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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봉님이 Jul 22. 2024

영수증과 티켓을 모으는 자잘한 기록

  기록하기를 좋아하고, 의미를 두는 사람들은 예쁘거나 의미가 담긴 물건을 잘 버리지 못하는 습성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나도 예외는 아니여서, 아예 ‘스크랩 노트’라고 이름붙인 수첩을 여러 권 가지고 있다. 주로 여행이나 전시회를 다녀와서 모아둔 티켓, 특별한 사람과 갔던 음식점의 영수증, 쇼핑한 상품의 태그 등을 모아두는데, 모으고 붙이는 재미도 크고 추억을 곱씹는 기쁨도 커서 틈틈이 펼쳐보곤 한다.


  재작년. 그러니까 남편이 죽기 바로 직전 해에 남편은 평소와 달리 젊은 친구들이 주로 신는 스니커즈를 사고 싶다고 했다. 나이 50이 넘어서 무슨 스니커즈일까 싶기도 했지만, 평소 사고 싶은 것이 많지 않았던 남편의 바램이라 선물이라 생각하며 함께 신발을 사러 나섰다. 카메라로 유명한 곳이라고만 알고 있었던 회사에서 운동화도 팔고 있었다. 내가 보기에도 예뻤지만 가격은 좀 부담스러운 그런 운동화였는데, 역시나 남편은 한참을 망설이기만 했다. 그런 남편을 설득해 신발을 사서 집으로 돌아왔다. 결국 남편은 그 신발을 몇 번 신지 못했고, 남편의 신발 중에 가장 예쁜 유품이 되어버렸지만, 그 때 신발을 산 것은 정말 잘한 것이었다고 생각하고 있다.

남편 신발의 가격 태그

  신발에 붙어있던 상표와 신발크기가 적힌 태그가 예뻐 따로 모아 두었었나 보다. 작년에 책상을 정리하다가 그 날 간직했던 신발태그를 보게 되었다. 남편의 신발사이즈는 260mm. 아, 그랬지. 남편의 발 크기는 26cm였지. 남자치고는 발폭이 좁아 나와는 달리 폭이 좁은 신발도 잘 어울렸었지. 그러고보니, 손도 얼굴도 갸름했었어. 남편의 발사이즈를 다시 떠올리던 날. 사진으로는 기억하지 못했을 남편의 신발 사이즈를 떠올리니 그 날의 기억이 생생하게 다가오는 것만 같다.


  첫째가 5월에 수학여행을 가는 날. 작은 실랑이가 있었다. 집에는 낡은 캐리어가 있었는데, 나는 내심 그걸 첫째가 사용해 주길 바랬다. 한 번 가는 여행이었고, 또 언제 우리가 여행을 갈지도 모르는 일인데, 굳이 새 여행가방을 사야 할 이유를 느끼지 못했다. 가정의 달이여서 그랬나. 그 달에는 유난히 돈에 쪼들리기도 했던 것 같다. 하지만 딸은 쨍한 청록색의 여행 캐리어가 촌스러워 싫다고 했다. 내 눈에는 여전히 무난하기만 해 보이는 여행 캐리어 어디가 촌스럽다는 것인지 모를 일이었다. 남편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곤란한 일이 생길 때면 한 번 씩 떠올린다. 딸바보인 남편은 당연히 사 주었겠지. 이미 마음이 토라진 사춘기 딸은 물러설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그래 사 주자.


  그 날 저녁에 딸과 함께 마트에 가서 여행가방을 샀다. 10~20만원은 족히 할 거라 생각했던 여행 캐리어는 39,000원 밖에 하지 않았다. 딸이 원하는 촌스럽지 않은 흰색의 여행 캐리어는 그렇게 비싸지 않았고, 새 여행 가방에 딸아이는 금방 기분이 풀렸다. 39,000원 밖에 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나는 왜 그렇게 며칠을 고민을 했는지. 고민했던 시간과 에너지가 아까울 지경이었다. 이번에도 여행 가방의 태그를 스크랩 노트에 붙였다. 이 태그를 볼 때마다   그 날의 여러 감정이 떠오른다. 여러 감정이 교차했지만, 나는 그 날의 일을   ‘2024년도에 내가 딸을 위해 가장 잘 한 일.’ 이라고 기억할 것이다.

딸아이의 수학여행 여행가방 캐리어.

  기록이 아니였으면 사라져 버렸을 기억과 감정들. 실물의 티켓과 태그 등을 보면 그저 손으로 적은 것과는 또다른 느낌의 기억과 감정을 떠올린다. 아이들과 함께 방문했던 전시회, 미술관, 영화관 티켓을 보면 그래도 내가 아이들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는 위안을 얻고 싶은 것은 아닐까. 열심히 살아왔다는 증거이기도 하니까.


  매일매일 열정적인 삶을 살아가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사는 동안 내가 이렇게 성실하게 살아왔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싶다.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마주 보며, 앞으로 살아나갈 하루 하루를 위한 지혜를 얻고 싶다. 내가 아끼는 사람들과 함께 추억을 쌓아가기 위해 애썼던 나의 힘을 믿으면, 앞으로의 시간도 거뜬히 살아낼 수 있지 않을까. 자잘한 기록을 매일 이어가는 이유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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