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홍대입구역 서교동 골목길
오늘 점심을 걸렀어요.
최근 악재가 연이어 겹치다 보니, 입맛이 뚝 떨어진 모양입니다.
그저 발 닿는 대로 사무실 근처를 천천히 걸었습니다.
장마철이라 하늘은 낮고 공기는 눅눅한데, 이런 날씨가 또 서교동 골목길을 걸을 때에는 각별한 맛이 있어요.
빙빙 돌아가는 이발소 원통형 간판.
시퍼런 나무를 품은 으리으리한 2층 집들.
물통에서 쏟아지듯 흘러내리는 능소화 더미들.
영화 속의 어딘가를 걷는 기분이 들어요. 막 컬러도 아니고, 유명 배우가 나온 것도 아닌데,
어쩐지 기억나고, 어디선가 본 것 같은 그리운 영화.
젖은 빨래처럼 축 늘어진 마음에 물기가 더해지는 것 같은 6월입니다.
오늘은 서교동 골목길을 자박자박 걸으며 둥근 부채에 대해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나무 손잡이가 달린 동그란 부채,
단선(團扇) 말이지요.
저는 을입니다
저는 오래도록 을이었습니다.
어느 직업이 그렇지 않겠냐만은, 갑일 것 같은 출판사 편집자는 모든 작업 과정에서 절대 을이에요.
저자나 회사 내에서, 소중한 고객인 저자분들께 을인 거야 당연하고요, 디자이너에게도 을, 인쇄소에도 을.
출판사 편집자로 일하면서, "죄송합니다, 고맙습니다"가 혀에 달라붙었어요.
어떤 하루는 그날 입에 올린 말의 3분의 2가 "죄송합니다"였어요.
죄송하다를 계속하다 보면, 뭐가 죄송한지, 내가 죄송인지, 쟤가 죄송인지도 모르겠고,
서러운데 괜히 한마디를 하자니, 혀를 잘못 놀렸다가 사달이 날까 봐 걱정되고.
누구에게도 이 울분을 토로하지 못하며 터덜터덜 퇴근하곤 했습니다.
이게 보통의, 그저 대단할 것도 없는 하루입니다.
그저 편집자의 일이지요.
따지고 보면 이렇다 할 전문직도 아니고, 기술이 있는 것도 아니고.
출판사 편집자들의 초상은 등을 구부리고 무릎을 꿇은 꼴, 을(乙)인가 봅니다.
퇴근길에는 종종
둥근 부채가 생각나
그런데, 요즘 이상하게도 자꾸 둥근 부채가 생각납니다.
왜 ‘둥근’ 부채일까.
왜 네모난 부채도, 접이식 부채도 아닌, 그 옛날 종이로 만든 둥근 부채일까.
사무실에는 에어컨 빵빵하니 돌아가고, 선풍기만큼 바람이 시원하지도 않은데.
이상하게도 야근 후 맥없이 퇴근할 때면 머릿속에 둥근 부채 하나가 둥실 떠올라요.
하얗고, 나무로 손잡이를 만든.
그런 대단할 것도 없는 단순한 부채가.
밤하늘 속에 빛나는 달처럼, 눈앞에 그렇게 떠오르지요.
마음에 미운 모가 났을 때
홀연히 떠오르는
오늘 서교동 골목을 자박자박 걸으며 생각해 보니, 신경에 뭔가 툭툭 걸리는 게 있어요.
자꾸 풀리는 운동화도 불편하고, 숨을 크기 쉬어 봐도 답답하고, 시선 두는 곳마다 어지럽고.
병원에 가 봐야 하나, 어디가 아픈가.
그 순간,
아, 마음에 날이 섰구나.
내 마음이 사각형처럼 모가 나고, 구석구석 날이 서서, 부딪히고 긁혔구나.
그 예리한 칼날에 갈리고 갈리다가, 내가 하얀 가루가 되어버렸구나.
그런 생각이 들더랍니다.
나는 지금 조금 고장이 난 거였어요.
연이은 악재 속에서, 묵혀놨던 불쾌했던 기억이 떠오르기라도 한 것인지,
혹은 그간의 억울함을 싹 다 보상이라도 받고 싶은 것인지
매일매일 이유 없는 화병을 앓고 있었죠.
정말, 답도 없는 병이었어요.
아무 일도 아닌데 자꾸 속이 뒤집히고, 누구의 말도 예사로 들리질 않았거든요.
이 사실을 깨닫자, 왜 둥근 부채가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는지 알 것 같더군요.
반듯하고 단정한, 희고 둥근 부채!
둥근 것에는 싸움이 없지요.
부딪혀도, 다치지 않습니다.
일에 푹 지쳐서 퇴근하던 제가 그토록 원하던 건, 날카롭지 않은 것,
내 손 안에서 부드럽게 흔들리는, 동글동글한 것이었던 것 같습니다.
모서리가 말랑한 바람
개인적으로 둥근 부채는 그다지 바람을 부치기에 좋진 않다고 생각해요.
손잡이는 무거운 데다가, 합죽선처럼 바람이 시원하게 몰아쳐지는 것도 아니고,
그 둥근 부채를 손에 쥐고, 한 번, 두 번, 바람을 부쳐도 팔만 아프고 더위가 싹 가신다고 할 만큼 시원하진 않죠.
그런데 그 바람은 부채 모양을 닮아서 참 둥글었던 것 같아요.
힘이 세지도 않고, 차갑지도 않고, 어딘가 모서리가 말랑한 바람.
서교동 골목길을 걸으며, 저는 그 바람을 찾고 있는 듯했습니다.
초조한 마음에
완만하고 둥근 여유를
책 만드는 일은 각 과정이 모두 완벽해야 합니다.
그러면서도 아름다워야 하고, 손이 빨라야 하고, 협력업체 모두와 원만한 관계를 유지해야 합니다.
누구도 나쁘지 않았지만, 모두가 초조했지요.
다들 잘하고 싶어서, 조금씩 모가 났던 것 같습니다.
나도 그랬어요. 부드러워지고 싶었지만, 나도 뾰족해졌어요.
그래서일까요.
둥글게 부는, 적당히 흩어지는 바람을, 저는 요즘 부쩍 그리워하는 모양입니다.
요즘 저는 제 마음이 자꾸 네모가 되어가는 게 불편합니다.
자기 자신인데도, 낯설고 남 같기만 해요.
내 뜻대로 따라와 주지 않는 마음이 야속하기도 하고, 밉기도 합니다.
저는 둥근 부채가 필요해요.
나를 좀 둥글게 만들어줄 무언가,
단단히 쥐어지는 안정감.
천천히 부치는 리듬.
손 안에서 가볍게 흔들릴 무언가를 찾다가, 저는 둥근 부채를 떠올렸던 것 같습니다.
둥근 부채 같은 글을 꿈꾸며
둥근 부채를 손에 쥐면, 마음도 조금은 둥글어질까.
세상의 각진 요구를, 조금은 흘려보낼 수 있을까.
상업출판을 하는 편집자로서, 저는 책을 만들면서 늘 이런 생각을 합니다.
팔리는 책!
화제가 되는 책!
센 제목!
사람들은 네모난 것을 원하지요. 각이 뚜렷하고, 한눈에 쓰임이 보이는 것.
그래서일까요.
저는 답답할 때면 조용히 몇 단어를 끄적입니다.
저는 둥근 부채 같은 글을 쓰고 싶어요.
둥글고, 다정하고, 한 손에 가볍게 잡히는 글.
누군가 힘들 때 살짝 부쳐볼 수 있는, 그런 바람 같은 글.
저는 오늘도 점심을 거른 빈 속으로, 서교동의 골목을 천천히 걷습니다.
오래된 영화 속 풍경 같은 이 까마득한 골목 그 어딘가에.
낡은 간판 아래에 누군가 둥근 부채 하나를 부치고 있을 것만 같습니다.
그 바람이 적당히 둥글기를......
그리고 내 마음도, 이 긴 장마를 무사히 견뎌, 조금은 둥글어지기를 바랍니다.
박지아.
편집자. 에세이스트.
cakio@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