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책자의 내면 소통

슬픔을 감추며 살았던 날들

by 붉나무

나는 펌프형 리퀴드 파운데이션을 거의 다 쓰고 있었다.

화장품 용기의 캡을 꾹꾹 눌러도 보고 흔들었다 눌러봐도 거의 나오지 않았지만 일주일 째 나는 화장품이 나오는 만큼만 겨우 얼굴에 펴 바르고 출근을 했다. 그날 아침에도 똑같았다. 병을 흔들어 캡을 눌러도, 캡을 빼고 병을 거꾸로 들고 손바닥에 탁탁 털어도 한 방울도 나오지 않자 이젠 정말 버려야 새것을 마련하겠구나 싶어 재활용 바구니에 넣는 순간 용기 안 잔여물에서 여인의 얼굴을 발견한 것이다. 그 형상이 완벽한 여인의 얼굴이라 나는 그것을 휴대폰에 남겼다.

그즈음 정신없이 살던 때다. 아침마다 화장품을 사야지 하면서도 출근하면 바로 잊곤 했다. 집에 돌아와서도 바쁜 저녁을 보내느라 화장품 사는 걸 잊었다. 화장품은 사는 일은 중요한 일과 시급한 일에서 언제나 밀려났다.


그런데 한동안 그날의 상황이 잊히지 않았다. 지친 듯 무언가에 취한 듯한 옆모습에서 나 자신을 본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내가 그날 아침 그랬던 것처럼 어쩌면 한숨을 쉬는 지친 모습을 본 것 같았다. 아니, 다 포기한 어떤 여인의 얼굴을 마주한 것 같았다. 날마다 피로가 쌓일수록 얼굴에서 점차 생기를 잃고 있는 나를 보는 듯했다.

쉬어야 해 나를 쉬게 해줘야 해, 라는 생각을 할수록 나는 쉬지 못했다. 아니, 내 의지대로 살수가 없었다. 내가 쉬고 싶은 대로 쉬지 못하면 그럴 수 있다는 걸 그때 알았다.


결국, 그해 급작스런 스트레스로 이른 완경(폐경)이 되었다.


빈 병을 흔들면 이내 사라질 형상, 나를 조금만 흔들면 나도 사라질지 모른다는 시간 속에서 나는 간신히 출근을 하고 아이들을 양육하고 나를 지탱하고 있었다. 책임감과 성실이 가장 큰 무기로 살아온 나... 이것을 놓아 버리면 나라는 존재는 완전히 사라져 버릴 것만 같았다. 대충 하는 화장이라도 단 한 번도 화장 없이 출근한 적이 없는 시간을 살았던 나... 얼굴만이 아닌 모든 행동에도 화장을 하고 살지 않으면 안됐던 나. 내가 원하는 방식의 삶은 혼자일 때 가능한 꿈이다. 가치관이 다른 반려자를 만나서 내 꿈을 이룬다는 것은 결국 꿈에 불과하다는 걸 막 깨달아가는 시점이다. 그때부터 다시 악몽을 꾸고 나는 아침마다 푸석푸헉한 모습으로 출근을 했다.


나의 옆모습보다는 좀 더 아름다운 그 용기 속 여인이 그때 벼랑 끝에서 간신히 버틴 것 같은 나인 것 같아 재활용 바구니에 차마 던져버리지 못하고 살며시 내려놓았다. 그리고 울컥 솟는 울음을 삼키고 사진으로 남겨두었다. 그 바쁜 아침 출근 전에...


그날의 나와 오늘의 나를 비교하니 내 삶이 얼마나 나아졌는가.

가치관이 다르지만 살아왔고 살아갈 수 있다는 걸 알게 되기까지 오랜 시간이 흘렀다. 그도 나처럼 힘들었을 테니까... 사람의 가치관이 바뀐다는 건 매우 어려운 일이니까...나부터도 그러니까.

화장품여인.jpe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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