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딸의 남자

자네 누구인가

by 신지훈

내 딸의 남자


“제이한테 남친 생겼다네.”
“오 그래? 누군데?”


저녁을 먹던 중 아내가 던진 한 마디에 움찔하며 물었다. 중학교 3학년, 열다섯 살이면 충분히 누굴 좋아하는 마음이 생기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날 설레게 했던 <케빈은 열두 살>의 케빈이 위니에게 연정을 품은 나이도 고작 열두 살이었으며, 로미오와 줄리엣이 사네죽네 하던 나이가 열다섯 살이 채 안되었던 것에 비하면 오히려 늦었다고 볼 수 있다. <폭싹 속았수다>에서 애순과 관식도 따지고 보면 초등학교 때부터 썸을 탔으니 ‘너는 아직 어리니까 연애는 다음으로 미루자’ 라는 말에는 전혀 설득력이 없다. 제이의 마음을 흔든 녀석의 정체는 누구일까 궁금한 척을 했지만, 그보다도 왜 이런 소식을 직접 듣지 못하고 뒤늦게 알게 되는 걸까 싶은 마음에 아주 약간의 섭섭함과 배신감을 느꼈다. 아빠가 알면 반대라도 할 줄 알았나 봐?


그러던 어느 날. 제이의 휴대폰 필름을 교체해 주려고 아내가 휴대폰 케이스를 벗기는 순간 케이스 뒤에 ‘고이 모셔둔’ 사진 한 장이 나풀나풀 바닥으로 떨어졌다. 아내는 사진을 주워 들며 ‘오, 남친이야? 착하게 생겼네’라고 말했다. 제이는 순간 당황한 듯 얼버무리며 내게는 사진을 보여주지 않았다. 아빠도 좀 보여달라고 하니 잽싸게 방으로 자리를 피해버렸다. 여기서 한 번 더 기분이 상했다. 도대체 나만 왜 소외시키는 거야?


두 번의 서운함을 경험한 며칠 뒤 퇴근길이었다. 비가 보슬보슬 내리고 있었고, 제이 학원 끝나는 시간과 거의 맞아떨어져서 톡을 보냈다. 퇴근길에 같이 우산 쓰고 가는 애틋한 부녀를 상상하며…


‘제이야, 아빠랑 같이 들어갈까?’
‘언제?’
‘학원 끝나면. 아빠 퇴근하고 가는 길이야. 근처에 다 왔어.’
‘나 희선이랑 갈건데…’
‘아, 그래? 친구랑 올 거면 아빠는 먼저 갈게.’


맞다. 학원을 같이 다니는 친구가 있는데, 굳이 가서 혼선을 주면 안 되지. 나는 집으로 향했고, 집에 도착해서 마침 재활용 배출일이라 박스와 플라스틱, 비닐류를 잔뜩 거머쥐고 수거함에 버리러 내려갔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현관 입구로 향하는데, 저기 저쪽에서 익숙한 얼굴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 옆에는 전혀 익숙하지 않은 남자아이의 얼굴도 함께 다가오고 있었다. 나를 보자마자 당황했는지 그 둘은 손인사를 하고 재빨리 헤어졌다. 그 모습이 웃겨서 나 역시 자리에서 굳었다. 얼굴을 제대로 볼 시간도 없었다. 불현듯 지금 이 순간 녀석의 심정이 궁금했다. (당황했을까?) 재활용 쓰레기를 잠시 내려놓고 내게 다가오는 몇 미터동안 온갖 시나리오를 썼을 제이를 바라보며 말했다.


“희선이랑 같이 온다면서…”
“셋이 있었고, 희선이는 갔어.”
“아… 그거 너무 말이 안 되는데?”
“진짜야.”
“아무튼 먼저 올라가.”


그날 이후로 그 일에 대해서 나는 아무 말하지 않았다. 뻔한 거짓말 대해서도, 남자친구에 대해서도. 그냥 모른 척했다. 거짓말한 게 괘씸해서 혼내줘야 하나 싶다가도, 거짓말한 게 문제가 아니라 ‘남친’이라는 존재가 탐탁지 않은 것은 아닌가 싶었다. 설마 지금 나 질투하니?


그런데 며칠 뒤, 문제가 생겼다. 학원이 끝나고 한참이 지나도 딸이 오지 않았다. 보통은 끝나자마자 집에 오거나 적어도 연락을 하는데, 이날은 연락도 없었다. 한 시간 가까이 지나서야 딸이 집에 도착했다.


“제이 어디 갔다 왔어? 연락도 없이?"
"친구 만나고 왔어."
"어떤 친구?"
"그냥... 친구야."


딸의 시선이 흔들렸다.


"정확히 말해."
"...남자친구 만나고 왔어."
"밤늦은 시간에 연락도 없이 남자친구를 만나면 안 되는 거야!"
"그럼 언제 만나? 평일날 시간도 없고, 학교 갔다 오면 학원 바로 가야 하고… 시간이 어디 있어?"
“아니 뭐. 주말에 만나면 되지. 꼭 이 늦은 시간에 남친을 만나야 해? 너네 아직 중학생이야.”


원래는 연락 없이 늦게 온 것을 나무라려 했는데 대화는 방향은 엉뚱한 곳으로 향하고 있었다. 하지만 제이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평일에는 학교와 학원으로 스케줄이 꽉 차있다. 언제 친구를 만나고, 언제 자신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을까. 내가 중학생이었을 때보다 훨씬 더 빠듯한 일정 속에서 살고 있는 이 아이에게 '아직 중학생'이라는 말이 과연 의미가 있을까.


"그냥... 다음부터는 연락을 꼭 먼저 하고 다녀."


결국 그렇게 말하고 말았다. 제이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뭔가 석연치 않은 표정이었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날 밤, 굳게 닫힌 제이의 방문을 보며 나는 오랫동안 생각했다. 언제부터인가 이 아이는 내가 보호해야 할 '어린 딸'이 아니라, 자신의 판단으로 선택하고 행동할 수 있는 한 사람이 되어가고 있었다. 지금은 서툴러도, 그렇게 변화하려 꿈틀대고 있었구나.


제이와 논쟁 아닌 논쟁을 한 뒤에 여러 가지 생각이 스쳤다. 누굴 만나고 말고는 이 아이의 자유이기도 하고, 부모를 속이려 들면 얼마든지 할 수 있다는 생각까지. 차라리 당당하고 솔직하게 남친과의 교제를 밝히는 편이 낫겠다 싶은 생각까지…. 여전히 걱정은 된다. 하지만 그 걱정의 성격이 달라졌다. 무조건 안 된다고 말하기보다 잘 해낼 수 있기를 바라는 걱정으로.


아버지로서 가장 어려운 일은 아이를 놓아주는 것이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일 역시 아이를 놓아주는 것이다. 제이의 남자친구 얼굴은 아직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까지 보지 못했지만, 언젠가는 당당하게 인사를 나누는 날이 올 것이다. 그때까지 나는 기다려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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