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 닥쳐오는 슬픈 일을 미리 알고 막아낼 수는 없다.
중요한 것은 그 슬픔을 어떻게 겪어내느냐에 있는 것이다.'
영화 <기생충>에서 폭우가 내린 장면에서 누군가 기택(송강호)네가 물에 잠긴 모습을 보고 아래 댓글을 남겼다고 생각해보자.
“그러니까 왜 그렇게 자꾸 침수되는 곳에 살지? 이사 갈 때 잘 알아보고 계약하지”
만약 내가 기택이라면 이 댓글이 욕설이 난무하는 그 어떤 악플보다 기분이 나쁠 것이다. 책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에서 트라우마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트라우마에 관한 한 우리는 주체가 아니라 대상에 불과하다" 그러니까 '나는 트라우마를···'이라는 문장은 애초에 성립될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오직 '트라우마는 나를···'이라고 겨우 쓸 수 있을 뿐이다.
지난여름, 강남과 같은 저지대에서도 반지하 빌라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비 자체가 트라우마다. 신형철 평론가의 문장처럼 그들에게는 비(때론 폭우)라고 불리는 주체에게 한낮 대상일 뿐이다. 그들이 주체가 될 수 있는 길은 현재의 주체가 다시 나를 찾아오기 전에 지금 살고 있는 장소를 벗어나는 방법뿐인데 현실은 녹록지 않다.
그러기에 침수되는 곳에 안 살면 되지 않냐고 묻는 댓글이 기분 나쁜 것이다. 거기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사람들의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나마 조언이랍시고 뒷붙인 말도 본인의 위치에서 말해줄 뿐이다.
몰랐다는 이유가 상대에게 해악을 끼칠 때 아래처럼 사과하는 경우가 많다.
‘이 정도일 줄은 몰랐어요. 죄송합니다’
몰랐으니 잘못을 면해달라는 말이다. 하지만 무지에서 오는 폭력도 폭력이다. 모른다는 것이 면피가 될 수 없다. 어떤 말은 모르기에 죄가 된다.
지난 토요일 저녁 이태원 현장에 있던 사람이 있다면 어떻게 위로해야 할까? 방법을 떠올려봤지만 도저히 지금의 생각으로는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 방법을 모르겠더라.
반면 비난하기는 너무나도 쉬웠다. SNS가 일상을 점유하면서 위로하기는 어렵지만 비난하기 참 쉬운 세상이 됐다. 비난하는 쪽은 지나가면서 한 마디 툭 던지지만, 비난받는 쪽은 그 모든 마디마디를 온전히 외롭게 짊어져야 한다.
나만 아니면 된다는 식의 행동은 슬픔에 빠진 사람을 더욱 외롭게 만든다. 배려 없는 세상이 곧 여유 없는 세상이라고 생각하는데 이번 사건을 두고 우리 사회는 여유가 참 없다 싶었다.
토요일 밤부터 현재까지 마음이 뒤숭숭한 까닭은 집에서 그 사건을 접하는 누구라도 피해자가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꼭 이태원이 아니더라도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스포츠 경기장, 출퇴근길의 지하철, 유명 가수의 공연장, 연휴 때 들른 관광 명소 등등 어디에서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을 일이었다.
이미 너무나도 많은 아이들이 떠났고, 남아있는 이들도 충분히 괴로워하고 있다. 누구 잘못인지 시시비비를 가리는 건 뒤로 하고 너무나도 많은 눈물을 흘려 더 이상 울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함께 슬퍼해줄 수 있는 사회가 되면 좋겠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인간에게 특정한 결함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가 바로 결함이라는 것. 그러므로 인간이 배울 만한 가장 소중한 것과 인간이 배우기 가장 어려운 것은 정확히 같다. 그것은 바로 타인의 슬픔이다. 이 역설을 인정할 때 나는 불편해지고 불우해진다.
- 책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신형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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