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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용마 Aug 25. 2019

모든 사람은 자신의 역사가이다

책 《독서의 역사》, 알베르토 망구엘

"나는 다시 한번 집을 옮길 작정이다. 내 주위로는 가구가 빠져나온 구석의 은밀한 먼지 속에 쓰러질 듯 쌓인 책더미들이 마치 사막 한가운데의 풍화에 깎인 바위 모양으로 불안하게 서있다."


살짝 찔리긴 하지만 아쉽게도(?) 내 이야기는 아니고. 세계적으로 이름이 알려진 비평가이자 독서가인 알베르토 망구엘(이하 망구엘)이 본인이 쓴 책 《독서의 역사》에서 한 이야기다. 그는 이어서 "눈에 익은 책들을 한 권 한 권 쌓아 올리면서 나는, 지금까지 늘 그래 왔던 것처럼 다시는 읽지 않을 것이 뻔한데도 그렇게 많은 책을 간직하려는 이유는 대체 뭘까 궁금하다."라고 말했다. 이 문장을 읽으니 나만 그런 게 아니구나. 책 좋아하면 다 똑같구나. 그동안 쌓였던 체증이 시원하게 내려가는 느낌이다. 하지만 망구엘도 이 사람 앞에서는 한낱 미니멀리스트였으니...



낙타 I, 낙타 J, 낙타 K...


10세기 페르시아의 수상이었던 압둘 카셈 이스마엘은 책벌레 of 책벌레였다. 우리는 여행 가기 전에 캐리어에 짐을 얼마나 채울지 고민하고 있을 때, 그는 "뭘 고민해? 그냥 집에 있는 거 다 들고 가!"라고 외치는 사람이었다. 여행을 떠날 때마다 11만 7천 권에 달하는 책들과 헤어지기 싫어서 4백 마리나 되는 낙타들에게 A부터 Z까지 알파벳 순서로 걷도록 특별 훈련을 시켜서 책을 몽땅 싣고 다녔다. (낙타는 무슨 고생)


자네, 책 좀 읽어주겠나?

"나는 눈 먼 보르헤스(좌)에게 책을 읽어 줬다." by 알베르토 망구엘(우)


1964년. 여느 날처럼 망구엘은 학교를 마치고 '피그말리온'이라는 서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가 서점을 찾아왔다. 보르헤스는 시력을 점차 잃어가는 중이라 여든여덟 살 노모의 손에 이끌려 왔다. 그는 이미 유명한 문학가였지만 망구엘은 그의 편과 소설을 읽었을 아직 그의 문학에 압도감을 느끼지 않을 때였다. 


보르헤스는 당시 자신이 막 열정을 쏟고 있던 영어를 연마하는데 도움이 될 책을 찾고 있었다. 그는 거의 맹인이나 다름없었지만 지팡이를 들고 다니기를 거부했으며, 서점에 들르면 마치 손가락으로 제목을 볼 수 있다는 듯이 손으로 서가를 훑곤 했다. 그는 망구엘의 도움으로 원하는 책을 구입하고 아르바이트가 끝나고 저녁 시간에 바쁜지 물어왔다. 망구엘은 시간이 빈다고 했다.


"그렇다면, 자네. 우리 집으로 와서 책 좀 읽어주겠나?"


그렇게 50세 보르헤스와 16세 망구엘의 운명적인 만남은 시작되었다. 망구엘은 그 후 4년 동안 저녁시간이나 시간이 될 때는 아침 시간에 보르헤스의 서재로 가서 눈이 먼 그를 대신해 책을 읽어줬다. 망구엘이 서재에서 안락의자에서 자리를 잡으면 보르헤스는 답정너처럼 망구엘에게 본인이 읽고 싶은 책을 물었다. (물론 답은 정해져 있으니 대답은 필요 없었다고 한다.)


사람들은 보르헤스의 서재에 엄청난 양의 책이 있을 거라 예상했다. 하지만 걸어 다니는 도서관으로 불릴 정도로 기억의 천재였던 그의 서재에는 예상과는 달리 책이 그리 많지 않았다고 망구엘은 책에서 오피셜로 밝혔다. 관심 있는 작품은 달달 외우고 있었던 보르헤스는 망구엘이 책을 읽을 때면 머릿속 도서관에서 인상 깊은 문장을 꺼내 그의 읽기를 방해하곤 했다. 때론 책 읽고 있는 망구엘을 가로막고 나서 함께 논평도 하며 서재에서 많은 시간을 함께 보냈다.


책 한 권을 소유하는 행위에 잠재적으로 담겨 있는 것은 앞서 그 책을 읽었던 사람들의 독서의 역사이다. 말하자면 새롭게 책을 읽으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보다 앞서 그 책을 읽었던 사람들에게 그 책은 어떤 존재였을까 상상하는데, 바로 그런 상상에서도 독서가는 어떤 영향을 받는다는 뜻이다.

― 책 《독서의 역사》 p.30


아르헨티나 작가 에세키엘 마르티네스 에스트라다(이하 에스트라다)는 "책을 읽으면서 그전에 다른 책을 읽었을 때를 회상하고 서로 비교하면서 그때의 감정을 불러내는 사람들도 있다"라고 이야기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보르헤스의 '책 읽어주는 남자'였던 망구엘은 그와 함께 몇 년간 독서를 하면서 읽은 내용은 그전까지 읽었던 것들 위에 덧쌓인다는 사실을 재빨리 깨달았다. 에스트라다는 덧붙여서 "이런 독서야 말로 가장 세련된 형태의 간통이다"라는 아주 멋진 말을 남겼다. (간통 독서라니 크!)


열여섯 살의 망구엘의 독서는 이전까지 편협하고 선입견에 사로잡혀 있었지만 보르헤스가 권장하는 이러한 간통 같은 독서를 통해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기록물인 염소나 양의 숫자가 새겨진 두 개의 진흙 조각에서부터 현대의 전자도서에 이르기까지 2400년이 넘는 독서의 역사를 소개하는 책 《독서의 역사》를 쓰게 된 계기가 되었다. 


"THE READER AND THE CIGAR MAKERS"(1963), Mario Sanchez


그림은 배우지 않아도 누구나 감상할 수 있지만, 글은 달랐다. 인쇄술이 발달하지 않고, 문맹률이 높았던 불과 100년 전까지만 해도 망구엘이 보르헤스에게 읽어줬듯이, 사람들에게 책을 읽어주던 '독사'라는 직업이 있었다. 독사는 노동자일하는 동안 책을 읽어줬다. 물론 책은 근로자들이 미리 결정했으며 그 장르도 정치 논문과 역사물에서 현대 및 고전 소설에 이르기까지 실로 다양했다. 책 읽기는 지극히 조용한 분위기에서 이뤄졌으며 읽기가 끝날 때까지 어떠한 논평이나 질문도 허락되지 않았다.


노동자들은 반복적이고 지루한 작업을 하면서도 독사가 읽어주는 책의 내용을 귀담아 들었다. 별 볼 일 없는 현실과 달리 귀로 듣는 독서에서는 모험이 펼쳐지고, 곰곰이 생각해야 할 이념도 있었다. 그들은 그것들을 자기 것으로 소화시키느라 때론 깊은 사색에 파묻히곤 했다. 어쩌면 그들은 그때부터 마음속 깊숙이 간직했던 꿈을 떠올렸는지 모른다.   


독서 삼매경에 빠져 있는 어린 키케로는 커서 로마의 미래가 됩니다.


책 읽는 자세가 심상치 않다. 키케로는 어렸을 때부터 독서 삼매경에 푹 빠져있었다. 그가 책을 읽고 있으면 부모도 그를 방해할 수 없었다. 키케로는 텍스트를 단순히 듣기만 할 때보다 두 눈으로 볼 때 더 명확히 기억 속에 남는다는 사실을 강조하면서 "인간의 감각 중에서는 가장 예민한 것은 시각"이라고 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도 두 눈을 "세계로 들어가는 출입구"라고 극찬했으며 (후에는 저주했지만) 토마스 아퀴나스도 시력을 "지식을 획득하는 감각 중에서 가장 위대한 것"이라 말했다.


시청각 중복 장애를 뛰어 넘었던 헬렌 켈러와 하벤 길마


하지만 이런 축복을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었으니. 바로 너무나 유명한 헬렌 켈러와 하버드 법대 최초의 시청각장애인 졸업생인 하벤 길마였다. 보르헤스는 '시력'만 잃었지만, 헬렌 켈러와 하벤 길마는 '시력' 뿐만 아니라 '청각'까지 들리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장애를 이겨내고 뛰어난 과업을 달성했다. 헬렌 켈러는 5개 국어를 배웠으며 이후에 사회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으며, 하벤 길마는 자신과 비슷한 사람들의 미래에 장애가 걸림돌이 되지 않도록 인권 변호사로 종횡무진 활동하고 있다.  


망구엘이 쓴 책 《독서의 역사》를 읽으면서 과거의 '독서'는 누구에게나 주어진 자유가 아니라 소수 계층의 특권이었음을 다시 한번 깨닫는다. 하지만 지금은 누구나 읽을 수 있는 권리가 보장되는 사회에 살고 있으며, 멀쩡한 두 눈이 있고, 언제 어디서나 쉽게 책을 접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도 안 되는 핑계로 독서를 게을리하며 스마트폰만 만지작거리고 있는 나 같은 사람을 반성하게 만든다.


모든 사람은 자신의 역사가이다.
(Every Man is his own historian)
― 미국 정치학자 칼 베커


미국 정치학자 칼 베커는 모든 사람은 자신의 역사가라고 했다. 망구엘은 보르헤스를 만나고 본인의 독서의 역사는 시작되었다고 말한다. 매일 저녁 보르헤스가 사는 작은 아파트 6층 계단을 오르던 소년은 보르헤스에게 읽어줬던 책들의 작가처럼 위대한 작가가 되었다. 책 《독서의 역사》를 읽고 나니 내 독서의 역사는 어디쯤 와있을까? 문득 궁금해지는 밤이다. 


우리는 스스로의 역사를 기록해야할 의무가 있다. 



  

심지어 아키텐의 엘레아노르 왕비는 죽어서도 책을 읽고 있다.


Photo by Aaron Burden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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