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번째 인터뷰이. 브랜드 마케터 윤성용
미국의 역사가 칼 베커 Carl Becker는 "모든 사람은 자신의 역사가"라고 했다. 인터뷰 매거진 《손으로 기록을 남기는 사람들》은 자신의 역사를 손으로 직접 기록하는 사람들을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본다. 네 번째 인터뷰이는 과거에는 브랜드 마케터로, 현재는 회사를 벗어난 삶을 꿈꾸고 있는 윤성용님을 만났다. 동작역 근처에 위치한 동작노을카페에서 만나 1시간가량 이야기를 나눴다.
안녕하세요. 저는 여행 IT 스타트업 <플레이윙즈> 브랜드마케터 4년차였고, 지금은 퇴사하고 다음 단계로 나아가기 전에 숨 고르기를 하고 있는 윤성용입니다. 브런치에 조르바 윤이라는 필명으로 글을 쓰고 있고, 매주 월요일마다 xyzorba라고 하는 뉴스레터 매거진을 보내주고 있습니다. 작년에 독립출판으로 책 <조르바, 여행은 어땠어요?>를 출간했습니다.
처음에는 막막했어요. 가장 막막했던 건 현재 디지털로 일정관리를 하고 있는데, 이걸 바인더와 같이 쓰려면 어떻게 써야 하지. 어떻게 역할을 분담해야 되지. 디지털로도 쓰고 바인더로도 써야 되나. 중복에 대한. 바인더의 쓸모에 대해서 정말 고민을 많이 했고. 제가 찾은 지점은 이거였어요. 피터 드러커의 책 <자기경영노트>를 보면 지식 근로자들은 시간을 기록하고 내가 어떤 것에 얼마큼의 시간을 써야 하는지 알아야 한다.라는 게 있었어요. 저는 노션으로 시간을 계획하긴 했거든요. 투두리스트도 작성하기도 했고. 실제로 그래서 오늘 내가 얼마큼의 시간을 언제부터 언제까지 썼지? 는 기록하지 않고 있더라고요. 아. 그러면 그걸 바인더로 시간을 관리해야겠다고 생각을 해서.
처음에는 계획을 바인더에다 하자고 생각했는데 실제로 여기에 계획을 쓰니까 실제랑 달라지더라고요. 나는 '3시부터 5시까지 이걸 해야지' 했는데, 3시부터 6시까지도 되고. 그러다 보니까 이건 개인용으로 쓰지 말고 시간이 지나고 나서 그 시간에 뭘 했는지에 대해 쓰자. 기록용으로. 한 타임이 끝날 때마다.
제 하루 루틴은 이거예요.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투두리스트를 작성해요. 노션에 적어둔 백로그(Backlog) 리스트에서 오늘 할 일을 선정하는 거죠. 투두리스트가 정해지면, 대략 언제 얼마큼의 시간을 사용할지 노션으로 계획해요. 그리고 그 활동이 하나씩 끝날 때마다 바인더 주간 계획표에 기록해요. 내가 계획한 대로 진행되었는지 확인하는 거죠. 혹시나 예상했던 시간보다 길어지면 거기에 대한 이유도 함께 바인더에 쓰고 있어요. (그렇게 해보니까 어때요?) 제가 생각보다 낭비한 시간이 많더라고요. 바인더 주간계획표에 쓰는 색깔을 세 가지로 나눴어요. 빨간색은 일상적으로 하는 것들. 잠자거나 유튜브를 보거나. 형광색은 수익 또는 일과 관련된 것이고 파란색은 자기계발 관련된 거예요. 색깔을 칠해보니까 넷플릭스나 유튜브에 쓰는 시간이 정말 많아요.
<브레이킹 데드>라고 하는 미드 아시나요? (들어본 적 있어요) 제가 이걸 한 번 봤다가. 이렇게 보시면 쭉 보고 새벽 네 시까지 보고 다섯 시간 자고 또 이걸 봐요. (부럽네요) 지금은 무직이라서 그런 건데 이렇게 되면 제가 하려고 했던 거는 다 미뤄지는 거죠. 제가 기록을 안 했으면 시간이 너무 빠르네라고 하고 끝났을 것 같은데.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많은 시간을 쓰고 있구나를 비주얼적으로 보여주잖아요. (불편하지는 않아요?) 불편하죠. 불편하고 자기비판적이 돼요. 그런데 사실 저는 그런 불편이 필요한 상태인 것 같아요. 성장하려면 불편한 상황을 마주할 수밖에 없고. 당장 고치지 않더라도 사실대로 인지하고 있는 거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당장 고치지 않더라도.
제가 이렇게 쓰니까 이렇게 놀면은 빨간 줄로 그어질 텐데 지금이라도 그만둬야겠다고 저도 모르게 의식을 하게 돼요. 바인더 주간 계획표에 아름다움을 위해서. 저의 뿌듯함을 위해서 (웃음) 만족 지연이라고 해야 하나. 시간을 기록하기 시작하니까 제가 지금 빠져있는 것도 쉽게 빠져나오게 하는 거 같아요. 특히 유튜브나 넷플릭스로부터요.
자유로움인 거 같아요. 왜냐면 디지털에서 쓰는 것들은 다 되게 제약이 많거든요. 예를 들면 저는 글을 쓰는 사람이니까 글에 대한 아이디어를 적다 보면 디지털 도구에는 대부분 한 줄에 하나를 쓸 수 있고 그 규칙을 벗어나기 불가능하잖아요.
그런데 얘(바인더)를 쓸 때는 아이데이션을 할 때 보면 정말 이런 식으로 막 쓰거든요. 이렇게도 써보고. 근데 얘랑 얘랑 묶이네. 묶어보기도 하고. 구조를 만들어보기도 하면서 아이디어가 발산되는 게 느껴져요. 이거를 디지털 도구인 워드로 치는 거랑 다른 차원으로 생각할 수 있게 돼요. 아이디어라는 게 발산되는 개념이잖아요. 그걸 정제되어 있는, 규제가 많은 디지털에서 하게 되면 제한이 많아요. 그래서 저는 아이데이션은 손으로 먼저 하고 여기서 정제된 것을 디지털에 담아요. (아날로그는 시작이고, 디지털은 끝이네요?) 네. 저는 그렇게 하고 있어요.
제가 필름 카메라를 되게 좋아해요. 어디든 여행 갈 때마다 일회용 필름 카메라를 들고 가요. 그러면 스물네 장 정도 롤이 나오고 그걸 항상 보관하는 타입인데 사실 되게 불편하거든요. 필름 카메라가. 디지털카메라는 찍어서 바로 볼 수 있거든요. '잘 나왔네', '이거 한 번 더 찍어야겠다' 그런데 필름 카메라는 그걸 알 수가 없어요. 나중에 여행에 돌아와서 현상을 맡기고 받아봐야 이거 잘 찍혔네. 안 찍혔네 알 수 있거든요. 굉장히 불편한데도 필름 카메라만의 매력이 있어요. 디지털카메라가 따라갈 수 없는 감성도 있고. 그런 점에서는 아날로그를 더 좋아하는 거 같아요.
그리고 편지도 좋아해요. 손편지를 좋아하기도 하고. 특히 이번에 독자를 책 보내주는 이벤트를 했는데. 한 분씩 한 분씩 손편지를 보냈어요. 그냥 제가 프린트해서 드릴 수도 있지만 손편지만의 매력이 있거든요. 그 매력이 뭐냐면 글씨를 잘 쓰는 편도 아닌데 거기 들어가는 정성. 제가 그거 쓰면서 불편했을 거잖아요. 편함을 추구한 게 아니고 불편함을 추구했고, 이 사람을 위해서 내가 짧은 시간에 끝낼 수 있는 거를 긴 시간을 투자한 거잖아요. 거기서 오는 진정성. 진심. 이런 게 있는 거 같아요. 저는 그런 게 낭만적이라고 생각하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비효율적이라고 생각해요. 낭비라고 생각하고. 그래서 제 글에서 아마 그런 분위기를 느끼지 않았을까. 저는 그런 것들을 되게 가치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주로 워크플로위에 적어둬요. 영감은 그냥 항상 갑자기 특정할 때는 없던 거 같아요. 자다가 깨서 쓸 때도 있고 혹은 밖에 나왔을 때 쓰는 것 같고. 가장 좋을 때는 임팩트 있는 사건이 있었을 때. 제가 엊그제 29cm * 브런치 스토어를 갔는데 브런치에서 가장 많은 태그가 여행이랑 사랑이라고 하더라고요. 왜 여행이랑 사랑인가 생각해보니까 인생에 있어서 가장 임팩트 있는 순간이라는 거예요. 그런 임팩트 있는 순간에 글을 쓰고 싶어 진다. 저도 공감을 많이 했거든요. 퇴사도 마찬가지예요. 보통 임팩트 있는 사건을 마주할 때 무조건 그 당시에 글로 빨리 남겨요. 퇴사하고 집에 오는 길 지하철에서 워크플로위에 퇴사에 관한 글을 썼어요. 왜냐면 시간이 조금만 지나도 그때 그 감정이 사라져서. 저는 그래서 주변에 항상 기록 도구가 있어야 하고. 수첩도 항상 들고 다녀요. 핸드폰을 쓸 수 없을 때는 바인더를 쓰거나 수첩 꺼내서 쓰거나.
제일 중요한 거는 나에게 솔직하게 쓰는 거. 나중에 공개할 때는 조금 다듬을 수 있겠지만 메모할 때만큼은 솔직한 감정을 쓰려고 하고요. 전부 다 적으려고 하지는 않고. 중요한 포인트만 적어서 나중에 기억해서 쓸 수 있도록 하는 거 같고.
이건 저만의 스타일인데 감정에 대해 쓰잖아요. 그 감정을 느낀 공간이랑 주변 환경을 세팅을 해요. 소설처럼. 나중에라도 제가 그 메모를 다시 봤을 때 감정만 적혀있으면 생생하게 회상이 안 되더라고요. 어떤 환경에서 어떤 말을 들었고, 어떤 감정이 들었고 손에 땀이 났다든지, 다리가 떨렸다든지 상세하게 적어두려고 해요. 그게 나중에 봐도 입체적으로 다시 그려져요. 제가 이런 스타일을 갖게 된 게 맨 처음에 글을 썼던 게 여행기라 더 그런 것 같아요. 여행이라는 게 진짜로 집에 오면 다 잊어버리거든요. 물론 사진이나 영상을 보는 것도 좋지만. 그걸로도 안 남는 뭔가가 있더라고요. (여행 갈 때는 뭘로 적었나) 에버노트로 주로 적었고. 사진기랑 영상 찍는 거. 그렇게 세 가지 다 번갈아가면서 했죠.
내년 목표가 회사에 안 다니면서. 회사에 의존하지 않으면서도 수익구조를 만들어내는 게 하나의 목표이기도 해요. 프로젝트로 말씀드리면 뉴스레터를 하고 있잖아요. 구독자들이 생각보다 많이 모였거든요. 구독자가 많아진 것도 좋은데 거기서 제 뉴스레터들이 조금씩 좋아하는 분들이 생겨나고 있고, 그리고 제가 느꼈던 게 구독자들이 작가와 팬 관계가 아니고, 저랑 되게 취향이 잘 맞는 사람들인 거예요. 그래서 이 사람들이랑 뭔가 다양한 활동들을 해보고 싶어요. 내년에는 오프라인 모임을 많이 시도해보고려고 하고요.
두 번째로는 이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콘텐츠는 어떤 것들이 있을지 생각해보고 다양한 콘텐츠들을 시도해볼 거 같아요. 지금은 영화랑 책, 인터뷰 콘텐츠를 생각하고 있고. 오프라인 모임은 글쓰기. 독서. 대화모임. 세 가지 정도로 생각하고 있어요. 운영할 때 저 혼자는 힘들 것 같고 같이 도와주실 수 있는 분들을 만드는 게 1월 목표예요. 동료들.
이번(2019년)에는 만다라트를 사용하지 않았지만, 골자는 비슷한 거 같아요. 내가 올해 무엇을 계획했었지? 무엇을 목표로 하고 있었지? 그러면 내가 올해 이룬 것은 뭐지? 하고 싶었는데 이루지 못한 건 뭐지?를 정리하고요. 못했으면 왜 못했는지 적고 그러면 내년에는 뭘 해야 하지? 딱 이 프레임인 거 같아요. 그리고 이 프레임으로 제대로 회고하려면 예전에 적어놓은 기록들을 보긴 해야 해요. 그래서 (회고하는) 비결은 그때그때 기록을 해놓았을 것. 그 기록을 다시 돌아볼 것.
본격적으로 기록한 지가 3년에서 4년 정도 됐어요. 이전에는 기록하지 않았는데 그때도 뭔가 많은 일들이 있었는데 비어있는 시간처럼 느껴져요. 기록한 이후에는 지난 시간들이 아무리 제가 넷플릭스를 보고 했던 시간들도 채워진 느낌이 들거든요. 그게 기록하는 이유가 아닌가 싶기도 해요.
기록을 안 하면 임팩트 있는 큰 거만 남거든요. 기록을 하면 작은 일상적인 소소한 것들도 남잖아요. 그래서 기록을 한다는 건 별거 아닌 일상들도 사랑하는 방식인 것 같아요. 그런 것들을 나중에 기억해주기 위한. 그런 일상도 사실은 좋고 행복하다. 그냥 보낸 시간이 아니라 의미 있던 시간이라는 것을 일깨워주지 않나 싶어요. 글 쓰는 것도 비슷하고. 제가 쓰는 게 뭔가 임팩트 있는 사건을 쓰는 것도 아니거든요. 반차를 써서 한강을 갔다. 기분이 울적해서 여행을 갔다. 그런 일상적인 순간을 사랑하는 방식인 거 같아요. (2019.12)
인터뷰이 : 윤성용(@zorba_you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