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 연습 #12
‘약속’이라는 건 깨려고 잡는 게 아니라 지키려고 잡는 것이다. 주위에 약속을 어기고도 당당한 사람이 있다면, 그런 사람과는 조용히 관계를 접자.
“약속은 깨려고 잡는 거야.”
고등학교 때 친구들 모임에 항상 늦던 한 녀석이 매번 한 말이다. 미안해해도 모자랄 판에 너무도 당당히 궤변을 늘어놓으니 기가 막혔다.
“미안하다고 해야지. 늦어놓고 그게 할 말이냐!”
라고 핀잔을 주면
“알았어 안 늦을게.”
라고 사과하면 될 것을. 그 녀석은 깔아놓은 괴변에 또 다른 괴변을 얹으며 분위기를 거북하게 만들었다.
‘약속’이라는 건 깨려고 잡는 게 아니라 지키려고 잡는 것이다. 친구 녀석처럼 ‘약속은 깰 수도 있는 거야’라는 마음으로 약속을 잡는다면, 애초에 잡지 않는 게 좋다. 그건 상대를 무시하는 태도니까. 과연 대통령과 약속을 잡아도 그런 생각을 할까? 어느 누구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이 약속은 반드시 지켜야 해!’라고 생각할 것이다. 약속을 잡을 때는 물론이고, 만나기 직전까지 긴장의 끈을 놓지 않을 것이다. 어떤 일이 있어도 약속을 어기지 않으려 할 것이고, 약속 당일에는 1분 1초도 늦지 않으려고 한참 전에 약속 장소에 먼저 나가 있을 것이다.
나와 매우 가까운 동생이 있다. 그 동생과 내가 일하는 회사는 가깝다. 차로 5분 거리이니 조금 과장해서 지척이라고 할 수 있다.
언젠가 그 동생에게 연락해서 같이 점심을 먹자고 말했다. 당연스럽게 알았다고 대답했다. 그 녀석이 우리 회사 쪽으로 오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빈 말이었나 보다. 일 년이 넘도록 연락조차 없는 걸 보니.
그 녀석과 나는 막연한 사이이다.
“밥 한 번 먹자.”
라는 말을 인사치레로 하는 사이가 아니다. 애초에 그런 인사치레는 하지 않는 사이이다. 스쳐 지나가는 말처럼 “밥 한 번 먹자” 했어도 꼭 먹는 사이이다. 서로 알고 지낸 지 10년이 넘었으니까. 그 긴 시간 동안 깊은 고민을 털어놓을 만큼 가깝게 지냈다.
우리는 일 년이 넘도록 연락 한 번 없고, 점심 먹으러 오지 않을 정도로 먼 사이가 아니다. 그런데도 아직까지 소식이 없다는 건 내게 서운한 게 있거나 우리는 내가 생각하는 것만큼 가까운 사이가 아니었다는 뜻일 게다. 지금까지 연락이 없는 걸 보면 말이다.
아닌 게 아니라, 우리 회사에 나와 매우 친한 팀장님(내가 우리 회사에 다니기 전부터 가까웠던 사이다)이 거래처에서 그 친구를 만났는데, 일부러 떠보려고 나를 보러 안 오냐고 물었단다. 그 녀석 왈
“아, 그러고 보니 보러 안 갔네요.”
라고 대답했더란다. 그게 끝이란다. 이런 상황에서는 보통
“밥 먹으러 가야죠! 연락 한 번 해야겠네요.”
혹은
“밥 먹으러 가겠다고 전해 주세요.”
와 같은 뒷말이 이어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런 말은커녕 아예 아무 말도 없었단다. 그런 말을 하지 않았어도 괜찮다. 최소한 그 날 혹은 며칠 내에 나에게 연락했다면 크게 신경 쓰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일주일도 더 지난 지금, 아직도 감감무소식이다. 아마 내가 먼저 하기 전까지 연락이 오지 않을 것 같다. 평상시 같으면 누가 먼저 하든 무슨 상관이겠냐만은, 지금 상관없지 않은 상황이 되어 버렸다.
물론 우리가 언제 몇 시에 만나자고 구체적으로 약속을 잡은 건 아니니 그 녀석이 약속을 깼다고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 친구가 했던
“언제 한 번 갈게요”
라는 대답은 구체적인 날짜와 시간을 잡은 것이나 다름없는 말이다. 왜냐, 그럴 만한 관계니까. 적어도 내 생각에는 말이다.
그러나 그 친구의 태도를 보니 그동안 내가 큰 착각을 하고 있던 것 같다. 지척에 있어서 보러 오기 쉬운데도, 더욱이 본인이 오겠다고 말했음에도 그동안 그 말을 신경 조차 쓰지 않았을 만큼 나는 관심 밖의 사람이었나 보다.
아무렴 어떠랴. 그 녀석은 그동안 나를 그렇게 생각해왔고, 사람과 관계를 그렇게 맺는 녀석이라고 생각하면 그만이다. 이렇게라도 생각해야지. 내 마음이 편해지려면.
약속이란 사전적 정의로 “앞으로의 일을 어떻게 할지 미리 정하는 것”이지만, 실제로는 사전의 정의를 넘어선다. 약속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 신뢰를 바탕으로 한다. 서로에 대한 신뢰가 없다면 약속을 잡을 수 없다. 지킬 수도 없다. 그런 의미에서 약속은 신뢰를 쌓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약속은 물물교환이다. 상대의 시간과 내 시간을 맞바꾸는 것이다. 내 시간을 상대에게 주고, 상대의 시간을 내가 갖는 것이다. 따라서 약속을 깨는 건 상대의 시간을 내 마음대로 버리는 것인 동시에 그만큼 상대에게 피해를 주는 것이다.
물론 살다 보면 어쩔 수 없이 약속을 지키지 못할 때도 있다. 그런 경우라면 상대에게 양해를 구하면 된다. 납득이 되지 않는 이유가 아니라면, 대부분은 너그럽게 이해한다. 그런 게 아니고서야 자기 마음대로 약속을 깨면 안 된다. 막무가내로 약속을 자꾸 깨다 보면 서로 간에 신뢰가 무너지고, 관계가 어그러지게 된다. 문제는 약속을 어기고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는 사람은 그걸 그리 신경 쓰지 않는다는 데 있다.
그런 사람과 약속을 잡게 되면 어떻게 해야 할까? 약속을 잡을 때는 그런 사람인 줄 모를 테니, 약속을 어겼을 때 어떻게 해야 할까? 화내지 말자. 쿨하게 생각하자. 그것밖에 안 되는 사람이라고, 마음 넓은 내가 이해해 주자고. 그리고 관계를 접자.
Key Issues
1. 나와 한 약속을 아무렇지 않게 어기는 사람을 만나면
2. 화내지 말자. 내 기분만 나쁘니까.
3. 속으로 이렇게 말해주자. “그래 넌 그런 사람이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