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마리 Dec 03. 2023

나도 재미있는 꼰대가 될래
넷플릭스 <도시인처럼>

마틴 스콜세이지와 프랜 리보위츠의 대담

후루룩 정주행 한 넷플릭스 오리지널 다큐멘터리 <도시인처럼>. 시종일관 속사포로 뉴욕 그리고 지금의 시대에 불평을 쏟아내는 프랜 리보위츠와 그의 대답마다 호탕한 웃음을 터트리는 마틴 스콜세이지. 두 사람의 대화를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즐겁게 감상했다.

photo ©️Netflix

인터뷰이(Interviewee)이자 주인공인 프랜 리보위츠는 50여 년 동안 뉴욕에서 수필가이자 유머리스트로 활동하고 있는데 70대에 접어든 지금은 거침없는 입담으로 MZ 세대들에게 ‘힙한 할머니’로 여겨지는 대표 뉴요커다. 힙한 뉴요커와 뉴욕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면 응당 찬사가 넘쳐 날 것 같지만 리보위츠는 뉴욕에 대한 신랄한 비판을 서슴지 않는다.

AI가 그림도 그려주고 글도 써주는 마당에 스마트폰은 고사하고 컴퓨터도 쓰지 않으며 아날로그적 삶을 고수하는 그의 관점에서 요즘의 뉴요커는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느라 언제 사고가 나서 죽어도 모를 제대로 걸을 줄도 모르는 인류’다. (뜨끔한 거 나만 그런 거 아니겠지...) 감당하기 힘든 생활비와 높은 주거 비용 등 어느 것 하나 만족할 구석이 없는 데 왜 뉴욕에서 그 긴 세월을 살고 있느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한다.


왜 뉴욕에 사느냐고 물으면 딱히 답할 말은 없지만 적어도 뉴욕에 살 용기가 없는 이들을 경멸하게 된단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아니 다들 그렇게 쉬운 곳에 살아요? 모두 당신에게 친절하고 등쳐 먹으려는 사람도 없는 곳에? 그건 어른의 삶이 아니잖아요! (ep.1 도시인처럼)


스콜세이지가 던지는 질문에 리보위츠는 숨도 쉬지 않고 답변(이라 부르고 불평이라고 써야 할 것 같지만…)을 술술 쏟아낸다. 그의 모든 대답은 불평인 듯 보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통찰력이 담겨 있고, 그 속에는 언제나 유머가 함께한다. 여전히 사회의 화두 중 하나인 ‘꼰대’가 단순히 불평만 하는 나이 많은 사람을 일컫는다면, 그에게는 적절한 수식어가 아닐 것 같다. 그러나 매사에 불만을 쏟아내며 사사건건 트집을 잡는데 그 속에는 날카로움이 담겨 있고, 신랄한 위트로 무장한 사람을 꼰대라 칭한다면 리보위츠는 ‘이상적인 꼰대’라고 부를 수 있을 것 같다. MZ 세대가 그에게 열광하며 ‘재미있는 꼰대’라고 부르는 이유도 알 것 같고.

<도시인처럼>을 보는 동안 나 역시 불평에 공감하다 끝내는 그와 같은 날카로운 지성과 신랄한 위트로 무장한 꼰대로 늙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생각했으니까. 무엇보다 그는 지금껏 내가 본 사람 중 가장 뛰어난 달변가였다. 그저 리보위츠가 쏟아내는 이야기를 듣고만 있어도 시간 가는 줄 모를 만큼 집중해서 감상했는데 일반적으로 매체에서 그려온 뉴욕의 환상에서 벗어나 ‘진짜 뉴욕’을 경험해 보고 싶은 사람들이 봐도 재밌을 프로그램이다. 무엇보다 에피소드마다 무릎을 내려치게 만드는 리보위츠의 통찰력에 나의 메모장은 과부하 상태가 됐다.




[...] 세상에 뭔가 보이려고 한다면 의무감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위대함까진 아니고요. 그건 아무나 못 해요. 적어도 남보다 나은 것을 보여야 한다는 의무감요. 요즘엔 다 보여주죠. 아무거나요. 물론 도덕적으로 문제는 없어요. 그렇지만 대체 이 사람들이 어떻게… 그런 사람들은 항상 젊은이들이에요. 젊은이들이 그렇게 살죠. 판단력을 갖추긴 했는지 모르겠어요. 그렇게 따지고 보면 제 일은 현상을 구분하는 일이잖아요. 판단하는 일이죠. 젊은 세대엔 저 같은 사람이 없는 것 같아요. (ep.2 문화, 예술 그리고 재능)


공감이 가면서도 괜히 뜨끔하는 것이 개인적 기록의 목적으로 시작한 감상문 쓰기도 이제 나만 보는 일기장에 해야 할까 잠깐 고민했다.


나쁜 습관 때문에 죽을 순 있어도 좋은 습관이 날 살리진 못해요. 습관이 아무리 훌륭하기 그지없다고 해도요. […] 하지만 지금은 정말 견딜 수 없는 게 있어요. 건강 관리(Wellness)요. 모든 신문이나 잡지에서 떠들잖아요. 스파에서 관리도 받으래고 어디든 ‘건강’을 갖다 붙이죠. 예전엔 그런 거 없었어요. 건강 관리가 대체 뭐죠? 건강의 사족이에요. 건강 관리는 제가 보기엔 욕심 관리입니다. 아프지 않은 거로는 부족해서 꼭 건강해야 해요. 이건 돈으로 살 수 있어요. 요즘 말하는 건강 관리요. 돈으로 하는 거잖아요. 특별 건강식이니 뭐니 그런 것도 많고요. 각종 씨앗류랑 차 같은 거요. 그런 관리로 얻어지는 것들을 저는 갖고 싶지 않아요. 사양할게요. (ep.5 건강하게 살기)


아프지 않은 것만으로도 큰 축복인데 건강까지 해야 하다니.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 이후로 이렇게 웃프면서도 공감 가는 이야기는 오랜만이었다.



요즘 사람들이 휴가랍시고 가서 하는 것들은 보통 전쟁 포로에게나 시키던 것들이었어요. ‘타임스’의 여행면에 늘 이런 게 실리잖아요. ‘서로 몸을 묶고 산을 오르며 휴가를 만끽하세요. 산 정상에 오르면 절벽으로 뛰어내려… 어쩌고 저쩌고’ 1인당 1만 5천 달러씩 내고 그런 휴가를 가요. [...] 대체 그런 걸 왜 하는지 생각해 보니 자신의 한계에 도전하는 것 같아요. 이렇게 말하는 사람 많죠. ‘내 한계에 도전하고 싶어요’ 그런 도전은 다 가짜예요. [...] 꼭 해야 하고 필요한 일인데 무섭거나 힘들거나 잘 못해서 안 하는 것들요. 그게 도전입니다. 꼭 해야 하는 게 도전이에요. 멋대로 지어낸 게 아니고요. 전엔 ‘극한 활동으로 여겼는데 이제 그게 도전이 됐어요. 한계에 도전하고 싶다며 그런 활동을 즐기죠. 평소에 어떻게 살길래 그럴까요? 제게 도전은 일상생활로도 충분해요. 제 생각엔 말이죠. 남들과 큰 싸움 벌이지 않고 고소한단 말을 할 필요나 협박받는 경우도 없이 무사히 세탁소에 옷을 맡기고 다시 찾아올 수 있다면 저한테 그것만 해도 엄청난 도전이에요. 왜들 그러는지 도무지 모르겠어요. 제겐 늘 일상이 큰 도전이거든요. 환상 속의 도전을 굳이 찾아 나서지 않아도 돼요. (ep.5 건강하게 살기)


리보위츠는 팩폭에도 놀라운 재주가 있는 것 같다. 상식을 벗어난 사람들, 꼭 해야 할 일을 제대로 하지 않는 사람들 면전에 대고 저런 말 날려주면 진짜 대리만족 장난 아닐 것 같고. 요즘 제일 많이 느끼지만 남들이랑 시비 안 붙고 하루를 평탄하게 보내는 것만큼 커다란 도전은 없다. 평범한 일상을 살아내는 것 자체가 인생에서 이미 엄청난 도전을 하고 있는 거다.



명상이 요가의 일부인 건 알아요. 현재 뉴욕 시민의 1/3이 요가 매트를 들고 다녀요. 그것만으로도 전 요가가 싫어요. 그 하나만으로요. 돌돌 만 매트를 들고 돌아다닌다니. 대체 뉴욕 패션이 어쩌다 이런 지경에 됐죠? 매트를 들고 다니는 사람들 보기 싫어요. (ep. 5 건강하게 살기)


뉴욕 패션을 이런 지경으로 만들어 버린 요가 매트 ㅎㅎㅎ



제가 지금 아는 것들을 젊었을 때도 알았더라면 똑같은 실수는 안 했겠죠. 하지만 여러분, 안타깝게도 실수는 계속됩니다. 특정 나이에서만 실수하는 게 아니에요. 실수는 계속하는데 변명 거리는 점점 줄어들죠. 나이 먹어서는 새로운 실수를 하는 경우가 드물거든요. 똑같은 실수를 또 하는 어처구니없는 짓을 하죠. 알았으면… 처음 할 때는 당연히 몰랐죠. 그래서 관대하게 넘어가요. 그러다 똑같은 실수를 16번쯤 반복하면 깨닫게 돼요. 반복된다는 게 문제거든요. 같은 실수를 몇 번이고 반복하면 그게 뭐든 간에 소질이 없다는 증거일 뿐입니다.(ep.6 나이를 먹으면)


은밀한 취미(Guilty pleasure)가 있나요? - 그런 거 없어요. 죄책감 없이 당당하게 즐기거든요. 왜 죄책감이랑 연결 짓는지 이해가 안 돼요. 물론 그 취미가 살인이라면 얘기가 다르죠. 저는 즐거움을 얻는 행동에 죄책감을 느끼지 않습니다. 요즘 세상엔 사람 죽이고도 죄책감 없는 이들도 많고 국경에서 어린이들을 철창 안에 가두 고도 아무렇지 않아 하죠. 그런 사람들도 멀쩡한데 제가 왜 죄책감을 느껴야 하죠? 특히 나이를 먹어가면서 즐거움이 뭔지 생각해 보면 그게 뭐든 상관없이 즐겁다면 그냥 하면 돼요. (ep.6 나이를 먹으면)


나도 모르게 습관적으로 쓰는 표현 중에 곰곰이 생각해 보면 정말 말도 안 되는 것들이 많았다는 걸 알게 된다. 그중에 은밀한 취미도 포함이다.



제 생각엔 동시대인이 아니고서는 누고도 진정으로 이해할 수 없어요. 다른 세대를 진정으로 이해할 수는 없죠. 그러니 저는 저랑 같은 세대를 깊이 이해합니다. [...] (ep.6 나이를 먹으면)


세대 갈등이란 결국 같은 시대를 살아보지 않고는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해서 오는 걸지도 모르겠다. 진정한 이해까지는 아니더라도 서로가 살아온 환경과 시대가 똑같지 않다는 것 정도는 받아들일 수 있으면 괜찮지 않을까.



어떤 사람이든 인생은 하나뿐이에요. 하지만 책에서는 수많은 삶을 살 수 있어요. (ep.7 책으로 만난 세계)


말하기 전 생각 하고 생각하기 전 읽어라 (Think before you speak, read before you think). 1978년 뉴스 위크에 쓴 기고문의 한 구절이었어요. 청소년 독자를 대상으로 다양한 방향을 제시하는 내용을 담은 글이었어요.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요. 원래 문구는 아마 '말하기 전 생각 하고 생각하기 전 읽어라. 혼자 지어내지 않은 것을 생각할 기회가 된다. 모든 나이에 권장되나 특히 17살엔 더욱 그렇다. 불편한 결론을 내릴 위험이 가장 큰 나이이기 때문이다.' (ep.7 책으로 만난 세계)


날카로운 통찰력과 신랄한 위트는 절대 재능만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다. 책만 많이 읽는다고 모든 사람들이 현명해지는 것도 아니지만, 현명한 어른 중에서 책 한 줄 읽지 않은 사람은 없는 것처럼.



전지적 관찰자 시점, 가끔인 1인칭 주인공 시점의 영화 이야기.

시선기록장 @bonheur_archive

파리 사진집 <from Paris> 저자

영화 뉴스레터 ciné-archive


매거진의 이전글 겁쟁이 소년의 성장기 <조조 래빗>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