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전의 미학

배터리 방전에 대처하는 슬기로운 삶의 방식

by 신지훈

모처럼 아내와 함께 출근하려 이른 새벽에 집을 나섰던 날의 일이다. 12월 강추위가 이어지고 있던 참이었다. 차갑게 식은 시트에 앉을 때부터 쎄한 기분이 들더니 시동을 걸려고 키를 돌리자마자 영 시원찮은 시동감과 함께 대문자 두 단어가 화면에 떠올랐다 사라졌다. 중고로 산 지 햇수로 9년 만에 처음 보는 간담을 서늘케 하는 경고였다.


LOW BATTERY


0.5초나 됐을까. 짧은 순간 깊은 고뇌에 빠졌다. '배터리 방전이며 보험사 긴급출동을 불러야겠지? 얼마나 걸리려나. 10분 만에 올까? 안 되겠지? 충전하고 다시 출발하려면 너무 늦겠지? 아니다. 일단 그대로 두고 지하철 타고 가자고 할까? 아냐. 그냥 택시를 부르자. 택시 타고 가다 나 먼저 내리고….' 찰나의 순간에 여러 대안을 떠올리는 동안 현실과 머릿속 시간이 다르게 흐르고 있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평소 착한 일을 많이 했던 건가. 하늘이 도와 시원찮게나마 엔진이 돌아가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우리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지각을 끔찍이도 싫어하는 아내의 한숨이 나보다 세 배 정도 깊게 느껴졌다.


출근하는 동안 방금 전 엔진이 가동했음에 감사하며 회사 주차장에 도착하면 일단 블랙박스 주차모드부터 꺼야지 다짐했다. 하지만 몇 번의 좌회전과 우회전, 그리고 직진이 이어진 이후 어느새 순수상태 백지가 된 머릿속에서 그 결심은 사라졌고 해맑게 사무실에 올라왔다. 커피 한 잔과 함께 상쾌하게 하루를 시작하려는 찰나 뒷통수부터 허리까지 소름이 지나갔고 그 감각은 내 머릿속에 '배터리 끄고 왔냐'는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나는 그대로 주차장으로 내려가서 허둥지둥 블랙박스를 끄고 다시 올라왔다. 그 덕분에 다행히 퇴근은 무사히 했지만, 시동을 걸 때 그 찜찜한 느낌은 며칠 이어졌고, 떨어지는 기온과 함께 기력이 쇠해지고 있는 게 분명히 느껴졌다.


상황이 이 정도면 당장이라도 주말에 점검을 받으러 가는 것이 인간된 도리이지만, 나는 그런 뻔한 인간이 아니므로 그대로 몇 주를 버텼다. 운전을 하는 동안에는 '주말에 카센터 들러야지' 생각하고, 차에서 내리면 까먹기를 반복했다. 그리고 결국 어제 아침 회사를 하루 쉬는 김에 카센터에 들렀다. 겨울이면 점검이 필요한 브레이크와 타이어도 같이 확인해 달라고 했다. 잠시 후 카센터 사장님은 잔뜩 찌푸린 표정으로 사무실로 들어오며 내게 말했다.


"아니 배터리 말고, 브레이크 패드 빨리 교환하셔야겠네. 다 닳았어요."
"아, 그래요? 얼마인데요?"
"네 짝 다 해서 22만 원이요. 가는 비용까지 다 해서요."
"아, 네. 해주세요. 근데 혹시 정품인가요?"
"정품은 그 가격으론 택도 없죠. 부품도 없고. 근데 성능 차이 없으니까 알아서 해드릴게요."
"아, 네."
"타이어 공기압은 빵빵하고, 근데 배터리 이거요. 이거 충전 좀 하셔야겠네. 블랙박스가 주차할 때 돌아가서 배터리 다 잡아먹어요. 주차녹화 기능 끄시고."
"아니, 이거 긴급출동 불러서 교환한 지 1년밖에 안 된 건데 이렇게 빨리 방전되는 게 맞아요? 배터리 1년 만에 방전되면 A/S 해주나요?"
"난 모르죠. 사장님이 관리를 잘 하셔야 해. 암튼 지금 방법은 다른 거 없고 충전해가꼬 타면 돼요. 어디 고속도로 나가서 두어 시간 운전하고 오시던가, 아니면 주차장에서 3시간 정도 공회전 하시던가."
"2시간요? 고속도로요?"


그렇게 배터리 경고에 대한 해결방법을 들은 나는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카센터에만 오면 왜 이리 작아지는지... 아무리 오래 차를 운전해도 이 미지의 영역은 영원히 미스터리다. 사장님이 하라면 하고, 하지 말라면 하지 말아야지. 자동차 커뮤니티에 보면 DIY로 배터리는 기본이요, 타이어나 엔진오일 교체도 하는 사람들이 많던데, 그 사람들은 어떤 뇌구조를 가지고 있는 걸까. 아니면 단순한 도전정신 때문인 걸까.


전날 과음으로 빨리 점검을 끝내고 집에 가서 쉬고 싶던 내게는 매우 귀찮은 해결책이었지만, 번아웃이 찾아온 사람에게 '어디 가서 며칠 충전 좀 할 겸 쉬다가 오세요'라는 말처럼 들리기도 했다. 브레이크 패드를 교체하는 동안 2시간 동안 어디 갈지 고민했다.


'을왕리에 가서 바다도 좀 보고 해물칼국수나 한 그릇 먹고 올까. 강변북로를 타고 동쪽 끝까지 갔다가 올림픽대로 타고 다시 돌아올까. 아니, 강화도나 한번 갔다 올까?'


시덥잖은 고민을 하고 있자니 갑자기 웃음이 나왔고, 결국 내비게이션 목적지 입력창에 '파주 출판도시'를 찍고 있었다. 집에서 편도로 40-50분 거리니까 대충 한 바퀴 돌고 오면 딱 2시간 정도 걸리겠다 싶었다. 곧 내 차는 나와 함께 제2자유로를 달리고 있었다.


나는 제2자유로를 좋아한다. 제1자유로가 있는 것도 아닌데 굳이 제2자유로라고 이름 지은 이유는 간단하다. 자유로와 나란히 이어지는 길이기 때문이다. 제2자유로가 아니라 평화로든지 독립적인 이름이 있을 텐데 굳이 구태여 어떤 것의 제2... 부속의 느낌이 나는 이름으로 명명했을지 궁금했다. 나는 자유로, 아니 제2자유로를 좋아한다. 특히 파주를 향하는 방향을 좋아한다. 사실 돌아오는 방향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돌아올 때 풍경이 좋은데도 말이다.


파주 출판도시는 내게 특별한 곳이다. 몇 년 전 육아에세이를 준비할 때 자주 이곳에 와서 글을 썼다. 답답할 때마다 이곳에 와서 머리를 정리하곤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 책의 재고는 지금도 파주 출판도시 어느 물류창고에 쌓여 있다. 가끔 이상한 자부심이 든다. 내 글이 담긴 종이 뭉치들이 이 도시 어딘가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생각에.


차에서 내려 천천히 걸었다. 평일 오전이라 한산했다. 몇 년 전보다 카페들이 많이 생겼고, 젊은 사람들도 제법 보였다. (아마 출판사 직원분들이겠지) '책의 도시'라는 거창한 이름을 달고 있지만, 실제로는 대형 출판사들의 물류창고와 사무실이 대부분이다. 그래도 이곳에 오면 뭔가 글을 써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플라시보 효과 같은 건가.


한 출판사가 운영하는 전시장겸 카페에 앉아 아메리카노 한 잔을 시키고 창밖을 바라봤다. 겨울 햇살이 유리창을 통해 들어와 따스했다. 문득 배터리 이야기가 떠올랐다. 배터리는 꼭 방전이 되고 나서야 긴급출동을 부르고 교체하곤 했다. 분명 사인이 와 있었는데도 모르고 있다가 말이다. 시동이 약해지거나, 실내등이 어두워지거나, 경고등이 깜빡이거나. 그런 신호들을 무시하고 지내다가 결국 완전히 방전되어서야 부랴부랴 대처하는 패턴의 반복이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니 나 자신도 비슷하지 않나 싶었다. 몸이 피곤하다는 신호를 보내고, 마음이 지쳤다는 신호를 보내도 그냥 버티다가 결국 완전히 '방전'되어서야 휴가를 내거나 병원에 가곤 했다. 40대 후반이 되니 더욱 그런 것 같다. 젊을 때는 밤새워도 다음 날 괜찮았는데, 이제는 하루 무리하면 사흘을 끌고 간다.


회사 생활도 그렇다. 대기업이라는 거대한 시스템 속에서 나는 하나의 부품처럼 돌아간다. 가끔 내가 무엇을 위해 이렇게 살고 있나 싶을 때가 있다. 아내와 비슷하다. 우리는 서로를 '사이버러버(Cyber Lover)'라고 부른다. 직접 마주하는 시간보다 톡을 하는 시간이 더 많으니까. 맞벌이에, 서로의 일정에 치이다 보니 그렇게 되었다. 사랑하지만 각자의 생활에 치어 살고 있다고 보면 된다.


딸아이는 어느새 중학교 3학년이 되어 극한의 사춘기에 접어들었다. 예전에는 아빠와 함께 있는 걸 좋아하고 다정하게 웃어주거나 말해주는 게 많았는데, 이제는 혼자 있는 걸 더 좋아한다. 사춘기라면 당연한 수순이겠지만 서운한 건 어쩔 수 없다. 가끔 딸아이 방 앞을 지나갈 때면 문틈으로 새어 나오는 불빛을 보며 '저 안에서 내 딸이 어떤 생각을 하며 자라고 있을까' 궁금해진다.


이런 일상들이 나쁘다는 건 아니다. 다들 이렇게 살고 있고, 나름대로 행복하다. 하지만 가끔은 이렇게 멈춰 서서 생각해볼 필요가 있는 것 같다. 배터리가 완전히 방전되기 전에 미리 충전하듯이, 내 마음도 완전히 지치기 전에 미리 충전해야 하지 않을까.


파주 출판도시에서 보낸 한 시간은 그런 충전의 시간이었다. 특별한 일을 한 건 아니다. 그냥 카페에 앉아 커피를 마시고, 산책을 하고, 멍하니 하늘을 바라봤을 뿐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마치 방전된 배터리가 서서히 충전되는 것처럼, 내 마음도 조금씩 회복되는 느낌이었다.


돌아가는 길에 차 안에서 생각했다. 앞으로는 배터리가 방전되기 전에 미리 충전하자. 내 마음도 완전히 지치기 전에 이런 시간을 가져보자. 일주일에 한 번이라도, 아니 한 달에 한 번이라도 이렇게 혼자만의 시간을 가져보자. 그래, 이게 바로 '충전의 미학'이 아닐까.


신호등이 바뀌었다. 나는 액셀러레이터를 밟으며 집으로 향했다. 차 배터리도, 내 마음 배터리도 이제 충분히 충전되었다.


적어도 다음 방전까지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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