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조주의보

피부도 감정도...

by 신지훈

깊어가는 가을과 겨울의 경계, 11월.


내가 제일 좋아하는 이 계절이 되면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세상에서 가장 건조한 남자가 된다. 세수하고 나면 물기를 닦자마자 바로 얼굴이 땅기고, 바디로션을 아무리 발라도 순식간에 몸이 근질근질하다. 다리며 허벅지며 피부 발진이 하루 걸러 올라온다. 입술은 또 어떠한가. 초등학생처럼 입가가 트는 건 기본이고, 쉽게 갈라지고 터버리는 입술 덕분에 립밤을 항상 주머니에 넣고 다닌다. 화장품 CF에서 '보습이 중요하다'고 말하는 걸 코웃음 치며 귓등으로 흘려들었던 벌을 이제 받는 걸까. 한 살 한 살 나이 들수록 건조함은 계속 하한가를 기록하고 있다. (이 문장을 쓰면서도 가려운 오른쪽 옆구리와 뒤통수를 사정없이 긁어대고 있는 중이다.)


나이가 들면 피지선 활동이 줄고, 피부 장벽을 만드는 성분들도 감소해서 수분을 잡아두기 어려워진다고 한다. 특히 남자의 경우 남성호르몬이 줄어들면서(=나이 들면서) 피지 분비가 급격히 떨어진다고 하니, 내가 겪는 고통이 그리 이상하고 특별한 일은 아닐 수도 있겠다. 과학적으로 보면 피부가 건조해지는 건 당연한 변화일 것이다. 나이 오십이 되었는데 피부에서 물광이 나는 사람은 신의 축복을 받았거나, 엄청난 노력의 결과이다. 노력하지 않으면 건조함의 속도는 급속도로 빨라진다.


기온이 떨어지면 공기가 품을 수 있는 수분량이 줄어든다. 샤워 후에 찬물로 욕실을 청소하면 습기가 금세 사라지는 것과 같은 이치다. 그래서 겨울 공기는 태생적으로 건조함을 유발할 수밖에 없다. 여기에 난방까지 하게 되면 그나마 남아 있던 수분도 다 헌납한다. 겨울철 피부 수분 손실량이 여름보다 30% 가까이 늘어난다는 얘기가 있는데, 내 경우에는 80% 이상 같다. 아침에 양말을 신는데 발뒤꿈치 굳은살에 걸리는 느낌으로 그날 습도를 대략 예측할 수 있을 정도다.


건조함과 더불어서 나를 가장 괴롭히는 건 바로 정전기다. 문고리를 잡을 때, 차 문을 열 때, 제이 패딩을 잡아줄 때도 '찌릿!'하고 스파크가 튄다. 가끔은 불꽃도 본다. (정전기로 불이 난다는 말을 괜히 하는 게 아니다.) 내가 기억을 못 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젊을 때는 이런 일이 별로 없었던 것 같다. 요즘은 이 작은 번개가 "너 지금 심하게 건조해"라는 몸의 경고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요즘은 엘리베이터 버튼 누르기 전에 괜히 손바닥으로 한번 툭 치고 누르는 습관도 생겼다. 나만의 생존 전략이다.


요즘은 피부만 그런 게 아니라, 내 감정도 지속적으로 건조해지는 것을 체감하고 있다. 일단 피부의 건조함처럼 감정의 역치가 높아졌다. 30대까지는 작은 일에도 쉽게 기뻐했고, 사소한 시도에도 흥이 났다. 이제는 그런 반응을 의식적으로 찾아야 한다. 우울하거나 괴로운 것은 아니지만, 예전 같지 않음을 알고 있다. 감정이 '메마른다'는 말이 괜히 생긴 게 아닌 것 같다. 나는 매일 조금씩 메말라가고 있음을 알고 있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가 "요즘 왜 이렇게 까칠해 보여?"라고 묻는데, 사실 까칠한 게 아니라 그냥 건조한 것이라고 해명하고 싶었지만 설명할 방법이 없어 웃어넘겼다.


반면, 건조함에 따라붙는 정전기처럼, 나는 요즘 전보다 예민해지고 작은 자극에도 괜히 신경이 곤두설 때가 있다. 건조하려면 예민하지나 말지, 작은 스파크에 쉽게 분노한다. 상대방이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닌데 마음속에서 스파크가 튕기는 기분. 회사에서 큰 프로젝트를 마무리했을 때는 담담했는데, 협업한 사람이 메일을 (문제가 되지 않는데도) 약속한 일정보다 늦게 보냈을 때는 화가 치밀었다. 중요한 것과 사소한 것에 대한 반응이 뒤바뀐 것 같다. 그럴 때마다 혼란스럽다. 이게 진짜 감정 문제인지, 계절 변화 때문인지… 요즘은 내 행동을 스스로 의심하는 일이 늘었다. 건조함이 내 성격마저 바꾸는 것 같아서다.


"내가 변한 걸까, 아니면 그냥 나이가 들어가는 걸까."


감정적으로 메말라가지 않기 위해서 나는 글을 쓴다. 누가 읽어주지 않아도, 잘 쓰지 못해도, 그럴싸한 이야기가 없어도 매주 글을 쓴다. 메마른 얼굴에 보습 로션을 바르듯이, 말라버린 화분에 물을 주듯. 그리고 이 작은 규칙이 적어도 아직은 뿌리까지 말라버리지 않게 나를 붙잡아 주고 있음을 알고 있다. 조금이라도 촉촉하도록 이 루틴을 절대 깨지 않겠다고 다짐해 본다.


건조주의보는 당분간 계속될 것 같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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