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지가 대학 3학년이 된 해였다. 장마가 시작된 어느 여름밤, 삼촌이 또 나타났다. 하지만 이번은 달랐다. 평소의 술 냄새도 없었고, 비틀거리지도 않았다. 대신 얼굴이 창백했고, 왼쪽 눈 주위에는 시퍼런 멍이 들어 있었다. 손가락 두 개에는 붕대가 감겨 있었다. 아버지가 문을 열자 삼촌은 무릎을 꿇었다. - 형, 죽을 죄를 지었어. 이번이 정말 마지막이야. 아버지의 얼굴이 돌처럼 굳었다. 어머니는 민수를 데리고 방으로 들어갔다. 은지는 방문을 살짝 열고 거실을 내다봤다. 삼촌이 떨고 있었다. 진짜 공포에 떨고 있었다.
삼촌이 털어놓은 이야기는 충격적이었다. 사채를 써서 도박을 했다가 3천만 원을 잃었다는 것이었다. 이자는 하루에 1%씩 붙고 있었고, 이미 원금의 두 배가 넘어가고 있었다. 사채업자들이 찾아와서 협박했고, 손가락을 부러뜨렸다. 내일까지 돈을 갚지 않으면 더 큰 일이 날 거라고 했다. 아버지가 - 3천만 원? 그런 돈이 어디 있어? 하고 물었다. 삼촌이 - 형 집 담보로 대출받으면... 아버지가 소리쳤다. - 미쳤어? 우리가 사는 집을 담보로? 그것도 전세잔데! 삼촌은 바닥에 이마를 대고 울었다. - 형, 나 죽을 것 같아. 진짜 죽을 것 같아.
그때 현관문이 열렸다. 할머니였다. 고모가 데려다준 것 같았다. 할머니는 삼촌을 보자 비명을 질렀다. - 영철아! 네 얼굴이 왜 이래! 삼촌은 할머니를 보자 더 크게 울었다. - 엄마, 죄송해요. 제가 못난 자식이에요. 할머니는 삼촌을 안으며 - 괜찮아, 엄마가 해결해줄게, 하고 말했다. 할머니가 아버지를 보며 -영수야, 네 동생 좀 도와줘라. 아버지가 - 어머니, 저희도 돈이 없어요. 이번엔 정말 불가능해요. 할머니가 - 그럼 영철이가 죽어도 되는 거니? 네 동생이 죽어도 상관없다는 거야? 아버지는 말을 잃었다. 그 침묵이 은지에게는 더 아프게 들렸다.
고모도 거실로 나왔다. 이혼 후 많이 수척해진 고모였지만 오늘은 더 초췌해 보였다. - 엄마, 저도 돈 없어요. 겨우 먹고 살아요. 할머니가 - 너라도 좀 도와줘야지! 고모가 - 어떻게요? 제가 무슨 돈이 있다고! 가족 간의 대화는 점점 격해졌다. 은지가 거실로 나왔다. 모두가 은지를 봤다. 은지는 차분하게 말했다. - 경찰에 신고해요. 사채는 불법이에요. 삼촌이 고개를 저으며 - 안 돼. 그럼 나도 도박 혐의로 잡혀가. 그리고 그 사람들이... 가만두지 않을 거야. 은지는 삼촌의 공포가 진짜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할머니가 갑자기 일어나 안방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낡은 통장을 들고 나왔다. - 여기 천만 원 있어. 내 장례비로 모아둔 거야. 이거라도 써라. 아버지가 - 어머니, 그건 안 됩니다. 할머니가 - 내 돈이야! 내가 쓰겠다는데 뭐가 문제야! 천만 원. 2천만 원이 더 필요했다. 삼촌이 - 형, 천만 원만 더... 아버지가 고개를 저었다. - 없어. 정말 없어. 우리 전 재산이 전세금밖에 없어. 그때 어머니가 나왔다. 손에 봉투를 들고 있었다. - 여기 5백만 원 있어요. 은지 등록금으로 모아둔 거예요. 은지가 놀라 - 엄마, 안 돼요! 어머니가 - 혹시 몰라서 모아둔 거야. 비상금이지. 은지는 어머니가 자신을 위해 얼마나 아껴 모았을지 생각하니 눈물이 났다. 그래도 1500만 원이 부족했다. 고모가 한숨을 쉬며 - 내 패물 팔면 5백만 원은 나올 거예요. 결혼반지랑 목걸이. 이혼할 때 못 판 거. 할머니가 고모의 손을 잡으며 - 영희야, 고마워. 그러나 여전히 천만 원이 부족했다.
새벽 3시가 되었다. 모두가 지쳐 있었다. 삼촌은 구석에 웅크리고 있었다. 상처 난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며 무언가를 중얼거렸다. 아버지가 결심한 듯 일어났다. - 내일 아침에 은행 가서 대출 알아볼게. 신용대출로 천만 원은 나올 거야. 삼촌이 아버지 앞에 무릎 꿇었다. - 형, 정말 고마워. 이번이 진짜 마지막이야. 맹세해. 아버지는 삼촌을 일으켜 세우지 않았다. 그저 등을 돌렸다. 어머니는 부엌에서 울고 있었다. 고모는 멍하니 앉아 있었다. 할머니만이 삼촌을 달래고 있었다.
다음 날 아침, 돈을 모았다. 할머니의 천만 원, 어머니의 5백만 원, 고모의 패물 값 5백만 원, 아버지의 신용대출 천만 원. 정확히 3천만 원이었다. 삼촌은 돈을 들고 사채업자를 만나러 갔다. 가족들은 불안하게 기다렸다. 오후가 되어 삼촌이 돌아왔다. 몸은 멀쩡했지만 영혼이 빠진 것 같았다. - 끝났어. 다 갚았어. 그리고는 바닥에 주저앉아 울었다. 어른 남자의 울음은 처참했다. 할머니가 삼촌을 안았지만 삼촌의 울음은 멈추지 않았다.
그날 밤, 삼촌이 은지를 불렀다. - 은지야, 삼촌이 미안해. 네 등록금까지... 은지는 차갑게 답했다. - 삼촌, 이제 그만하세요. 가족이 더 이상 견딜 수 없어요. 삼촌이 고개를 떨구며 - 알아. 나도 알아. 내가 쓰레기인 거. 은지가 - 쓰레기는 아니에요. 하지만 병이에요. 치료받으세요. 도박 중독은 병이에요. 삼촌이 놀란 듯 은지를 봤다. - 병? 은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 정신과 치료 받으세요. 안 그러면 또 반복될 거예요. 가족도 삼촌도 다 망가질 거예요.
일주일 후, 삼촌은 병원에 입원했다. 도박 중독 치료 프로그램이었다. 3개월 과정이었다. 할머니가 비용을 댔다. 또 돈이었다. 하지만 이번은 치료비였다. 삼촌은 입원하면서 가족들에게 편지를 썼다. ‘정말 죄송합니다. 이제 새 사람이 되겠습니다.’
은지는 학자금 대출을 받았다. 어머니의 5백만 원은 다시 모으기에는 너무 큰 돈이었다. 졸업 후 갚아야 할 빚이 생긴 것이다. 하지만 은지는 담담했다. 이미 익숙한 일이었다. 가난한 자에게 빚은 일상이니까. 아버지는 더 말이 없어졌다. 퇴근 후 소주를 마시는 날이 많아졌다. 어머니는 파출부 일을 하나 더 늘렸다. 새벽 5시에 나가서 밤 10시에 들어왔다. 고모는 패물을 판 후로 더 초라해 보였다. 손가락에 반지 자국만 하얗게 남아 있었다.
그해 가을, 삼촌이 퇴원했다. 많이 마르고 수척했지만 눈빛은 맑아 보였다. - 형, 나 이제 괜찮아. 진짜야. 일자리도 구했어. 물류센터 야간 근무야. 힘들지만 돈 벌어서 갚을게. 아버지는 고개만 끄덕였다. 믿음은 이미 깨진 지 오래였다.
삼촌의 마지막 도박. 정말 마지막일까? 모르겠다. 다만 확실한 것은 우리 가족이 더 이상 삼촌을 감당할 여력이 없다는 것이다. 바닥을 쳤다. 할머니의 장례비, 엄마의 비상금, 고모의 패물, 아빠의 신용. 모두 삼촌의 도박 빚을 갚는 데 사라졌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가족이 더 끈끈해진 것 같다. 고모가 돈을 내고, 엄마가 비상금을 내놓고, 모두가 조금씩 희생했다. 처음으로 우리가 한 가족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비극적이지만, 그래도 가족이다.
겨울이 왔다. 삼촌은 물류센터에서 성실하게 일했다. 한 달에 150만 원을 벌어 100만 원을 아버지에게 갚기 시작했다. 작은 시작이었지만 의미 있는 변화였다. 은지는 삼촌을 용서하지는 않았지만, 희망은 품기로 했다.
크리스마스 이브, 온 가족이 모였다.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 삼촌, 고모, 준호, 은지, 민수. 케이크도 없고 선물도 없었지만 함께 있었다. 삼촌이 - 내년에는 내가 케이크 살게, 하고 말하자 모두가 웃었다. 쓸쓸한 웃음이었지만, 그래도 웃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