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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봉봉오리 Sep 16. 2024

동물은 동물권 활동가일까?



새벽이 세상에 처음 ‘공개’된 것은 직접행동 영상이었다. 열악한 환경에서 극적으로 ‘구조’되는 모습은 그대로 촬영되어 퍼져나갔다. 의도가 어떻든 그것은 구원 서사의 모습이었다. 그 과정과 시도가 한국 최초의 급진적 방법이었으므로 이후 그가 지낼 공간이 마련되고 그 단체가 설립되었을 때 자연스럽게 ‘래디컬한 운동‘의 상징이 되었다. 사회가 허락하지 않은 존재와 함께 하는 단체.


내가 운영활동가가 되기 전, 새벽이생추어리에 대해 들은 교육 등에서 새벽과 잔디는 ’가장 강력한 동물권 활동가‘로 표현되었다. 동물을 투쟁가라 표현한 그 언어가 마음에 깊이 새겨졌다. 살아내는 것이 투쟁인 삶이므로.



그런데, 정말 그렇게 표현해도 될까?


피해 생존자에게 다른 동물들의 해방을 위해 투쟁하라고, 투쟁하는 활동에 (당연히) 함께 하고 있다고 인간의 언어로 말해도 될까. 착취되는 수많은 비인간의 ‘공리’를 위해서?


새벽과 잔디는 정말로 다른 동물의 해방을 위해 ‘싸우고’ 싶을까? (심지어, 자신의 안전이 걸고서.)


그저 지레짐작하는 것은 아닐까? ‘같은’ 동물이니까, ‘동족’이니까? ‘인간들의 래디컬한 운동’을 통해 구조된 존재는 래디컬한 운동에 이용되어도 될까?


그저 쉬고 싶을 수도 있다. 자신의 삶에 집중하고 싶을 수도 있다. 지긋지긋한 인간 중심 사회로부터 숨고 싶을 수도 있다. 그런 그들의 삶에 인간 활동가가 투쟁가라는 프레임을 씌워도 될까? 새벽과 잔디가 인간 피해 생존자였어도 같이 싸우자고, 투쟁가라고 당연하게 표현했을까?


그들이 진짜 내 인간 동료였다면, 안 좋은 기억 따위 잊고 평온하게 살라고 하지 않았을까? 투쟁가의 이미지 따위보다 너를 위해 살라고. 너의 안전과 안녕을 위해서만 살라고.




인간 동료는 어떤 주장을 해도, 어떤 충격을 사회에 주어도 그 결과가 벌금이나 징역에 그친다. 그것을 최근의 활동을 통해 깨달았다. 내가 사회에서 ’삐끗‘하도록 주변 사람들은 두고 볼 수 없었을 것이다. 연대라는 에어매트가 나를 나락에 처박히게 두지 않는다.


9년 간 어떤 안전망도 워라밸도 없이, 나를 갈아 넣으며 프리랜서로 일했던 나는 직장생활을 한 친구들과 달리 30대 중반의 여성이 모았어야 한다고 사회가 기대할만한 재산이랄 게 없었다. 큰 프로젝트가 끝나면 병이 났고, 번 돈은 너덜해진 나를 돌보는 데에 써야 했다. ’정상‘ 궤도를 택한 친구들이 받는 국가의 지원은 늘 나를 배제했다. 현재 사회에서 나는 30대의 정신 장애가 있는 가난한 여성이다. 하지만 그런 나에게 국선 변호사라는 선택지도 존재한다.



새벽과 잔디의 최악은 살처분이다. 동물해방은 인간 가해자가 저지른 만행을 바로잡는 투쟁이다. 동물의 피해자성만 부각하고 국한해서도 안 되지만, 동물을 투쟁가로 두는 것도 우리가 보고 싶은 대로 보는 것은 아닐까.


새벽과 잔디의 삶을 건 운동을 하는 것은 우리의 투쟁에 그들의 삶을 담보로 하는 것이다. 우리는 목숨을 걸지 않아도 되지만 그들은 다르다. 우리가 투쟁하는 과정에서 잃는 것과 그들이 빼앗기는 것이 같지 않다는 것은 불공평하다. 그리고 명백한 위계 속에서, 그들을 동료라 칭하는 것도 조심스럽다. 그들은 나를, 우리를, 동료라 여길까? ‘친절한 간수’ 정도로 여길 수도 있다. 그렇다한들 그것을 억울해하거나 부정할 수도 없다.


새벽과 잔디를 더 가까이 만나고 그 시간이 쌓여갈수록 나는 우리의 관계성이 어렵다. 우리는 정말 뭘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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