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야당역 수변공원
저는 아직 5월을 놓지 못했어요.
올해 봄에는 유독 많은 일이 있었습니다. 지난 겨우내 썼던 공저 <삶, 다채롭고 반짝이는>이 발간되었고, 어리석은 실수로 몇천만 원이라는 큰 빚을 지는 대형 사고를 쳤죠. 이 사고를 수습하느라 보증금을 빼서 이사를 했고, 순식간에 삶의 터전이 봉천동에서 파주로 바뀌었습니다.
봄은 지났는데, 아직도 마음은 봄에 머물러 있는 것 같아요.
많은 일들이 정리가 되지 않아서인지, 몇천만 원이라는 빚을 남긴 대형사고가 부끄러워서인지,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또 자박자박 걸었습니다.
소리천,
다양한 사람이 모인 풍경들
야당역 옆을 살짝 가로지르는 실개천을 '소리천'이라고 합니다.
제가 야당역에 온 첫날, 첫발을 딛자마자 이 소리천이 보였어요. 강변을 따라 환하게 피어 있는 벚꽃을 보며, 단박에 '여기서 살아야겠다.' 그렇게 마음을 먹었습니다. 망설임 없이 오피스텔을 구하고, 계약을 하고, 한 달 후에는 파주시민이 되었습니다.
언젠간 걷겠다 걷겠다 말만 했는데, 자리 잡은 지 한 달이 지나고서야 소리천에 발을 들여놓았습니다.
졸졸 흐르는 실개천을 거슬러 오르고, 또 오르다 보면 생각 외로 재밌는 풍경들이 펼쳐집니다. 버스킹을 하는 가수가 있고, 이를 볼 수 있는 작은 야외 공연장도 꾸려져 있습니다.
탁 트인 호수와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
강물을 거슬러 더 위로 올라가면 소리천 카페가 있어요. 확 트인 호수 전경을 보면서 야외 벤치에 앉아 커피를 마시는 일은 실로 각별하리라는 생각이 듭니다.
여기에서는 공연도 종종 열리나 봅니다. 이 당시에는 네 분이 블루스를 연주하고 있었어요. 근처 동호회에서 오신 분들일까요? 음악에 대한 열정을 품고 있는 네 중년의 모습이 참 멋져보였습니다.
걷노라면, 아이들 웃음 소리도 들립니다. 이사하기 전, 저는 봉천동 샤로수길 근처에 살았습니다. 취객들 주정부리는 소리나, 술집에서 나오는 음악 소리, 빵빵거리는 경적 소리를 들으며 살았지요. 이곳에서 산책로를 뛰어가며 엄마를 부르는 아이들 소리, 유모차에서 우는 아기들 소리가 들리는 게 참 낯설고 신기했어요.
산책하기 좋은 곳이다 보니 유독 견공들도 많습니다.
러닝을 하러 나온 사람들도 있고, 자전거를 타는 어린이들, 산책을 하러 나온 어르신들도 보입니다.
'사고'를 치고 도망친 파주,
야당역에 펼쳐진 여유
사실 제 몇천만 원의 빚은 좀 황당한 일로 생겼어요.
처음에는, 그냥 손에 돈을 좀 갖고 싶었어요. 넉넉하게 돈을 갖고 있으면, 마음이 편안할 것 같았죠. 대출을 받으니까 이게 또 바로 입금이 되더랍니다. 평생 대출 한 번 받지 못했는데, 이게 너무 신기하고 재밌었어요.
그렇게 천만 원, 이천만 원 대출을 받다 보니, 그런데 신기하게도 이 돈이 쑥쑥 어디론가 사라지는 겁니다.
정신을 차려보니, 빚만 몇천만 원.
그 돈을 당최 어디에 썼는지, 뭘 했는지 기억도 안 나더군요.
어처구니 없는 일이었어요.
사실 저는 양극성장애가 있습니다. 나중에서야 알았어요. 이게 경조증 상태의 증상이라는 걸요. 생각해 보니, 대출받은 돈으로 이것저것 새로운 일을 시도하기도 하고, 훌쩍 여행을 가기도 하고, 별짓을 다했더군요.
사업에 손을 안 댄 것만 해도 다행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참에 출판사를 차릴 생각이었거든요.
후회하기엔 늦었고, 몇 년간 열심히 갚는 수밖에 없었지요.
도망친 곳에
낙원이 있을지도 몰라
이사를 하고 나서, 직장 동료들에겐 이렇게 말했어요.
"나 서울에서 쫓겨났잖아요! 돈이 없잖아!"
빚 때문에 도망친 거긴 해도, 틀린 말도 아니지요. 안 그래도 집 주인이 전세금과 월세를 올렸는데, 이사를 가긴 가야 했거든요.
그렇게 회사가 있는 홍대에 경의중앙선을 타고 출퇴근하기 좋은 야당역으로 도망쳤는데, 생각 외로 참 살 만한 곳이었어요. 파주가 땅덩어리가 넓기 때문인지, 차선도 시원시원하고, 어디든 공원이 있고, 번잡하지 않고, 그러면서도 있을 건 다 있더군요.
도망친 곳에 낙원은 없다고들 하는데, 생각 외로 있기는 한가봅니다.
수변공원을 걸으며 그런 생각을 했어요.
이것도 기회라 생각하고, 열심히 살아 보자! 빚도 갚으면서. 좌우간 사고친 일은 해결해야 하니까.
글도 쓰고, 책도 내고. 그렇게 살아 보자. 다시, 열심히.
끝나지 않을 것 같은 혼돈의 봄이 끝나고, 그래도 여름이 왔습니다.
장마도 시작됐지요.
이 한철을 또 어떻게 버텨내야 하나, 또 대출이자나 생활비를 어떻게 감당해야 하나 고민이 되지만, 또 한편으로는 다행스럽기도 합니다. 이 난장판 속에서도 시간은 흐르고, 이 순간도 지나고 나면, 농담거리가 되겠지요.
그런 확신이, 소리천 수변공원의 여름을 보며 들었습니다.
독자 분들은, 봄에 마무리 못한 일들이 있으신지요? 마음에 남은 일들이 있으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번 여름에도 부지런히 살아갑시다.
또 가을이 오면, 새로운 풍경이 펼쳐지겠지요.
박지아.
편집자. 에세이스트.
cakio@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