다.

아빠는 진작부터 서울로 와서 돈을 벌고 계셨고 엄마와 우리 삼 남매가 짐을 싸들고 이사를 온 셈이다.

아빠가 돈을 벌고 계셨다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 시절 아빠가 돈을 벌고 계셨던 게 맞나 싶은 생각이 든다. 

우리는 시골에서 올라와 친척분이 사시는 동네에 터를 잡게 되었다.

우리 부모님이 작은어머니라고 부르는 나한테는 그냥 할머니라고 부르면 되는 분이셨는데 그분도 형편이 그리 넉넉지 않아 판잣집 같은 곳에서 사셨었고 우리도 그 판잣집 한 칸에 자리를 잡게 된 것이다.

정확하게 판잣집이었는지 가건물이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 집에서 우린 얼마 안 살고 이사를 나왔기 때문이다.




그 시절 우리 아빠는 정확하게 어떤 일을 하셨는진 모르겠지만 매일 집에 들어오시는 분이 아니셨을뿐더러 엄마에게 생활비를 넉넉하게 드리지 못하는 형편이었다.

아빠가 열심히 일을 하는데 돈을 못 벌었구나 싶겠지만 나중에 철이 들었을 때쯤 알게 된 우리 아빤 가정에 충실한 분이 아니셨다. 매월 꼬박꼬박 월급을 갖다 준다거나 엄마에게 친절한 분이 아니셨다.


그러니 엄마는 우리 삼 남매를 키우느라 어릴 적부터 일을 다닐 수밖에 없었고 시골에 살았을 때도 서울에 올라와서도 엄마는 일을 하셨다. 우리 삼 남매는 아침에 나가는 엄마를 보고 밤늦게 돌아오는 엄마를 보는 게 일상이었다.

만약 아빠가 꼬박꼬박 월급을 엄마에게 갖다 주었다면 아마 우리 집은 금방 형편이 나아졌을 거라는 생각이 들지만 아빠는 가정경제에 별 도움이 되지 못하고 있는 상황.

냉정하게 말하면 엄마가 일하면서 번 돈으로 우리 삼 남매를 키웠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러니 가정형편이 좋을 리가 있나. 우린 늘 부족했고 아쉬웠다. 그래도 우리는 어디 하나 삐뚤어졌다거나 모난데 없이 잘 컸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마도 엄마의 힘이겠지 싶다.


가정형편이 어려우니 대학을 간다는 건 사치스러웠다. 엄마는 여전히 홀로 고군분투하고 계셨고 아이들은 셋이었으니 말이다. 더군다나 만약 대학을 간다면 아들인 남동생이 대학을 가는 게 맞는 순리였다. 

그 시절은 그랬다. 형제가 많으면 제일 큰 장남이나 장녀가 커서 일을 하며 부모님을 도와드렸고 딸보단 아들을 더 가르치고 더 귀하게 대해주는 시절. 무슨 6.25 피난 시절이냐고? 불과 몇십 년 전 이야기다. 

간혹 주위를 둘러보면 그런 순리를 역행하는 집들도 있었지만 드물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남녀평등을 외치는 과도기 시대였던 거 같다.

그래서 언니는 고등학교 진학을 실업계를 택해서 갔었고 한 살 차이인 나도 뒤따라 실업계에 진학을 했다.


실업계 고등학교는 지금으로 따지면 특성화 고등학교인셈이다. 대학이라는 통로를 거치지 않고 일찍 사회생활을 할 수 있도록 기술과 학업을 가르쳐주는 고등학교인 셈이다.

실업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나는 바로 사회생활에 뛰어들었다. 하지만 번듯한 직장은 아니었다. 내가 고3 시절 IMF 금융위기가 터져서 취업이 힘들어졌기 때문이다.

대학도 안 나온 내가 그 시절 취업하기는 하늘의 별따기. 물론 공부를 잘했다거나 어떤 일에 탁월한 성과를 냈다면 얘기는 달라진다. 하지만 나는 공부를 그리 잘하는 아이가 아니었고 어떤 부분에 특별한 재능을 보이는 아이도 아니었다. 평범 그 자체였다.          





어쨌든 나는 대졸이 아닌 고졸의 삶을 살고 있었다.

중학교 동창들 중에 인문계 고등학교에 갔었던 친구들은 대학생이 되었고 나와 같이 실업계 고등학교에 진학했던 친구들조차도 취업이 힘들기도 하고 공부에 대한 목마름이 있었는지 고등학교 졸업 후 입시공부를 시작해 대학교에 진학한 친구들도 많았다.


그래서였을까 고졸이란 사실이 창피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시절 분위기는 취업을 할 때도 고졸보단 대졸이 인정받는 사회. 지금이야 대졸이 보편화된 사회이지만 그때는 고졸도 있었기에 취업 모집 공고를 보면 대졸 이상, 대졸 우대 이런 문구들이 있던 시절이다.

처음엔 창피하기만 했던 이력이 점점 더 부정적인 감정들이 쌓이면서 열등감으로 다가왔다.

대학을 못 나온 고졸이라는 사실이 참 부끄러웠다.

그래서 이력서를 쓴다거나 새로운 누군가를 만날 땐 편하지가 않았다. 

이력서는 당연한 거지만 새로운 사람들을 접하게 될 땐 으레 '어느 대학 무슨 과 나왔어요?'하고 묻기 때문이었다


열등감이란 감정은 참 나를 못나 보이게 하는 감정이다. 거기에 더불어 피해의식은 세트인 거처럼 따라다녔었다. 

열등감과 좌절감. 피해의식 나는 꽤 오래 이런 감정들 때문에 힘들었었다. 그러니 자존감은 말해 무엇할까. 그 시절 나는 나를 사랑하는 법을 몰랐던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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