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하루 중 작은 호의가 있었다.
호의를 굳이 베풀었다고 표현하는건 민망하다.
그러나 다른 누군가, 이 호의는 필요없다고 여길 누군가도 있었을 것이다.
오늘 불가능해보였던 한걸음이 가능했던건, 늘 그렇듯, 각 단계에 걸쳐있는 사람 하나하나의 결심 덕분이다.
우리는 'CASE'을 다루는 일을 하는데, CASE는 생각보다 많은 단계를 거친다. 오류를 줄이기 위한 시스템이다.
1단계 기관에서 서류를 넘기면 2단계 기관의 검토를 거쳐 3단계 기관에서 최종 심사를 거친다.
난 2단계 기관에서 일을 하는데, 기관내에서 거쳐야 하는 단계도 복잡하다. 거기다 3단계 기관은 외부사람까지 불러 질문하고 확인하는 절차를 거치니 거기서도 시간이 꽤 소요된다.
내가 만난건 6.25. 일요일까지 이 CASE를 끝내야만 하는 유능하고 순박한 1단계 관리자였다.
그는 지난주 서류를 보내고 계속 전화를 했다. 방대한 서류를 읽지도 못했는데 전화가 계속 왔다. 직원들이 돌아가며 전화를 한번씩 받고나자 이제는 모두 나를 쳐다보았다. 내가 전화를 받을 시점이 되었다는 무언의 압박이다.
난 금요일에 그와 긴 시간 통화를 했다. CASE에서 보완되어야할 부분을 알려주며, 이 부분만 해결되면 바로 다음 기관에 넘길 것이라고 말했다. 고생이 많다는 점도 빼놓지 않았다. 서류만으로 의사소통을 하는 우리는 서로가 얼마나 힘들고 고생하는지를 잘 안다.
전화의 위력은 심히 강력했고 그 관리자는 주말동안 서류를 고치고 정리도 다시 해서 이번주가 시작하자마자 날 찾아왔다.
난 계획대로 2단계 기관 내부 검토와 보고에 돌입했다.
이 일에 왜 데드라인이 있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다만 이 CASE는 오늘자로 3단계 기관에 접수되어야했다. 그 관리자는 오늘의 일과시간이 끝나가자 더 잦은 간격으로 전화를 했다. 난 그 전화를 4번에 1번 정도 직접 받았다.
2단계기관의 내부 승인이 길어지는건 CASE의 무게, 중요도 때문이었다. 그 관리자의 치밀함과 유능함 때문에 검토시간이 길어진 것이니 아이러니하다고 보아야 하나.
18:01 그 관리자의 전화를 받아, 오늘 3단계로 넘기긴 사실상 어렵다고 했다. 그는 말을 잇지 못했다.
전화를 끊은 나도 자리를 정리하지 못했다.
미안했다. 속상하고 마음이 아팠다.
18:19 일과시간 후인데 본사에서 승인이 났다. 본사 담당자가 평소답지 않은 나의 전화를 받고 급한 보고를 결심했다.
18:21 부장실로 갔다. 부장님의 전화소리가 들렸다. 그가 남아있다.
.
.
1분, 아니 30초 정도 부장실 앞에 있었다. 이 시각, 근무시간 이후 지점에서 CASE를 넘기는게 너무 많은 사람에게 불편이 아닐까 고민했다.
그때.
"뭐하세요?"
예전에 같은 팀에 있던 P가 지나가다 말을 걸었다. 난 잠시 머뭇거리다 물었다.
"고민..중이예요"
P는 종종 내게 '너무 친절하지 말고, 매몰차기도 하라'고 조언하던 팀원이었다.
"뭘 고민하시는데요?"
"지금 꼭 CASE를 넘기고 싶은데.. 넘어가는게 물리적으로 가능한가요?"
그녀는 잠시 생각했다.
CASE를 넘기는 일은 1단계 기관과 연결되는 일임을 우리 회사 모두가 안다. 그리고 그런 연결고리 회사가 늘 그렇듯. 두 회사는 통상 사이가 안좋을 때가 많다.
그녀는 날 다시 쳐다보았다.
"가능은 해요. 도와드릴게요, 부장님 설득하고 오세요"
18:22 부장실에 들어가, 오늘 CASE를 넘기자고 했다. 부장님은 왜, 오늘이냐고 물어보았으나 '오늘 3단계 기관에 접수를 해야 후회가 없겠다'는 내 말을 듣고 결심을 했다.
지점장님까지 있어야하는 결재 라인을 전화 두통으로 해결해주었다. 넘어갈 때까지 자리에 앉아있겠단 약조를 해주었다.
18:26 3단계로 넘어가는 서류를 추가로 출력하는 등 준비에 돌입했다. P는 당직인 팀원까지 불러내 순식간에 준비를 마쳤다.
18:35 부장실에 CASE가 들어갔다.
18:45 3단계 기관으로 넘기는 절차 담당자(P의 친구이다. P가 그새 전화로 붙잡아두었다)가 CASE를 인계받았다.
18:55 사무실로 돌아왔다.
19:00 고민하다가 1단계 관리자에게 전화를 했다.
"3단계에서 검토가 빠르면 좋겠네요. 우리랑 그쪽이 할 일은 다 했으니 오늘은 좀 쉬시지요."
그는 한참 말을 잇지 못했다.
2단계 담당자 중 매몰찬 사람도 적잖이 만났을 년차였다.
왜 여기서 오늘 호의가 있었는지 궁금한 눈치였다.
그러나 우린 별 말없이 그냥 3단계 심사가, 통상의 경우처럼 평일 이틀만에 마쳐지면 좋겠다는 말을 중얼 거리며 통화를 마쳤다.
나는.
아주 순수한 마음일 때 회사가 즐겁다.
이 일은 내버려둬선 안되는 일이었을 때 그 일을 빨리 해내었을 때 즐겁다.
고마운 사람에게 고마움을 표현할 때 즐겁다.
다소 불편함을 감수하고 도울일이 있을 때 도움이 되면 즐겁다.
내 결심이 외롭지 않고 같이해준다는 사람이 있을때, 뿌듯하고 즐겁다.
퇴근길, 부장실과 각 담당자를 찾아 뛰어다니던 땀은 그새 식었다.
땀은 비슷하네.
출근길의 땀도 식었는데, 뛰었던 지하철 통로와 가파른 언덕길은 나의 심장과 다리 근육 어딘가로 변형되어 자리를 잡았을 것이다.
퇴근 전 흘린 땀은, CASE에 조금 묻은채 이제 3단계 기관으로 넘어갔을 것이다.
참 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