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교토 산주산겐도(三十三間堂)
독자님들은, 세상이 덧없게 느껴질 때가 있으신지요?
인생에서 시간이 변하여 사라지는 것들이 덧없음을 느끼게 하는 같습니다.
대표적으로 소유의 무상함, 청년기의 끝, 식어버린 사랑, 공을 들였으나 실패한 사업, 명예나 부의 허망함 같은, 우리 삶에는 덧없음을 느낄 다양한 순간들이 있지요.
세상 모든 것은 영원하지 않으니, 살아가는 모든 일이 덧없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오늘은 다시 교토, 산주산겐도(三十三間堂) 이야기입니다.
변덕스러운 나 자신이
덧없게 느껴질 때도 있어
저는 아직 젊지만, 이런 덧없음을 많이 느끼는 것 같습니다. 한 번은 수녀원에 들어갔다 나온 적도 있고, 모든 것을 버리고 마구잡이로 살거나, 혹은 아무것도 하지 않거나 했지요.
어쩌면 제 영혼의 특성 때 문인지도 모릅니다. 때론 불같이 일어났다가 눈 한번 깜빡이면 사그라드는 열정. 가라앉았다가 거세게 치는 마음. 무언가 미웠다가 또 사랑스러워지는 감정.
"진정한 자아 찾기"
"참 나 찾기"
저도 열심히 나 자신을 찾아본 적이 있는데, 늘 마주쳤던 건 숱하게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욕망뿐이었던 것 같습니다.
종잡을 수 없는 인세 속에서 "이게 정말 나인가" 자문하고, 또 "아니다. 이건 환상이다" 하는 부정을 오가다 보면, 변덕스러운 자기 자신에게도 덧없음을 느끼게 되는 모양입니다.
텅 빈 마음을 타고
여름의 교토로
그해 여름, 저는 교토로 향했습니다.
늘 가는 여름의 교토인지라 별 감흥도 없었지요.
습관적으로 청수사(기요미즈데라, 清水寺)로 향했습니다. 건강과 사랑, 학업을 준다고 하는 약수에도 관심이 없고, 그저 무게가 90kg이 넘는 무쇠석장에 손을 잠깐 댔다가 내려왔습니다. 관광객은 번잡스럽기만 하고, 색색의 유카타를 입은 아가씨들이나 요릿집도 다 눈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색색의 유카타를 입은 아가씨들이 잠시 스쳐가듯, 여름의 청춘도 잠깐이구나 싶었지요.
그저 어떤 덧없음, 자기 자신에 대한 지독한 불신을 품고 산넨자카(三年坂)를 자박자박 걸어 내려왔습니다.
1,001개의
천수관음상을 만나다
언덕에서 내려와 바로 좌측으로 주욱 내려가면 나오는 절이, 바로 산주산겐도(三十三間堂)입니다. 주차시설도 넓고, 관광객들에게 꽤 편리하게 되어 있지요.
내부로 들어가면 길쭉하게 생긴 법당이 나옵니다. 입구에서부터 서늘함이 느껴집니다.
신발을 벗고 걷는 나무 복도는 차갑기까지 하지요. 내부는 사진촬영이 불가능하다는 경고문을 단단히 마음에 새기고 오른쪽으로 한 번 꺾으면, 드디어 본당이 펼쳐집니다.
이곳의 백미는 1,001개의 천수관음상입니다.
건물 중앙의 큰 불상을 중심으로 양쪽에 나란히 선 500개의 관세음보살. 그 사이사이엔 호법신장상 28체가 서 있고, 편백나무 향이 공간을 가득 메우고 있지요. 사진 촬영이 금지된 그 공간에서, 사람들은 자연스레 말을 멈추고 마음을 낮춥니다.
이 부처들 가운데
나의 얼굴이 있어
불상의 몸은 날씬하고, 장식은 섬세하고 치밀합니다. 광배 장식이 바늘을 꽂아놓은 듯 아주 날카로워요. 불상을 자세히 보면 1,001개 각기 얼굴이 다릅니다. 전설에 의하면 이 중 하나는 자신을 닮은 얼굴이 있다고 합니다. 교토에 가실 일이 있다면, 한 번 방문하셔서 찾아보시는 것도 좋겠습니다.
저는 제 얼굴을 찾아보았습니다.
제 얼굴은 안 보이고, 1,001개의 불상을 각기 다른 모습으로 빚어낸 장인들의 어떤 집요한 열정과 완고한 정신이 보이더군요.
그 많은 눈과 손, 그 많은 얼굴들이 세상의 괴로움을 어루만지고자 하는 관음보살. 그 관음보살을 지상에 붙잡아두려고 하는 인간의 간절함에 정신이 아찔해졌습니다.
날카롭게 벼려낸 인간 정신의 극치!
어쩌면 이렇게도 인간은 절실하게 신의 옷자락을 붙잡으려 할까요?
덧없는 세상에서 영원을 갈망하는 건 당연한 일일까요?
그 법당 안은 서늘하다 못해 무겁게 느껴졌습니다.
천 개가 넘는 눈과 손이 나를 바라보는 것도 같고, 나를 지나쳐 세상을 꿰뚫고 있는 것도 같았습니다.
그 안에선 누구도 웃지 않았고, 누구도 크게 숨 쉬지 않았습니다.
마음속에 있던 작은 소란조차 걸음을 멈추게 할 만큼, 그 공간은 묵직한 침묵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저는 한참을 그 얼굴들 사이를 서성였습니다.
이토록 아찔한
인간의 정신 앞에서
각기 조금씩 다른 눈매, 입매, 손의 모양.
누구를 위한 손인지, 무엇을 보려는 눈인지 알 수 없으면서도 이상하게 그 많은 손과 눈이 다 제 할 일을 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곳에서 저는, 이상할 만큼 마음이 가라앉았습니다.
속이 텅 비는 게 아니라, 아주 잔잔히 눌리는 느낌이랄까요.
어떤 감정도 크게 일어나지 않고, 다만 생각이 차분하게 이어졌습니다.
아, 이 세상은 정말 덧없구나. 그런데 이토록 덧없는 걸 굳이 이렇게까지 애써 남기고자 했구나.
사람이란 참 간절한 존재로구나.
저는 그 자리에 서서, 그 많은 관음보살과 눈을 마주치며 묻고 있었습니다.
나는 정말 괜찮은 걸까.
그 질문에 어떤 부처는 웃는 얼굴로, 누군가는 찡그린 얼굴로, 누군가는 매섭게, 그러나 아무런 대답도 없었습니다.
사라지는 세상에서
영원을 붙잡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 침묵이 불편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 묵묵함 속에서 저는 조금씩 숨을 고를 수 있었습니다.
아무도 대답하지 않으니, 더 이상 해묵은 질문을 반복하지 않아도 괜찮을 것 같았습니다.
‘나는 정말 괜찮은 걸까.’
‘왜 나는 이렇게 덧없음을 견디지 못할까.’
그 물음들은 어쩌면 아무도 답할 수 없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1,001개의 관음보살도, 28체의 호법신장도, 모두 그저 저마다의 자리를 지키며 서 있을 뿐이었으니까요.
어쩌면, 세상은 원래 그런 건지도 모릅니다.
떠나고, 지나가고, 변하는 속도에 맞춰 우리가 뒤쫓으며 살아가지만, 결국은 아무도 우리를 기다려주지 않는다는 것을,
그래서 사람들은 발버둥 치듯 신을 만들고, 남기고, 불러내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사라지는 게 당연한 세상에서 영원을 조금이라도 붙잡고 싶어서.
저는 그날 산주산겐도에서, 1,001개의 얼굴 사이를 오래도록 걸었습니다.
끝내, 불상들 속에서 제 얼굴을 찾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찾지 못한 것에서 오는 아쉬움보다, 찾을 필요가 없다는 해방감이 더 크게 밀려왔습니다.
모든 것이 덧없다는 사실은, 언뜻 공허하게 들리지만, 그 덧없음 속에서 무엇인가를 굳이 '남기려는' 인간의 집요함은, 어쩌면 덧없음을 가장 아름답게 이기는 방식일지도 모릅니다.
1,001개의 관음보살은 영원을 꿈꾸며 세운 것이지만, 그 불상들을 빚어낸 장인은, 스스로 알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자신이 만든 목조 불상도 언젠가는 부스러질 것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조각칼을 갈고, 결을 다듬고, 금박을 입혔겠지요.
'덧없으니까, 할 수 있는 데까지 한다.'
그 다짐이 문득 제 가슴을 쳤습니다.
그날 이후, 저는 조금씩 무언가를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언젠가 사라질 것을 알면서도, 시간의 비바람에 깎이고, 먼지처럼 흩어질 것을 알면서도, 누군가를 위해, 혹은 저 자신을 위해, 아주 작은 무언가를 남기고 싶어 졌습니다.
그것이 글이 되었고,
하루의 기억이 되었으며,
때로는 남을 위로하는 말이 되기도 했습니다.
덧없음을 사랑하는 법을,
덧없음을 피하지 않는 법을,
산주산겐도에서 저는 배웠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저는 사라질 줄 알면서도 적어봅니다. 찰나를 붙잡으려는, 아주 보잘것없는 시도를.
그 시도가 언젠가 부서진다 해도, 그 부스러기 속에서 누군가 잠시 숨을 고를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며, 오늘도 덧없음을 쓰다듬습니다.
박지아.
편집자. 에세이스트.
cakio@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