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릿 속에서 영화를 상영해주는 '멋진 글'이 되려면
최근 몇 년간 수 십 권의 소설을 읽었지만, 여전히 기억 속에 강렬하게 남아있는 첫 문장을 가진 소설은 2권에 불과했다. 첫 번째 책은 알베르 카뮈가 쓴 《이방인》이었다.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인지도 모르겠다"로 시작하는 이방인의 첫 문장은 '다른 사람도 아니고, 엄마가 죽었는데? 뫼르소는 도대체 왜?'라는 궁금증으로 심상치 않아 보이는 이 책의 다음 내용이 궁금해지게 만들었고, 두 번째 책은 최은영 소설가의 《쇼코의 미소》였다.
이 책의 첫 문장을 읽으며 누군가는 얼마 전 여름휴가 때 다녀온 경포대 해수욕장을 떠올렸지만, 또 다른 누군가는 살면서 가장 외로웠던 순간을 떠올린다. 유튜브 시대에 여전히 글이 죽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었던 건, 읽으면서 저마다 다른 이미지를 그려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이미지는 과거에 본인이 경험한 삶의 형태와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소설 속에서 등장하는 '엄마'라는 단어에 어떤 사람은 자식들을 먹여 살리느라 항상 바빴던 엄마를 떠올리는 사람도 있지만, 또 다른 사람은 자식에게 의존적인 엄마의 모습을 떠올리기도 한다. 그래서 영상은 글보다 훨씬 많은 정보를 제공해주지만, 때론 과잉보다 여백이 우리에게 더 많은 것을 안겨다 준다.
잘 읽히는 글은 이미지를 제대로 그려낸다. 두 눈은 텍스트를 읽고 있지만, 머릿속에서는 저마다 다른 영화를 상영 중이다. 이국종 교수가 쓴 책 《골든아워》는 김훈 작가의 문체와 유독 많이 닮아 있는데, 이 책의 서문에서 이국종 교수는 늘 곁에 두고 살아온 김훈 작가의 글을 '모방'했다고 이야기했다.
"나는 훌륭한 말솜씨나 글재주와는 대척점에 선 전형적인 '이과 남자'다. 어떤 현란한 문장과 수사를 동원한다고 해도 생사의 경계를 헤매는 이들의 사투를 정확히 표현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내가 읽은 불과 얼마 안 되는 책들 중, 늘 곁에 두고 살아온 소설가 김훈 선생의 《칼의 노래》를 등뼈 삼아 글을 정리해보려 애썼다."
이국종 교수는 이어서 서문에 《칼의 노래》처럼 우리와, 우리가 겪어온 일들을 명확하게 기록하고 묵직하게 그려내고 싶었으나 능력 밖의 일이라고 썼다고 적었다. 하지만 그의 겸손함과는 달리 많은 독자들은 이 책이 '수술실의 난중일기' 같다고 표현했다.
책 《생각이 돈이 되는 순간》 에서 크리에이티브 제2법칙 모방 편에서 등장하는 커트 보니것은 대학 시절 읽었던 문학 작품 속 스토리텔링 방식에 매료되어서 논문을 쓸 때도 인기 있는 소설의 스토리를 그래프로 나타내는 연구를 했다. 그가 작성한 그래프의 수직 축(y축)에는 행운(긍정적 감정)과 불운(부정적인 감정)을 나타냈고, 수평 축(x축)에는 시간을 의미했다.
많은 대중들은 흔히 말하는 '신데렐라 공식'을 좋아한다. 주인공이 역경에 처해있다가 잠시 행복했다가, 다시 불행해지고, 정점에서 행복해지는 스토리는 일일 드라마의 전형적인 패턴이기도 하다. 대중에게 열광적인 인기를 누리는 웹소설 또한 이 패턴을 기반으로 한 작품들이 많다.
과거 몇 개의 글에서 나는 최은영 소설가의 책 《쇼코의 미소》를 좋아한다고 밝혔다. 7편의 단편 소설로 구성된 이 책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소설은 표제작인 《쇼코의 미소》, 《씬짜오, 씬짜오》, 《한지와 영주》였다. 그 소설들은 전형적인 '신데렐라 공식'을 따르지 않는다.
나는 신데렐라 공식을 좋아하지 않는다. 우연은 신이 내린 선물이라고 하지만, 신데렐라 공식 속에서 등장하는 대부분의 우연은 지극히 작위적이다. 재밌게 읽다가도(혹은 보다가도) 이질감이 느껴지는 순간 몰입도가 와장창 깨진다. 그 느낌을 썩 달갑게 여기지 않는다. 되려 《쇼코의 미소》처럼 급격한 변화 없이 담담하게 풀어내는 글이 좋다. 어쩌면 그 느낌이 어떤 사람들에게는 우울하게 다가올 수도 있지만 그 느낌에 우울함만 전부인 건 아니다. 오히려 사람들은 우울함 속에서 다른 의미를 찾아낸다. '행복'은 지금 여기에 집중하는 힘을 가지고 있지만, '우울'과 같은 감정은 지금 뿐만 아니라 과거와 미래의 여기저기를 다녀온다. 그래서 나는 《쇼코의 미소》를 읽으면서 받은 담담한 느낌을 꼭 내 것으로 만들어 글 쓸 때 적용해보고 싶었다.
책 《쇼코의 미소》를 신데렐라 이야기처럼 그래프로 그려본다면, 「쇼코의 미소」 「씬짜오 씬짜오」, 「한지와 영주」는 비슷한 패턴을 가질 것이다. 소설의 도입부에서는 행운 쪽으로 높았다가, 중반쯤에는 불행으로 치닫고, 끝에 다다라서는 x축의 언저리에서 행운 또는 불행으로 끝나는 패턴을 가진다. 이를 통해 과거에 좋아했던 작품들을 떠올려보면 나는 감정의 극과 극을 수시로 왔다 갔다 하는 이야기보다 몇 차례만 교차되는 이야기를 좋아했다.
최근 두 달간 몇 차례를 제외하고는 평일에 하루도 빠뜨리지 않고 책 《쇼코의 미소》를 필사했다. 어느덧 소설의 전체 페이지인 64페이지 중 30페이지를 넘어섰다. 작년에 이어 두 번째 필사다. 이번에 책 《생각이 돈이 되는 순간》을 읽기 전에도 최은영 소설가가 글을 쓸 때 주로 어떤 패턴을 쓰는지 대략적으로 알고 있지만, 이번에 그래프로 직접 그려보니 패턴이 좀 더 명확해졌다. 이제는 그녀의 문장과 패턴을 열심히 따라갈 일만 남았다.
강원국 작가는 필사와 암송이 최고의 글쓰기 노하우라고 했다. 나는 이 말에 깊이 공감한다. 닮고 싶은 작가가 있다면 어떻게 쓰는지 눈으로 빠르게 한 번 읽고, 그다음은 손으로 느리게 읽는다. 그렇게 두 번을 읽었으면 이제 주변에 그 내용을 열심히 떠들고 다니자. (나는 글로 이렇게 열심히 떠들고 있다.)
시중에 좋은 레퍼런스는 많다. 내 취향에 맞는 작가만 고르면 된다. 책을 읽으며 예전처럼 그냥 좋다에 그치지말고 유독 어떤 점이 크게 와닿았는지 파고들어서 분석해보고 내 글에 적용해보고 독자의 반응을 기다려보자. 좋은 문장은 눈이 아닌 내 손으로 훔쳐야 한다.
참고 도서
책 《쇼코의 미소》, 최은영
책 《생각이 돈이 되는 순간》, 앨런 가넷
책 《골든아워1》, 이국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