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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봉주연 Oct 30. 2024

내일부터 장마 시작

  애오개를 지나요. 이젠 밤에도 바람이 불지 않는 저녁이네요. 새우젓을 좀 사다 줄래요. 애호박볶음에도 계란찜에도 들어가는 짠맛. 생生과 관련된 건 모두 비릿한 냄새가 나요. 버스에 내리는 길에 벌써 물웅덩이를 밟은 것 같습니다. 며칠 전에 지진이 난 걸 느꼈어요. 바닷가에 산다면 다 흩어진 집을 떠나지 않을 자신이 있나요. 집은 떠나야겠단 생각을 하는 순간부터 낡아갑니다. 아침에 일어나 방을 돌며 커튼을 걷고 창밖을 내다봐요. 이곳에 살았던 게 맞을까, 머물렀던 게 맞을까. 그러면 모든 계절을 좋아할 수 있게 됩니다.       


  기원에 관한 이야기는 항상 놀라운 구석이 있어요. 진실이라기엔 너무 아름다워요. 멀리 산을 보면 푸른 하늘과 흰 구름이 보이는데, 산을 오르는 길엔 하늘은 더 이상 푸르지 않고. 선명한 구름은 어디로 간 걸까요. 한때 가능했던 미래를 기억해 봐요. 겁을 들킨 사람을 애정하게 되는 건지, 애정을 준 사람에게 나의 겁을 들키게 되는 건지 알 수 없어요. 우리는 서로의 기억이에요.       


  이삿날이면 텅 빈 방에 남아서 아무도 모르는 곳에 내 이름을 적고 나왔어요. 너무 반듯한 도시에 가면 마음이 불안해. 해가 지면 몸을 숨길 곳이 있는 골목과 아침을 숨차게 만드는 오르막. 자동차 밑에서 고양이가 튀어나와요. 내 다리가 엄마의 가랑이 사이로 말려들어 가요. 가위바위보로 자기편을 정하는 아이들. 아무리 더워도 목 끝까지 추켜 올렸던 목화솜이불. 옆을 돌아보지 못했던 첫사랑. 같이 가줄게, 같이 갈 수 있는 곳까지만. 배웅하는 유월의 저녁……. 이 이름들이 다 사라져도 내가 나일까요?      


  한동안 아무것도 잃어버리지 않았어요. 

  내일은 우산을 두고 나올 생각입니다. 

  장마가 끝나면 나는 이 집에 없을 거예요. 

  그래서 당신을 사랑하는 걸 자제하고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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