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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인 모드가 켜지는 순간

by 김경민

어렸을 때부터 나는 심각하게 덜렁거렸다. 그 정도가 어느 정도였느냐면 매일매일 넘어져서 무릎에서 빨간약이 마를 날이 없었다. 무언가에 걸린 것도 아니고 주로 내발에 걸려서. 물건은 어찌나 잘 잃어버리는지 물건이 귀한 시절이었음에도 산지 며칠도 아닌 몇 시간 만에 잃어버리기 부지기수라 엄마의 등짝 스매싱도 많이 맞았었다.


그런 내가 어쩌다 북디자이너가 되어 버렸다. 책이라는 게 이제는 많은 부분이 자동화됐지만 사실 그 과정은 수공예에 가깝다. 손을 많이 댈수록 그리고 집중할수록 더 완성도가 좋아진다. 안타깝게도 나는 그런 일에 적당한 성향은 아니었기에 초반에는 엄청 고생을 많이 하고 남들도 고생도 많이 시켰다.


그 예로, 책을 만들다 보면 ‘본문 수정’이라는 것을 반드시 거치게 되는데(그것도 여러 번), 자신 있게 다독가라고 말할 수는 없어도 책을 적게 읽지는 않았던 내게도 본문 수정은 매우 어려웠다. 한마디로 글자를 보는 눈이 밝아야 했는데 나는 하필 그 눈이 어두웠다. 그래서 남들이 다 보는 수정자도 잘 못 잡아내고 실수를 반복했다. 또 앞서 말했듯이 책을 만드는 과정에선 일정한 규칙을 지켜야 하는 게 많다. 그 과정이 결코 만만치 않은데 예사로 여기고 대충 넘어갔다가는 실질적인 금액적, 시간적 손실 그리고 동료 및 관계자들의 감정적인 손실도 불러일으킬 수 있는데, 나는 또 안타깝게도 실수를 많이 했다.


디자인도 잘하고 싶고, 그에 따르는 그래서 필수적인 일들도 다 잘 해내고 싶었지만 디자인도 다른 업무들도 무엇하나 속 시원히 해내는 게 없었다. 그 일들은 서로 얽히고설켜 나뿐만 아니라 동료들끼지 더더욱 멘붕으로 가는 급행열차행을 타게 만들기만 할 뿐이었다.


그런 나조차도 이제는 꽤 오래 일하게 되어 많은 부분이 내 안에 체화되었다. 게다가 그동안 저지른 수많은 실수 덕에 어떤 것이 사고로 이어지는지 잘 알게 되어 더더욱 확인하면서 진행을 하다 보니 실수는 점점 줄어들어 이제는 웬만한 실수는 하지 않게 되었다. 그런데 가끔은 이렇게 눈에 띄게 성장한 자신에 우쭐한 기분이 들 때가 있다.


출근 후 정리한 체크리스트를 하나씩 지워가며 업무를 처리하다가 퇴근 무렵 그 체크리스트가 모두 엑스표가 되었을 때, 이제는 정말 한 사람의 사회인으로서, 직업인으로 한 사람의 몫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착각에 빠져있는 것도 잠시. 몇 통의 전화를 받고는 뒤통수를 한 대 맞은 듯한 느낌을 받았다. 아이 생애 최초 사회생활을 시작할 어린이집의 선생님들의 전화였다. 나는 마지막 통화를 끊고서야 그분들이 다 다른 선생님들이란 걸 알 수 있었다. 아… 나는 아직도 멀었다. 모태 아싸에다 내 일만 하면 하루 종일 크게 말하고 다닐 일이 없는 내게 그분들의 한결같은 하이텐션은 내가 다다를 수 없는 경지의 어떤 것이었다. 머릿속이 뱅뱅 돌지만 그분들의 이야기를 경청하며 나는 직업인으로서의 한 사람, 한 사람을 떠올렸다.


그래. 모두 각자의 자리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자신의 직업을 정의하고, 그 직업을 통해 이룰 수 있는 혹은 이뤄야만 하는 무언가가 있겠지. 그것에 도달하기 위해 오늘도 우리는 힘내서 하루를 산다. 본래의 나와는 조금 다를 수도, 어설플 수도 있지만 직업인의 모드가 켜지는 순간 우리는 그 삶을 살아간다. 그리고 내일은 오늘보다 나은 직업인이 될 수 있도록 정진! 정진!



덧. 직업인으로 사는 내 모습도 좋지만 그래도 나는 주말에는 쉬고, 계약서에 쓴 시간에만 일하고 싶다. 나라에서 정한 휴일을 보장받고 싶고, 내게 필요한 또는 법적으로 보장된 나의 복지를 받고 싶다. 그리고 이런 맘이 든다고 해도 찔리지 않고 당당한 한 사람의 직업인이고 싶다. 그리고 오늘 포함 남은 휴일의 시간도 푹 잘 쉬고 싶다. :)

직장인들, 직업인들 모두 화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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