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팩트풀니스>를 읽고
2019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영화 <스타 이즈 본>으로 '주제가상'을 받은 레이디 가가가 기쁨의 눈물을 흘리고 있다. 그 옆에 울고 있는 레이디 가가를 위로하는 듯한 꼬마 아이는 아프가니스탄의 수도 카불에서 일어난 연쇄 폭탄 테러로 인해 이 날 아침 머리를 다쳤다. 어쩌면 살아남은 게 다행일지도 모른다. 사진에서는 보이지 않지만 아이 옆에 앉아 있는 엄마는 레이디 가가처럼 연신 눈물을 흘리고 있다. 아프가니스탄은 오늘날 전 세계에서 테러가 가장 많이 일어나는 나라 중 하나다. (약 열흘 전인 9월 5일에도 차량 폭탄 테러가 일어났다.)
아직 전쟁이 끝나지 않은 나라에 살고 있는 아이들은 '끝이 보이지 않는 전쟁'의 비용을 견뎌내야 한다. 아프가니스탄은 지금 이 시간에도 정부군과 탈레반 사이에서 치열한 전쟁을 펼치고 있다. 사진 속에 보이는 여자 아이는 어쩌다 한쪽 다리를 잃었을까? 스키를 타고 있는 오른쪽 남자아이와 대조되니 측은하기만 하다. 여자 아이는 어느 날 평소처럼 밖에서 놀다가 폭발하지 않은 박격포를 집에 들고 갔다. 집에 있던 이모도 그것이 무엇인지 잘 몰랐다. 잠시 후 열 명이 넘게 있던 집 안에서 박격포는 폭발했다. 세 명의 아이와 나이 든 친척은 그 자리에서 사망했고, 살아남은 일곱 명은 팔다리 중 하나를 잃어야만 했다. 여자 아이는 왼쪽 다리를 잃었지만 살아남았다. 어쩌면 살아남은 게 다행인 이 아이는 잃은 한쪽 발을 대신해 목발을 평생 짚고 살아가야 한다.
위 두 사진과 아래 아홉 장의 사진을 보고 당신은 어떤 감정이 드는가?
인스타그램에서 우연히 두 국가(대부분은 개발도상국과 선진국)의 모습을 묘하게 합성시켜놓은 사진을 게시하는 Uğur Gallenkuş의 게시물을 보고 생존에 위협을 받고 있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고 울컥했다. 이 글에는 몇 장의 사진만 올렸지만 인스타그램 (@ugurgallen)에 들어가면 비슷한 수 십장의 사진이 올라와있다. 사진만 보면 한쪽(개발도상국)은 생존 자체가 목표고, 다른 한쪽(선진국)은 삶을 편안히 즐기고 있는 것만 같다. 개발도상국과 선진국의 대비되는 사진을 통해 우리는 죄책감을 느끼는 동시에 활짝 웃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묘하게 이질감을 느낀다.
하지만 통계학 분야의 세계적인 석학이자 의사인 한스 로슬링은 위 사진처럼 이분법적인 모습은 과도하게 극적인 세계관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그런 세계관도 엄연히 현실 속에서 존재하지만, 그것이 그 나라의 전부인 양 생각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세상에 대해 잘못 생각하고, 추측하고, 학습할 때 끊임없이 그리고 직관적으로 자신의 세계관을 참고한다. 그래서 세계관이 잘못되면 체계적으로 잘못된 추측을 내놓는다. 한때 나는 과도하게 극적인 세계관이 낡은 지식 때문이라고 생각했지만, 최신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사람조차 세계를 오해하는 걸 보면 그 때문만은 아니다. 그리고 악마 같은 언론이나 선전 선동, 가짜 뉴스, 엉터리 사실 탓도 아니라고 확신한다.
― 책 《팩트풀니스》
인간의 뇌는 수백만 년간 끊임없는 진화를 거쳤다. 그 과정 동안 우리 몸에 밴 본능은 생존하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 인간의 뇌는 깊이 생각하지 않고 직관적으로 단정 지을 때가 많은데 단점만 있는 건 아니다. 수렵과 채집 생활을 이어가던 우리 조상들은 그 직관 덕분에 숲 속에 숨어 있는 맹수로부터 위험을 피하기도 했다.
그 유전자를 고스란히 물려받은 우리는 남이 하는 이야기와 극적인 이야기에 강한 흥미를 느낀다. 여전히 많은 사람들은 맵거나, 짜거나, 단 음식을 선호한다. 요즘 들어 의식적으로 건강식을 선호하는 사람도 늘고 있지만 여전히 맵고 짜고 단 음식은 인기 음식이다. 우리가 보는 뉴스도 크게 다르지 않다. 부정적이고 선정적이고 자극적이어야 우리의 시선을 끈다. 오늘 날씨는 맑다거나, 음주 사고가 한 건도 발생하지 않았다거나, 가계 부채가 역대 최저와 같은 긍정적이고 일반적이고 담백한 기사는 애초부터 화젯거리가 되지 않는다.
한스 로슬링은 아들 올라 로슬링, 며느리 안나 로슬링 뢰룬드와 함께 책 <팩트풀니스>를 썼다. 이 책에서는 10가지 본능을 통해 우리가 얼마나 세계를 잘못 이해하고 있는지 샅샅이 증거를 들이밀며 '팩트폭력'을 가한다. 특히 책의 초반부에 있는 '세계에 관한 문제' 13가지를 풀고 나면 누구나 충격을 받을 것이다. 침팬지는 찍어도 33%, 즉 4개는 맞춘다는데 나는 고작 2개를 맞췄다. (물론 나만 그랬던 건 아니다. 이 책을 읽고 나서 주변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퀴즈를 냈고 대부분이 1개에서 3개 정도 맞췄다.) '세계관'을 이해하는 수준이 나만 침팬지보다 못하다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우리 모두가 찍어서 4개는 맞추는 침팬지보다 못했다.
우리가 침팬지보다 못한 이유는 이 10가지 본능 때문이었다. 책에서는 왜 우리가 이 본능들에 이끌리는지 통계와 사례를 곁들여 자세히 설명한다.
간극 본능 - 두 종류의 국가, 두 부류의 사람으로 나누려는 본능
부정 본능 - 좋은 것보다 나쁜 것에 주목하는 본능
직선 본능 - 계속해서 지금처럼 증가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본능
공포 본능 - 주의를 사로잡는 극적인 사실에만 집중하는 본능
크기 본능 - 비율을 왜곡해 사실을 실제보다 부풀리는 본능
일반화 본능 - 끊임없이 범주화하고 일반화하는 본능
운명 본능 - 타고난 특성이 사람, 국가, 종교, 문화의 운명을 결정한다는 본능
단일 관점 본능 - 단일한 원인, 단일한 해결책을 선호하는 본능
비난 본능 - 왜 안 좋은 일이 일어났는지 명확하고 단순한 이유를 찾으려는 본능
다급함 본능 - '지금이 아니면 안 된다!'라고 성급하게 결정하려는 본능
대부분의 국가는 중산층에 위치해있지만 우리는 간극 본능에 이끌려 '개발도상국'과 '선진국'으로만 나누기 좋아하고, 자극적이고 선정적인 뉴스에 더 주목하고, 세계 인구는 언젠가 지구가 숨 쉬지 못할 수준까지 증가해서 포화 상태에 이를 것이라 생각한다. 이뿐인가 '미세먼지' 또는 '방사능' 공포에는 극도로 조심하면서 연간 사망률이 훨씬 높은 음주 운전은 그보다 과소평가한다. 일본 사람들은 모두 친절할 것이라 일반화하고, 이슬람 종교를 믿는 사람들은 다른 종교 또는 종교가 없는 사람들보다 훨씬 많은 아이를 낳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글의 초반부에는 '간극 본능'을 자극하는 사진을 걸었다. 아마 어떤 사람들은 잘 살고 있는 사람들(레이디 가가 또는 스키 타고 있는 남자아이)을 머릿속으로 비난했는지 모른다. 나라고 크게 다르지 않다. 우리는 부끄럽거나 죄책감을 느끼는 문제에 직면했을 때 그 이유를 쉽게 찾으려고 한다. 가장 좋은 건 이유가 적합한 사람을 찾아 한쪽으로 몰아서 비난하는 것이다. 보험을 가입하거나 헬스장을 등록하려고 가면 오늘이 가장 낮은 금액에 가장 좋은 혜택이라고 반드시 가입하라고 권유한다. 지금이 아니면 안 된다는 다급함 본능에 이끌려 덜컥 사인을 하고 '좋은 선택 하셨어요'라는 상대의 말을 듣고 뿌듯해하다가 다음 날 후회하기도 한다.
한스 로슬링은 책에서 말하는 10가지 본능을 물리치는 '사실 충실성'을 끊임없이 연습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예컨대 '간극 본능'은 두 국가, 두 사람으로 나눠보지 말고 그들을 포함하는 다수를 보고 판단하라는 식이다. 특히 개발도상국, 선진국으로만 나눠있는 기존의 분류법을 소득에 따라 1단계부터 4단계까지 나눠서 설명하는 방식은 책을 읽는 내내 이해가 쏙쏙 된다.
책 <팩트풀니스>는 올해 읽었던 책 중에 가장 좋았던 책 1~2위에 꼽힌다. (다른 책은 대니얼 카너먼 박사가 쓴 <생각에 관한 생각>이다.) 이 책은 분야, 취향, 취미 이런 걸 떠나서 누구나 꼭 읽어봐야 하는 책이다. 인간은 지극히 비합리적이기 때문에 그 사실부터 인지해야 한다. 여전히 본인이 합리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꼭 <생각에 관한 생각>을 읽어보길 바란다. 거의 100%에 가까운 '확실한 생각'도 언제든지 잘못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있어야한다. 본능에 이끌려 바로 판단하지말고 사실 기반의 데이터를 충분히 살펴보고 결정해도 결코 늦지 않다.
함께 보면 좋은 사이트
1. 갭마인더 재단에서 제공하는 도구 : https://www.gapminder.org/tools
2. 달러 스트릿(DOLLAR STREET) : https://www.gapminder.org/dollar-street/
참고 도서
책 <팩트풀니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