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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나오라 Nov 16. 2020

나의 결핍은 무엇이었을까

나는 머리가 나쁜 건지 기억하고 싶지 않은 건지 어렸을 때 기억이 별로 없다. 초등 입학 전까진 기억이 거의 나지 않을뿐더러 초등학생 시절조차 제대로 된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니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초등 저학년이라 할 수 있겠다.

어려서 나는 그렇게 건강한 아이가 아니었다. 언제부터였는지 모르겠지만 시도 때도 없이 아팠고 초등학교 고학년이 돼서야 학교를 제대로 출석할 수 있었다.


확실한 내 기억은 초등학교 4학년까지는 학교를 들락거렸다 할 수 있을 정도로 병원에 자주 다녔었고 5학년 때는 1학기 내내 학교를 간 적이 별로 없었던 거 같다. 2학기 돼서야 학교를 매일매일 간 기억이 있으니 말이다.

5학년이 시작하고 한참이 지나서야 등교를 했었는데 선생님이 칠판 앞에서 나를 옆에 세우고 아이들에게 아파서 등교를 못 했었다며 소개를 시켜줬던 기억이 떠오른다. 

그 뒤로도 한참을 학교에 가지 못했었고 시간이 지나 학교에 갔을 땐 이미 아이들끼리 친해진 상태였다. 

그래서였을까 나는 친구들이 별로 없었다.


그래도 초등학교 때부터 친한 친구가 둘이 있었는데 어떻게 친해졌었는진 사실 기억이 나질 않는다. 

아마도 비슷한 동네여서 친해졌던 거 같다. 그 친했던 친구는 지금까지도 연락하며 지내는 일명 나의 베스트 프렌드다. 그 친한 친구 외엔 친구가 별로 없었고 6학년이 돼서야 아이들이랑 어울리며 놀았던 기억이 난다.



학교 생활을 다른 친구들처럼 하지 못했기에 학교 수업을 따라가는 것도 힘들었고 친구들끼리 친하게 지내는 사회성도 떨어졌었다. 그래서였을까 초등 저학년에 기초지식을 배우는데 기초가 부족하니 고학년이 돼서도 진도를 따라가기가 버거웠고 중학교가 돼서도 마찬가지였다.


친구들의 관계 또한 어렵긴 마찬가지. 학년 초반에 학교를 자주 가서 친구들을 좀 사귀었더라도 제대로 등교를 하지 못하니 그 관계는 오래 지속되기 힘들었다. 친해졌다고 느낀 친구가 한참 지나서 등교를 하게 되면 어색하기 일쑤였고 특히나 여자아이들은 끼리끼리 문화가 있는데 나는 그 끼리끼리에 들어가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그런 일들이 반복되니 나는 자연스럽게 소심한 아이가 되었고 존재감이 없는 아이가 되었다. 

처음 본 사람한테 말을 거는 것도 힘들어했고 이야기를 주고받고 조금 친해졌다고 했어도 내 이야기를 하는 것보단 친구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게 편했던 시절이다. 그리고 학교를 꾸준히 등교하지 못해 아이들이랑 공감대 형성이 되질 않으니 친구들이랑 지속적인 관계를 맺는 것도 힘든 시절.


그때부터였던 거 같다. 내가 다른 사람을 신경 쓰고 살았던 게 말이다. 나는 흔히 말해 남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내가 이렇게 행동하고 말하면 나를 싫어하면 어떡하지? 나랑 안 놀아주면 어떡하지? 하며 내 기분. 내 상황이 먼저가 아니라 항상 상대방이 먼 저였던 거 같다.

한마디로 상대방 기분을 잘 맞춰줬다고 할까? 좋게 말하면 다른 사람 말을 잘 들어주고 배려한 거처럼 보이겠지만 사실은 눈치를 보고 살았던 것이다.

내 안에 나는 없고 다른 사람만 가득 존재했던 시절. 커서도 마찬가지. 이미 성격이 그리 형성된 것이다.




가정형 편도 내 성격 형성에 영향을 끼쳤다고 해야겠다. 돈이 없다는 것 또한 사람을 작아지게 만들고 소심하게 만든다. 난 당당하지가 못했다. 물론 가정형편이 어렵다고 다 그런 것만은 아니다. 나는 거기에 교우관계까지 맞물리다 보니 더 소심해지고 내성적인 아이가 되었던 것이다. 나는 사랑받지 못하는 아이라고 생각했었고 아이들이 나를 좋아해 주지 않는다고만 생각했었다. 공부를 잘하는 것도 돈이 많은 것도 활발한 아이도 아녔으니 말이다.


게다가 가정에서도 비슷한 감정들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무뚝뚝한 아빠는 그걸 넘어 무서운 존재였다. 가정경제에 도움이 안 되는 아빠이면 다정하기라도 했어야 했는데 우리 아빠는 화내는 사람. 혼내는 사람이었다.

어려서 아빠와의 기억은 잘못했다며 맞았던 기억. 혼났던 기억밖에 나질 않는다. 한마디로 아빠와의 관계가 좋지 않았다. 그래도 우리 삼 남매 중에 아빠가 제일 좋아했던 게 나였는데 지금까지도 나는 왜 그런지 이유는 모르겠다.


엄마는 먹고사는 생존 문제는 어느 정도 해결해주셨지만 마음을 나누는 감정 문제는 해결해 주지 못했다. 아침부터 저녁 늦게까지 일을 다니시니 그럴 수밖에.

한마디로 밖에서도 사랑받는 아이가 아니었고 안에서도 사랑받을 때가 없다고 생각했던 나는 늘 사랑이 고픈 아이였다. 그래서 사랑받기 위해 사랑받고 싶어 발버둥 치며 남들 눈치 보며 살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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