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차를 타고 해물 순두부를 먹는다.

도쿄 여행 01

by 볼파란

2017년 10월 11일 목요일


새벽 4시에 눈이 떠졌다. 집에서 지낸 이후로 이렇게 일찍 일어난 적은 처음이다. 밖에는 비가 내린다. 4시 50분이면 정류장에 308번 첫 차가 온다. 첫 차를 타고 인천 공항에 가기 위해 서둘러 나섰다. 전날 짐을 싸면서 백팩에서 기내용 캐리어로 바뀌었다. 아무리 짐이 없어도 백팩을 메고 걸을 엄두가 안 났다. 1만보 이상 걷기 시작하면 무리가 오고 2만보 가까이 걸으면 허리와 등이 빠져나갈 것처럼 아프다. 정말 거리에서 허리를 굽히고 꺼이꺼이 운 적도 있다. 물론 첫날과 마지막 날 뿐이라곤 해도 어깨에 멜 엄두가 안 나서 다시 캐리어로 옮겼다. 그래도 수화물로는 부치지 않겠다. 이미 아시아나 항공 모바일 체크인을 해두었다. 공항에 도착해서 환전만 찾아 바로 출국장으로 들어갈 것이다.


환전만 해도 그렇다. 미리 맞춰서 해놓으면 좋았을 것을, 돈도 없는데 허리띠 졸라매고 갔다 오자고 적게 환전했다가 이리저리 계산을 해봐도 드럭스토어랑 지브리 박물관을 가면서 아무것도 안 살 자신이 없어서 꼴랑 5,000엔을 다시 환전한 것이다. 그것도 전날 밤에 부랴부랴 5,000엔을 국민은행 리브 어플로 신청해서 인천공항 1층 맨 구석에 있는 KEB 하나 은행까지 가서 받아야 한다. 국민은행은 인천공항에 들어와 있지 않다. KEB 하나은행과 업무협약을 맺은 터라 하나은행에 꼽사리 껴서 받아야 한다.


공항 리무진이 아닌 308번 버스는 기내용 캐리어 말고는 받아주지 않는다. 이 사실을 모르는 여러 사람이 기다리다가 낭패를 당했다고 한다. 난 기내용 캐리어라 다행히 문전박대 안 당하고 바로 앞좌석에 캐리어랑 간신히 끼어 앉았다. 이 동네에 살면서 인천 공항까지 이 버스를 타본 적 없었는데 왜냐하면 늘 공항철도를 이용했기 때문이다. 오전 9시 비행기라 환전과 면세품 인도까지 생각하면 연휴가 지났다고는 해도 3시간 전에는 도착하는 게 나을 것 같아 첫 차 시간이 공항 철도보다 빠른 308번을 탔다. 아마 다시는 이용할 일이 없을 것 같다. 마을버스처럼 인천 곳곳을 누비는 동안 사람들이 꾸역꾸역 올라탔다. 첫 차임에도 불구하고 버스 안은 금세 자리가 다 찼고 통로에 서서 가는 사람들로 빈틈이 없다. 놀러 가는 사람들은 나 포함해서 몇 명 안되고 죄다 출근길 사람들이다. 앞에 서있던 아가씨의 무거운 가방을 받아주었다. 그 아가씨가 내리면서 나한테 좋은 하루 보내라고 풍선껌을 건네주었다. 이른 아침에도 통통 튀게 밝은 그 아가씨의 앳되고 맑은 얼굴이 지켜지길 바랐다.


인천공항 3층에 내려 다시 1층에 가서 환전을 했다. 오전 6시가 채 안된 시간이었다. 출국장에 들어가 출국 심사를 받고 면세품을 찾으러 갈 때까지는 별 문제없었다. 서편 인도장으로 올라가는 에스컬레이터를 찾지 못해 그 근방을 얼마쯤 서성거렸다. 좁은 인도장 복도에는 다행히 사람들이 많지 않았다. 추석 연휴 때 어땠는지 이미 커뮤니티 후기들을 봤기 때문에 이만하길 다행이다. 돈도 없이 가는 주제에 참지 못하고 면세품을 질렀다. 톰포드의 레드 코르셋. 그 붉은색이 참을 수 없게 매력적이다. 나에게 있어 물욕이란 돈이 있고 없고의 문제는 아닌 것 같다. 끼니를 거를지언정 사야 할 것은 사야 한다는 이 물욕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실제로 이번 도쿄 여행에서 제대로 된 끼니는 점심 한 끼였다. 배고픈 것은 못 참지만 확실히 맛집 탐방은 내 여행 스타일과는 맞지 않는다. 솔직히 아직도 내 여행 스타일을 잘 모르겠다. 쇼핑을 안 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좋아하지도 않고 걷는 것을 좋아하지만 많이 걷지는 못한다. 자연도 좋지만 도시 구경도 재미있다. 확실한 것은 혼자가 편하다는 것 정도다. 그리고 한 가지 새삼 깨달은 것이 있는데 여행 준비하는 것을 더 즐긴다는 사실이다. 꼼꼼하게 루트를 짜고 가야 할 맛집이나 사야 할 쇼핑 목록들을 만들어서 그대로 실행에 옮기는 것을 더 좋아한다. 생각지도 못한 상황들에 노출되면 심하게 당황하고 피곤해진다. (아마도 지난번 홋카이도 여행 때가 그랬던 것 같다.) 그런 피곤함을 감수하고라도 여행을 떠나는 것은 현실에서 도피하고 싶은 욕구 때문이다. 여기가 아닌 어딘가,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 태어나서 지금까지. 곁에 있다는 파랑새를 찾아 헤매고 산 기분인데 막상 곁을 봐도 파랑새는 보이지 않는 기분이랄까.


면세품을 찾고 해물 순두부를 먹었다. 왜 공항에만 오면 꼭 순두부를 먹는지 나도 잘 모르겠다. 한국을 떠나기 전 마지막 음식이 굳이 순두부여야 하는 이유는 없는데 꼭 그렇게 된다. 여전히 비가 내린다.


아시아나 항공에는 지긋한 연세의 남자 사무장이 함께 탔다. (정책이 바뀌었는지 오갈 때 모두 남자 사무장이 함께 탔다. 훨씬 분위기가 부드럽고 서비스가 좋았다고 느낀 것은 나이가 주는 연륜은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스튜어디스도 남자가 더 많아지고 외모보다는 능력과 체력 위주로 뽑았으면 좋겠다. 키는 둘째치고 우리나라 스튜어디스들은 하나같이 너무 말랐다.) 나는 비행기 타는 게 하나도 즐겁지 않다. 오히려 긴장되고 두렵다. 짧은 비행도 마찬가지다. 술을 마신 후 몸이 더욱 뻣뻣해지고 두통까지 함께 왔던 스위스 여행 때 이후론 술 마시고 잔다는 사람들은 부럽기만 하다. 책을 읽거나 영화를 보는 활동도 오래 할 수 없다. 그저 긴장 한채 버티는 것 밖에 할 수 없는 무기력함을 느낀다. 나는 그동안 무시무시한 난기류를 맛본 적도 없고 비바람이 몰아치는 날에 비행기를 탄 적도 없다. 그런데도 이런 증상이 심해진다. 오늘 내리던 비도 하늘로 올라가니 금세 그쳤다. 하지만 3시간도 채 걸리지 않는 비행시간에도 죽을 맛이다. 당장이라도 창문을 열고 뛰어내리거나 신선한 공기를 마시고 싶어 진다. 조금이라도 난기류에 비행기가 흔들리면 그대로 뚝 떨어지는 상상에 오금이 저린다. 머리가 쿡쿡 쑤시고 온 몸이 긴장을 해서 어깨와 등이 심하게 결린다. 한국에 올 때 비행시간이 제일 고통스러웠는데 다시는 비행기를 타지 않겠다고 마음먹을 정도였다. 정도가 심했던 것은 옆에 앉은 남자 때문이기도 했다. (이 이야기는 마지막 날에 적어보자. 휴- 생각만 해도 싫다.)


암튼 비행기는 이런 내 마음과는 상관없이 정확한 시간에 도쿄 나리타 항공에 내려주었다.


나리타 공항에 도착하기 얼마 전의 하늘. 안녕 도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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