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도와 우울의 차이에 대한 고찰
*조금의 스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프로이트에게 애도란 '보내주는 행위'였다. 그의 정신분석학적 의무는 사회적 질서에 알맞지 않은 이들을 순화시키고 제거하는 것이었기에 개인들이 슬픔에 지속적으로 빠져 있는 것은 곤란했다. 따라서 그에게 바람직한 슬픔의 방식은 애도여야 했다. 애도하는 자들은 어떠한 부재를 충분히 슬퍼하다가 그것에서 벗어난다.
슬픔에서 벗어난 인간들은 곧 다시 현실로 돌아와 그들의 삶을 영위할 수 있다. 이제 부재는 그들에게 영향을 미칠 수 없고, 그들은 정상적인 삶을 이어간다. 바로 이 지점에서 애도는 정신분석학의 범주에 속하게 되는데, 프로이트가 인간의 정신을 분석한 이유는 사회를 정화하고 '잘 사회화된 인간'을 만드는 데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슬픔은 지속되어서는 안 되고, 충분히 애도한 후 보내주어야 하는 대상이 된다.
너무나 깊은 슬픔에 빠졌을 때, 인간은 헤어 나올 수 없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우울이라 부른다. 우울에 빠진 인간은 슬픔을 애도로 소비하지 않는다. 그들은 대상의 부재를 자신의 일부로 만든다. 그들은 상실을 떠나보내지 못하고 그것을 내면화한다. 정신분석학적 입장에서 이들은 제거해야 할 대상이다. 누군가는 치료하려 하지만 치료되지 않는 인간들, 그래서 체제 전복적인, 다시 말해 우울에 빠진 인간들 말이다.
여기 끝도 없이 우울한 인간이 있다. 카카오 TV '도시남녀의 사랑법'의 이은오가 그 주인공이다.
은오는 하루아침에 날벼락을 맞는다. 그녀는 결혼을 약속했던 남자 친구의 바람을 목격한다. 설상가상으로 어렵사리 얻었던 일자리는 입사도 전에 취소된다.
"평범해서."
모든 것의 이유였다.
은오의 자리는 '윤선아'라는 인물에게 돌아간다. 염색한 머리, 문신, 캐주얼 정장을 입고 면접장에서 노래를 흥얼거리던 시종일관 당당하던 그녀. 은오와 달리 선아는 겁도 없고 찌질하지도 않다. 한 순간에 은오는 너무 많은 것을 상실한다.
상실 투성이 인간
결혼, 일자리, 그리고 본래 부재하던 자신감과 당당함. 은오는 상실 투성이 인간이 된다. 프로이트가 그녀를 봤다면 그녀가 그 상실을 애도하도록 유도했을 것이다. '충분한 애도 후 일상으로 돌아오라.' 그것이 프로이트의 주문이다. 그러나 프로이트는 세상에 없고 은오는 애도하지 않는다. 대신 은오는 우울한 인간이 된다. 그녀는 자신의 모든 상실을 적극적으로 자신의 일부로 만든다. 도망가듯 양양에 간 은오는, '윤선아'가 된다. 상실의 대상과 자신을 동일시한다.
그런데, 부재의 대상을 자신으로 만든 은오에게 마법 같은 일들이 벌어진다. 상실을 내면화한 은오는 더 이상 찌질이도, 겁쟁이도 아니다. '윤선아'가 된 은오는 자신감 넘치고, 당당하고, 반짝반짝 빛난다. 적당히 슬퍼하고 일상으로 돌아오는 애도를 거부한 은오는 분명 우울한 인간이다. 그러나 상실을 본인의 것으로 만들고 그것과 함께 살기로 결정한 순간, 은오의 치유 또한 시작된다.
"이 여자는 도대체 어떤 여자일까?"
은오는 프로이트의 '애도하는 인간'처럼 적당히 슬퍼하지 않았다. 그녀는 슬픔을 보내주려 하지 않고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윤선아'가 된 은오는 마침내 본인의 슬픔을 바라봤을 것이다. 그것을 '나의 것'으로 만들며 그녀는 슬픔을 어루만졌을 것이다. 양양에서의 꿈같던 시간이 지난 후, 은오는 비로소 본인의 슬픔과 함께 살 수 있게 된다.
그래서 지금의 이은오는 예전의 '착한 은오'도 '멋진 윤선아'도 아니다. 다만 본인의 슬픔을 어루만질 줄 아는 '현재의 은오'다. 은오는 분명히 우울했고 지금도 우울을 가슴에 품고 산다. 하지만 그것을 품고 살기로, 그냥 보내버리지 않기로, 그것 또한 내 것이라 안고 가기로 결심한 은오에겐 '윤선아'의 그것처럼 반짝반짝 빛이 난다.
그러니까 은오야, 괜찮아. 다 괜찮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