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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생짓는남자 Aug 29. 2019

직업에 귀천은 있다.

며칠 전, 사무실에서 일하고 있는데 건물을 청소해 주시는 이모님이 사무실에 들어오셨다. 슬며시 문을 열고 들어오시는 모습이 굉장히 조심스러워 보였다. 언뜻 보면 직원들이 일하는데 방해가 될까 봐 그러시는 것 같기도 했지만, 평소 모습을 생각해 보면 그것보다는 청소부라는 당신의 처지를 스스로 낮게 여기셔서 움츠러드신 게 아닌가 싶기도 했다.

“직업에는 귀천이 없다”라는 말이 있다. 비뚤어진 현실을 꼬집은 이 말은 우리의 현실이 더욱 씁쓸해지게 만든다. 절대적인 기준으로야 직업에 귀천이 없지만, 상대적으로는 귀천이 있으니까. 그것도 매우 분명하게 말이다.




조선시대에도 하는 일에 따라 높고 낮음이 존재했다. 사농공상(士農工商)이라 칭하는 직역(職域) 구분이 있었는데, 나라를 다스리고 학문에 정진하는 ‘선비’를 가장 높게 여겼고, 그다음으로 농사에 매진하는 ‘농민’, 무언가를 만드는 ‘공민’, 상업에 종사하는 ‘상인’ 순으로 고하가 나뉘었다. 물론 이것은 신분의 구별은 아니다. 법적인 신분은 따로 존재했다. 양인과 천민이다. 실제적으로는 양인이 양반, 중인, 상민으로 나뉘어 총 네 가지 신분이 존재했는데, 가장 낮은 계층의 신분인 천민은 세 직역 모두를 넘나들며 자리 잡았다(『조선 노비들, 천하지만 특별한』, 김종성, 예담, 2013. 참조). 그래서 그런 것일까? 신분 구조와 맞물려 직업에도 귀천이 매겨졌다.

봉건사회에서 자본주의 사회로 근대화된 오늘날이라고 다르지 않다. 우리는 여전히 직업에 귀천을 나눈다. 봉건사회와는 다른 기준으로, 돈을 많이 버느냐 못 버느냐로 말이다.

봉건사회에서는 신분이 권력이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자본’ 곧 돈이 곧 권력이다. 돈을 많이 가진 사람은 권력자가 된다. 물론 아무리 돈을 많이 벌어도 부정한 방법으로 벌면 말이 달라지지만, 어쨌든 우리는 돈이 많은 사람 앞에서 슬슬 기고, 돈이 많은 사람은 다른 사람들 앞에서 떵떵거린다. 이러한 사회 인식 및 분위기와 맞물려 돈을 많이 버는 직업은 선망의 대상이 된다. 단적인 예로 환경미화원을 들 수 있다.


내가 어릴 적만 해도 사람들은 환경미화원을 무시했다. 길거리 쓰레기를 치우는 그 일을 낮게 여겼다. 하지만 십여 년 전 환경미화원의 처우가 생각보다 나쁘지 않다는 기사가 인터넷을 뜨겁게 달구자 너도 나도 환경미화원이 되겠다고 도전했다. 오죽했으면 05년에서 08년 환경미화원 평균 경쟁률이 서울 구로구청은 21:1, 경북 경주시는 49:1로 치솟았을까.




어떤 직업이든 고유의 가치가 있다. 모든 직업이 같은 높이에서 대우받아야 한다. 모든 직업이 조화를 이루어 사회와 경제를 떠받치니까. 하지만 우리는 임의로 직업에 차등을 둔다. 더럽고 힘든 일은 바라보는 관점이 조금 다루니 예외로 치더라도, 돈을 많이 버는 직업에 이목을 집중하고 사람들이 몰린다. 돈을 많이 벌지 못하는 직업은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돈을 많이 버는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은 우러러보고, 돈을 많이 벌지 못하는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은 천민 대하듯 무시한다. 굳이 돈과 연결시켜 얘기할 필요도 없다. 돈을 떠나서 무슨 일을 하는지에 따라, 하는 일에 따라 우리는 사람을 귀히 대하거나 무시하니까. 서비스업을 예로 들 수 있다.

우리는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식당 종업원이나 편의점과 마트 계산원 등을 낮게 본다. 외양상 손님을 ‘접대’, 떠받드는 일이니까. 우리는 돈을 지불하고 서비스업 종사자들의 노동력을 산다고 착각한다. 노동력을 샀으니 그들을 막대해도 된다고, 그들의 노동력을 내 마음대로 사용해도 된다고 착각한다. 그렇지 않다. 우리는 단지 우리가 필요한 것을 얻기 위해 돈을 지불했을 뿐이고, 그들은 우리가 필요한 걸 얻는데 도움을 주기 위해 그들의 노동력을 잠시 제공하는 것뿐이다. 하지만 그러한 착각으로 인해 서비스업 종사자들을 막대하게 되고, 나아가 그 직업 자체를 무시하게 된다. 어디 서비스업뿐이랴.


우리는 직업별로 임의로 가치를 매기고, 어떤 일을 하는지에 따라 사람을 보는 시선이 달라진다. 그것은 사회적 합의는 아니다. 암묵적 합의에 따라 개인적 차원에서 벌어지는 일이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의 직업에 대한 사회적 시선에 따라 어깨를 펴거나 움츠린다. 자신이 무슨 일을 하는지에 따라 사람들 앞에서 “나는 무슨 일을 해”라고 당당히 말하거나 “그냥저냥 먹고살아”라며 말을 피하기도 한다.




직업을 낮게 보거나 높게 보는 시선이 우리 인식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은 조선시대 신분제의 잔재일까? 그걸 알 필요는 없지. 그런 불평등한 인식을 왜 가지고 있는지 중요하지 않다. 모든 직업이 동등한 대우(급여의 동등함을 말하는 게 아니다)를 받아야 하지만 그러지 못한다는 게 중요하고, 문제이지.

조금 전 지하철 역사에서 청소하시는 이모님을 보았다. 지금 버스를 타고 회사로 향하고 있는데, 저기 길 한편에서 거리를 청소하시는 분을 스쳐 지나갔다. 모두 각자의 자리에서, 돈을 벌기 위해 자신의 노동력을 제공하고 계시다. 비록 저분들은 돈을 벌기 위해 그 일을 하고 있지만, 그 덕분에 지하철 역사가, 길거리가 깨끗해진다. 그분들에 그 일을 하는 이유가 무엇이든 그분들 덕에 우리 주변이 깨끗하게 유지되니, 그분들은 고마운 분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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