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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본본쓰 Oct 26. 2020

퇴사를 앞두고 일어났던 많은 일들.

(27) 퇴사까지 두 달. 

 팀장님으로부터 퇴사 예정일을 6월 말로 통보받은 후, 조금씩 조금씩 퇴사 준비를 해나갔다. 퇴사 준비라고 해봐야 거창할 것도 없었다. 그저 내가 하던 업무를 부사수 L 또는 다른 동료에게 인수인계하는 것, 회사 내에서 친했거나 도움을 많이 주었던 동료들과 인사하며 술 한잔 기울이는 것, 그리고 행정적으로 퇴사 절차를 밟는 것, 그 정도였다. 마지막으로 퇴사하겠다고 말씀드린 것이 4월 중순이었고 퇴사가 이뤄지는 건 6월 말이었으니, 내게는 두 달이라는 긴 시간이 남아있었다. 짧지 않았던 시간이었기에 역시 많은 일들이 벌어졌다. 때로는 미안함을, 때로는 감사함을, 그리고 때로는 억울함을. 




- 뜻하지 않았던 조직개편.

 퇴사를 앞두고 가장 먼저 있었던 일은 바로 조직 개편이었다. 마지막 퇴사 선언을 성공적으로 마친 다음날. 출근하자마자 팀원 모두에게 소집 명령이 떨어졌다. 팀장님부터 파트리더 J책임님과 H책임님, S선배, U형님, J형님, 나, 그리고 L까지. 모두가 모인 회의실에서 팀장님이 이야길 시작하셨다.


"자… 오늘 아침부터 모인 거는… H가 6월 말까지만 하고 퇴사한다는 얘기를 하려고. H 나가기 전에 업무 분장도 좀 얘기해야 하고. 어제 파트리더 두 사람이랑 J한테는 얘기해서 알겠지만, 나머지 인원들은 모를 거야. 먼저 J가 해외파트로 넘어간다. J가 하던 국내 RMA 분석이나 ABN 대응은 S랑 U가 전담하는 걸로, 일단 그렇게 바꾸고. 해외파트는 사람 한 명 더 뽑을 예정인데, 언제가 될지는 아직 몰라. 국내파트 인원은 추가로 뽑을지 말지 담당님이랑 논의해서 나중에 얘기하는 걸로. 국내파트가 고생 좀 해야 될끼야. J, 할 수 있제. S랑 U도."

"네, 괜찮습니다."

"뭐, 못해도 해야 하는 거고. H, 니는 퇴사 전에 업무 하나부터 열까지 J랑 L한테 인수인계하고 나가라. 인수인계 다 못하면 못 나가. 알겠나."

"네, 알겠습니다."


 전날 얘기가 되어있었는지, 파트리더 책임님 두 분과 J형님의 표정엔 변화가 없었다. 그러나 이 소식을 이 자리에서 처음 듣게 된 나와 S선배, U형님, 그리고 L은 모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전에 없던, 그리고 너무나 갑작스러운 내부 조직개편이었다. 국내파트 소속의 J형님이 담당하던 주요 업무는, 불량 이슈가 접수되면 실물 제품을 받아 원인을 분석하는 RMA 업무와 내부적으로 발생한 불량 이슈를 고객사에 신고하는 ABN 업무였다. 이 기존 업무들은 S선배와 U형님이 가져가고, J형님은 해외파트로 넘어와서 내 빈자리를 채운다는 구상이었다.

 문제는 J형님이 중국어를 하나도 못한다는 것. 이게 가능할까 싶었는데, 팀장님의 계획이었으니 어쩔 수 없었다. 물론 해외파트에 1명을 추가로 채용할 계획도 있었고 J책임님과 L이라는 든든한 조력자가 있었음에도, 내 퇴사로 인해 J형님은 뜻하지 않은 파트 이동과 업무 변경을 떠맡게 된 것이었다. 생각지도 못한 조직 개편에 나는 혼란스러우면서도, J형님과 나머지 동료들에게 미안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H, 한 마디 할래?"

"음……"

"아이다, 됐다. 어차피 나중에 송별회식할 낀데. 끝."


 조직개편에 대한 이야기는 짧게 마쳤고, 업무 개시를 위해 다시 사무실로 돌아갔다. 회의실을 나와 사무실로 돌아가는 복도에서 J형님과 이야기를 나눴다. 


"아, 행님. 미안해요. 이렇게 될 줄 몰랐어요…"

"아이다. 괜찮다. 니 힘들어하던 거도 알고 있었고, 내한테도 몇 번 얘기했잖아."

"아고, 저 땜에 행님 괜히 해외파트로 넘어오고… 업무도 완전 바뀌고…"

"아이다, 내도 뭐 새로운 업무 접하고 좋지. 국내 고객사 업무만 하다 보니까 좀 지루하더라고. 기회라 생각하고 있다. 니 가기 전엔 업무 인계 다 해줘야 된디."

"네네, 당연하죠."


 J형님은 애써 괜찮다 말해주었지만, 미안한 마음이 너무도 컸다. 해당 업무의 언어를 하나도 못하는 상황에서 고객 대응을 하기란 쉽지 않은 법. 아니, 쉽지 않은 게 아니라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고 봐야 한다. 아무리 추가 채용이 예정되어 있다 해도, 최소 서너 달은 고생해야 할 게 뻔했다. 게다가 국내 고객사와 해외 고객사는 성향이나 업무 스타일에서도 큰 차이가 있었기에 그에 맞춰주기도 쉽지 않을 것이었다. 내가 짊어지고 있던 짐을 남은 팀원들에게 떠넘기고 떠나는 것 같아서 마음이 무거웠다. 특히 J형님에게 많이 미안했고.


 그 뒤로 두 달간, 미안함과 그들이 짊어질 부담감을 조금이라도 덜기 위해 업무 인수인계에 갖은 애를 썼다. J형님이나 부사수 L이 소화하기 어렵거나 히스토리가 있는 이슈와 업무들은 J책임님께, 언어적으로 고객 대응이 가능할 만한 일들은 부사수 L에게, 그리고 루틴 하게 송부하는 주간/월간 리포트 또는 전산망을 잘 이해해야 하는 전산 업무들은 J형님에게 인수인계했다. 사실 한 달이면 충분할 인수인계를 두 달에 걸쳐서 하다 보니 루즈한 감이 없지 않아 있었지만, 유종의 미를 거두고 싶었다. 떠난 이의 빈자리는 아름다워야 하지 않을까 해서. 아름답진 않아도 더럽진 않아야지. 다행히 두 달이라는 시간 안에 담당하던 업무의 80% 정도는 인수인계를 완료했던 것 같다. 물론, 퇴사 이후에도 한동안 전화가 오긴 했지만 말이다. 




- 많은 이들의 위로와 격려.  

 퇴사 선언이 있은지 며칠 후엔, 사내 간호사 선생님께서 따로 면담을 하자고 하셔서 양호실엘 찾아갔다. 몇 주 전 공황발작 증상으로 양호실을 찾아간 적이 있었는데, 이후의 증상을 확인하려 따로 면담을 하자고 하신 것이었다. 일이 잠시 한가해진 틈을 타 양호실로 향했다. 문을 조심스레 열고 들어가서는 간호사 선생님과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안녕하세요."

"오, 왔어요? 여기 앉아요. 요즘은 좀 어때요? 괜찮아졌어요?"

"약 계속 먹고 그래서인지 많이 괜찮아졌어요."

"약 먹는 양은?"

"양은 예전이랑 똑같아요. 아침 두 알, 저녁 세 알. 그… 근데 퇴사한다고 말씀드렸어요." 


 나도 모르게 퇴사 얘기가 나와버렸다. 굳이 얘기할 필요가 있었을까 싶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내가 극도로 힘들어할 때 회사 내에서 이런 힘듦을 진지하게 털어놓은 사람이 바로 간호사 선생님이었다. 내 공황 발작 증상을 본 사람 역시 그녀뿐이었고. 


"음, 잘 결정했어요."


 잘 결정했다는 그 짧은 한 마디가 큰 응원으로 느껴졌다. 


"퇴사하고는 좀 쉬려구요?"

"네네. 좀 쉬면서, 하고 싶었던 걸 좀 해보려구요."

"아, 뭐 다른 직장 찾아보는 거 아니고?"

"네네. 직장은 안 다니고… 글 쓰는 걸 좋아해서, 책을 좀 써볼까 해요. 소설이나 에세이요."

"아, 진짜? 나도 원래는 글 쓰는 걸 엄청 좋아했어요. 지금은 뭐, 전혀 다른 일을 하고 있지만…"


 자연스럽게 간호사 선생님 얘기도 들을 수 있었다. 그녀도 학창 시절엔 글 쓰는 걸 좋아하고 곧잘 해서 상도 많이 받았다고 했다. 비록 전공은 이과였지만, 문학도가 되고 싶었다는 그녀. 현실적인 환경과 경제적인 벌이를 위해 하고 싶었던 꿈을 접고, 지금은 전혀 다른 일을 하고 있다는 말에서 진한 아쉬움을 느낄 수 있었다그래서인지 마지막 한 마디는 내 꿈에 대한 응원이었다.


"멋있다. 그 꿈, 응원해요. 잘 됐으면 좋겠어요, 진짜." 


 그녀의 진심 어린 격려와 응원에서 엄청난 힘을 얻을 수 있었다. 그리고 아직 남아있었던 우울과 불안까지 말끔히 사라지게 하는 치유의 말이기도 했다. 이러한 위로와 격려는 전혀 생각지 못한 사람에게서도 받을 수 있었다. M책임님과의 대화였다. 



매일 점심시간엔 이 자리에 앉아서 책을 읽곤 했다.

 그날도 여느 때처럼 점심 식사를 마치고 회사 앞 공터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우울증에는 햇빛을 쬐면서 산책하거나 책을 읽는 게 도움된다는 말을 듣고는 몇 주 째 그렇게 하고 있었다. 매일 앉던 벤치에 앉으려던 찰나, 저 멀리서 타 부서 M책임님이 걸어오고 있었다. '내쪽으로 오시는 건가?' 

 

 "H씨, 퇴사한다면서요."


 M책임님은 내 옆에 앉아서는 퇴사 얘길 꺼내셨다. 사실 퇴사가 확정된 이후, 내 퇴사 소식을 여기저기 떠벌리고 다니진 않았다. 그거 무슨 좋은 일이라고… 그러나 회사 안에는 비밀이 없었고, 내 퇴사 소식을 들은 M책임님이 나를 찾아온 것이었다. 평소 업무적으로 큰 접점이 없었고, 2층 사무실을 함께 쓸 때에도 항상 조용해 보였던 그였기에 의아스럽긴 했지만, 굳이 쉬는 시간에까지 나를 찾아온 이유가 궁금해서 그와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아… 네네. 소식 들으셨나 보네요. 6월 말까지 하는 걸로 했습니다."

"한 2년 일했죠? 고생했어요."

"아유, 아닙니다."

"혹시 다른 데 가는 거예요?"

"아, 아뇨. 일 때문에 너무 고생해서 일단은 좀 쉴 생각이에요. 하고 싶은 일도 있고 해서."

"품질팀 일이 좀 힘들긴 하죠. 하고 싶은 일 있으면, 원 없이 해봐요. H씨가 올해 몇 살이죠?"

"저 스물아홉이요. 서른 넘으면 퇴사도 못할 것 같아서 그냥 저질렀네요. 하하."


 대화는 계속 이어졌다.


"빨리 결정하는 것도 나쁘지 않죠. 저 재입사해서 들어온 거 알고 있죠?"

"네? 아뇨, 몰랐어요."

"원래 첫 직장을 경기도에 있는 플라스틱 패키지 회사에서 다니다가. 한 3년 다녔나? 이직해야겠다 싶어서 이 회사 입사하고 다녔죠. 그때 우리 회사가 플라스틱 패키지 사업부가 있었거든요. 그러다가 패키지 사업부 망하고 다른 팀으로 갔는데, 원래 하던 일이 아니다 보니까 안 맞아서 퇴사하고… 우리 고객사 중에 대전에 있는 S사 있죠? 거기 들어갔다가 아 여기도 아니다 싶어서 바로 퇴사하고. 재입사로 들어와서 지금까지 일하고 있네요."

"아, 그러셨구나. 전혀 몰랐어요. 그럼 지금 하고 계신 일이 원래 하던 일이 아니신 거네요?"

"크게는 비슷한데, 엄밀히 따지면 다르죠."


 회사 안에 퇴사 후 재입사를 해서 다니는 분들이 있다고는 들었는데, M책임님이 그들 중 한명일 줄은 몰랐다. 회사에서 재입사를 받아준다는 것도 신기했고, 그렇게 할 용기가 난다는 것도 신기했다. 혹여나 내게 재입사 기회가 주어지더라도, 나는 죽어도 재입사는 안 할 생각이다. 어찌했든, 이야기를 듣다 보니 30대 중후반의 직장인 이야기가 궁금해졌다. 한창 경제활동을 활발히 할 시기가 30대이고, 나는 그 30대를 코앞에 두고 퇴사를 하게 되었으니. 그들의 이야기를 어느 정도 듣고 싶었다.


"일하는 건 어떠세요? 맨날 늦게 퇴근하시고 그러시던데."

"에이, 품질팀이 더 늦게 퇴근하죠. 저희야 뭐, 현장에서 문제 있어야 늦게 퇴근하는데. 일은 솔직히 잘 모르겠어요. 아직도 안 맞는 것 같기도 하고."


 의외였다. 10년 정도 직장 생활하고 책임(일반 회사로 따지면 과장) 직급을 달면, 어떤 일이든지 척척 해내고 쉬울 줄만 알았기 때문이다. 직장생활은 그냥, 누구에게나 힘든 것이었나 보다. 그와 생각보다 많은 이야길 나누었고, 대화가 얼추 끝나갈 무렵엔 나도 몰입이 많이 되었는지 조금은 진지하고 철학적일 수도 있는 질문까지 하게 되었다. 


"음… 지금 사는 삶은 행복하세요?"

"글쎄요… 마음 같아서는 매일 퇴사하고 싶은데, 가정도 있고 애기도 있으니까 쉽지 않네요. 왜 다들 가슴속에 사직서를 품고 산다고 하잖아요. 딱 그 심정인 것 같아요. 가족 때문에 일하는 건데, 일은 여전히 힘들고 그렇네요. 퇴사한다고 해도 무슨 일 할까 싶고, 앞으로 어떻게 살지도… 아직 고민이구요. 어쨌든 H씨는 퇴사하고 나서 하고 싶은 일 잘했으면 좋겠어요. 나중에 또 얘기해요." 


 책임님은 다시 사무실로 돌아갔고 나는 벤치에 남아 짧지만 깊은 사색을 하게 되었다. '과연 행복한 삶은 무엇인가.' 불과 며칠 전까지 했던 질문을 또다시 하게 되었다. 연봉 4000이라는 적지 않은 돈을 벌었고 부모님 두 분과 동생 그리고 반려견까지 모두 건강한 데다가 예쁜 여자 친구와 알콩달콩 만나면서도, 직장생활 2년 간은 행복이란 감정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 일이 성향에 안 맞고 바쁜 직장생활에 지쳤다는 이유도 있었지만, 하고 싶은 일이 없다는 것과 스스로 동기부여를 하지 못한다는 것, 이러한 원론적인 이유들이 더 크게 와 닿았다. 인생에서 돈이 중요하지 않은 건 아니지만, 행복 없이 사는 삶이 의미가 있을까.

 30대의 전형인 M책임님과의 대화에서도 행복보다는 생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등 떠밀려 사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겉으로 보기엔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충분히 안정적이고 화목한 가정까지 있으니 마냥 행복해 보이지만, 행복한 삶인가에 대한 질문에는 쉽게 답하지 못하는 그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게다가 매일 퇴사 생각을 하신다는 말을 듣고는 '30대가 되어서도 마찬가지구나, 퇴사하길 잘했네'라는 생각까지 하게 되었다.

 이런 모습이 단순히 M책임님만의 모습은 아닐 거라 생각했다. 적어도 내 눈에 비친 30대, 40대들의 삶은 대부분 그랬으니까. 다행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른 퇴사가 인생에 있어서 조금 더 나은 결정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더 늦기 전에 하고 싶은 일을 찾았고, 이 열정이 식기 전에 그 일을 도전할 수 있게 되었으니 말이다. 


 여러모로 이날의 대화는 내게 더 큰 동기부여가 되었고, 그의 격려는 더 큰 힘이 되었다. 하고 싶은 일이 있다는 것에 감사했고, 퇴사할 수 있음에 감사했다. 속마음을 털어놓는 게 어려우셨을 수도 있었을 텐데, 먼저 다가와서 솔직하게 이야기해주신 M책임님께 감사하기도 했고. 




- 하고 싶은 말 적으라면서요.

 퇴사 예정일을 학수고대하며 하루하루를 보내다 보니, 어느덧 6월 말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퇴사를 코앞에 두고는 퇴사 절차를 위해, 인사팀에서 퇴직원 서류를 받아왔다. 내가 생각한 퇴직원은 A4 용지 한 장에 개인 정보와 퇴사 사유 등만 간략하게 적는 것인 줄 알았다. 그러나 받아온 퇴직원은 무려 다섯 페이지나 되었고, 그 안에 서약서, 인수인계 업무 목록, 물품 반납 확인서 등의 양식이 있었다. 퇴직원 마지막 페이지에는 회사에 하고 싶은 말, 건의사항 정도를 쓰라는 항목이 있었다. 앞에 적혀있던 개인정보, 퇴사 사유 등은 손쉽게 쓸 수 있었으나, 바로 이 건의사항에서 막히고 말았다. 


내가 쓴 퇴직원은 왼쪽처럼 간단한 사직서가 아니라, 구구절절 써야 하는 호소문과도 같았다. (출처 : 비즈폼)


 '아니, 퇴사하는 마당에 뭐가 아쉬워서 하고 싶은 말을 다 쓰고 가냐'라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남은 팀원들과 동료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까 싶어서 평소 불편했던 점을 한 줄 꾸역꾸역 써 내려갔다. 내가 쓴 내용은 그리 어려운 내용도 아니었고, 불평불만 가득한 싫은 소리도 아니었다. 정말 사내 업무환경 증진에 필요한 내용.


'사무실이 너무 덥습니다. 업무 특성상 업무시간인 17:30 이후에도 남아서 고객 대응을 해야 하는데, 에어컨이 좋지 않아서 업무에 애로사항이 있습니다. 조치해주셨으면 합니다' 


 그 무렵 우리 팀은 원래 있던 2층 사무실에서 1층 사무실로 옮겨왔다. 신식이었던 2층 사무실과는 달리, 1층 사무실은 회사 창립 이래로 계속 써오던 곳이었고, 그랬기에 시설이 그리 좋지 않았다. 예전에 이 사무실을 썼던 직원들 사이에서는 지옥으로 표현되는 곳이었다. 더울 때 덥고 추울 때 추운, 최악의 사무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1층 사무실에는 에어컨이 천장에 달려있는데 흔히 생각하는 시스템에어컨이 아니라, 중앙제어로 쏴주는 구식 에어컨이라 더운 날엔 미지근한 바람이, 추운 날엔 차가운 바람이 나왔다. 날이 서서히 더워지던 5월부터 팀원들 모두가 고통스러워하고 있었다. 나 역시 그러했고. 

 문제는 회사에서 18시 02분이면 이마저도 꺼버렸다는 것이다. 내가 재본 정확한 시각이 18시 02분, 그러니까 오후 6시 2분이었던 셈. 항상 일이 많고 바빠서 정규 업무시간인 오후 5시 30분을 넘기어 8시 퇴근을 당연시했던 우리 팀. 그런 상황에서 6시 땡 하면 에어컨마저 꺼진다? 일은 많은데 사무실은 덥고… 얼마나 화딱지 났겠는가. 이런 배경에서 마지막 하고 싶은 말에 쓴 한 줄이 바로 에어컨 조치 요청. 그런데 이 건의사항은 엉뚱한 데서 부메랑이 되어 돌아왔다. 


"야, 사무실 덥다는 얘기는 거따가 왜 써."


 퇴사가 예정되어 있던 그 주 월요일. 팀 주간 회의를 마치고 나의 퇴사 이야기를 잠깐 나왔고, 그 이야기 끝에 J책임님의 타박이 있었던 것이다. 갑작스러운 타박에 '뭐지…?' 하는 생각이 들었고억울함과 서운함이 물밀듯이 몰려왔다. 하고 싶은 말 쓰라는 항목이 있길래 머리를 쥐어짜 내서 쓴 내용이었고, 무엇보다도 팀원들 위해서 쓴 내용이었는데… 게다가 팀원들이 모두 있는 자리에서 그렇게 공개적으로 이야기한 게 민망하고 수치스러웠다. 그 자리에선 침착하게 웃으며 이야기했다.


"하하하, 사무실 너무 덥지 않아요?"


 한참 지난 일이지만, 지금 생각해도 너무 어이가 없다. 왜 그렇게 타박하셨나 싶고, J책임님이 원망스러웠던 몇 안 되는 일로 기억한다. 나 같은 사원들은 이런 이야기도 눈치 보면서 해야 하나. 이럴 거면 그냥 하고 싶은 말을 쓰지 말라고 하던가. 

 그 자리에 있었던 H책임님이 나중에 내게 따로 얘기하기로는, J책임님이 너무하다고 생각했다더라. 따로 말씀드리기도 했다고 하셨고. 나만 그런 생각을 한 건 아닌가 보다. 그래도 퇴직원은 토씨 하나 안 고치고 그대로 제출했다. 그 뒤로 에어컨 조치가 되었는지는? 나도 모르겠다. 어차피 이제 그 사무실로 돌아갈 일이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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