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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불비 Nov 21. 2022

인간은 창의적 동물이어야 한다

인간은 창의적 동물이어야 한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이런 질문을 많이들 한다. 가장 많이 들어본 대답은 “인간은 이성적 동물이다”일 것이다. 이 대답은 ‘이성’을 강조하느냐, 아니면 ‘동물’을 강조하느냐에 따라서 합리주의 철학과 체험주의 철학으로 구분되어 해석된다. 서양 철학은 대부분 이성을 강조하지만, 마크 터너와 같은 체험주의 철학을 지향하는 인지과학자는 인간의 동물적 측면을 더 강조한다. 인간의 이성이란 인간의 동물적 측면, 즉 인간의 몸에 기반한다는 것이 마크 터너 교수의 입장이다. 


하지만 에드워드 슬링거랜드 교수는 “인간이란 무엇인가?”라고 질문하지 않는다. 대신 “인간은 무엇이어야 하는가?”라고 묻는다. 물론 이 질문은 술취함에 대한 인간의 취향과 관련된 질문이다. 어쨌든 그는 왜 이런 질문을 했을까? 그는 우리 인간을 동굴 속에서만 사는 멕시칸 테트라라는 물고기에 비유한다. 이 물고기는 동굴에서만 살아서 동굴에 적응했기 때문에 동굴을 벗어나서는 살 수 없는 운명이다. 동굴에서 나온다는 것은 바로 죽음을 의미한다. 우리 인간도 마찬가지이다. 우리 인간은 혼자 사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태어나고 자라면서 적응해 온 ‘문화’라는 동굴에서만 살 수 있다. 더 정확히는 살 수 있다는 것도 아니고 산다는 것도 아니며, 살아야 한다. 


이런 문화의 동굴에서 살아남기 위해, 죽지 않기 위해, 계속 생존하기 위해 우리 인간은 ‘창의적 동물’이어야 하고, ‘문화적 동물’이어야 하고, ‘공공적 동물’이어야 한다는 것이 슬링거랜드 교수의 주장이다. 여기에서는 우리 인간이 창의적 동물이 되어야 한다는 부분을 좀 더 생각해 보고자 한다. 


인간과 동물의 생존 방식에 대해 생각해 보자. 동물은 지금의 이 자연환경에서 생존하기 위해 무엇에 의존할까? 동물은 ‘자연’에 의존한다. 여기서 말하는 자연은 자연환경이 아니라 ‘타고난 것’을 말한다. 생존을 위해 사자에게는 발톱이 있고, 가젤에게는 빠른 속도가 있다. 벌과 비버라는 동물은 벌집을 짓고 댐을 짓는다. 우리 인간도 집을 짓기는 하지만 이러한 동물은 무의식적으로 집과 댐을 짓는다. 이런 동물이 짓는 집과 댐은 이들의 타고난 DNA에서 나온 것이다. 새의 날개나 상어의 이빨도 선천적으로 타고난 것이다. 이처럼 동물은 생존을 위해 타고난 DNA, 즉 무의식적 본능에 의존한다. 


하지만 인간은 어떤가? 인간이 만들어낸 문화적 혁신, 문화적 창조물은 우리의 DNA에서 읽힌 것도 아니고,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유전 정보인 게놈(genome)에서 확장되어 나온 것도 아니다. 인간은 문화적 혁신을 창의적 기술을 통해 이룩한다. 이런 창의성을 통해 세상을 변화시키며, 창의성이 없다면 인간은 살아남을 수도 없다.


가장 쉬운 예는 소포클레스(Sophocles; 기원전 497년~기원전 406년)의 비극 《오이디푸스 왕》에서 찾아볼 수 있다. 오이디푸스는 무서운 스핑크스를 만난다. 스핑크스는 오이디푸스에게 “아침에는 네 발, 낮에는 두 발, 저녁에는 세 발로 걷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수수께끼를 내고, 이를 풀지 못하면 그를 죽이겠다고 협박한다. 오이디푸스는 그 답이 ‘사람’이라고 대답하면서 목숨을 건진다. 이때 오이디푸스는 어떻게 해서 짧은 시간에 정답을 알아냈을까? 스핑크스를 이긴 것은 마술이나 신의 개입이 아니라 오이디푸스의 창의적 통찰력이었다.

스핑크스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는 ‘모가지 수수께끼’라고 한다. 수수께끼를 풀든가, 그렇지 않으면 머리를 내놓아야 한다. 이렇게 긴급한 상황에서 풀어야 하는 수수께끼에 접했을 때 우리는 깊이 생각하거나 바둥거리며 논리적 추론을 해서 그 답을 찾는 것이 아니라, 갑작스럽게 해결책이 나온다. 마음을 편안하게 하고 번득이는 통찰력으로 답을 찾는다. 즉, ‘아하!’라는 깨달음의 순간으로 답을 찾는다. 즉, 인간은 생존하기 위해 창의적 인간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창의적 인간은 계산하고 추론하는 이성적 동물이 아니다. 위험물을 발견했을 때 이성적으로 계산하고 있는 순간, 우린 목숨을 잃는다. 인간은 도구와 도구를 만들어내는 창의적 통찰이 없이는 완전히 무력하다. 우리는 제대로 작용하기 위해 창의성이 필요하다.


인간은 발육기와 아동기가 길다. 이런 인간의 긴 아동기는 인간이 생존을 위해 창의적이어야 한다는 의무 사항 때문일 것이다. 창의성에 관해서 볼 때 어린아이와 성인을 경쟁시킨다면 어린아이의 승리로 돌아간다. 어른이 봤을 때 터무니없고, 예상이 안 되는 행동을 하는 어린아이는 계산하고 계획하는 데는 형편없지만, 창의성에서는 뛰어나다. 어린아이는 마분지 원통을 로켓 선으로 바꾸거나, 큰 막대기를 말처럼 사용하는 창의성을 발휘한다. 심리학자 앨리슨 고프닉(Alison Gopnik)은 인지적 유연성과 창의성이 어린 시절의 설계 자질(design feature)이라고 주장한다. 즉, 어린아이는 선천적으로 창의성을 갖고 태어났다는 것이다. 


긴 발육기와 아동기 이후에 우리 아이들은 성숙한다. 우리 아이들의 뇌는 성숙한다. 뇌의 성숙은 인간의 전두피질(frontal cortex)에서 회백질(gray matter)과 백질(white matter)의 상대적 밀도로 설명할 수 있다. 회백질은 생각하는 기능을 담당하고, 백질은 회백질과 회백질 사이를 연결하는 신경섬유로서 정보를 전달하는 통로 역할을 한다. 뇌가 성숙한다는 것은 불필요한 신경 연결을 점진적으로 제거하는 ‘신경 가지치기(neural pruning)’로부터 유발된다. 뇌의 한 부위는 가늘고 기능적으로 잘 조직된 계통으로 정착할 때 성숙하게 된다. 대부분의 계산 작업을 수행하는 뇌의 뉴런이 풍부한 회백질은 한 부위가 성숙함에 따라 밀도가 감소한다. 회백질 밀도가 감소함에 따라 백질의 밀도, 즉 회백질이 하는 계산 일에서 나온 결과물인 정보를 전송하는 수초로 둘러싸인 축삭은 증가하여 효율성과 속도는 향상되지만, 유연성은 떨어지는 결과가 초래된다.

신경 가지치기

슬링거랜드는 이런 회백질과 백질의 상대적 밀도로 뇌의 성숙을 설명할 때 아주 멋진 비유를 든다. 미성숙하고 회백질이 풍부한 부위는 아직 개발되지 않은 훤히 트인 들판이다. 이 들판에서 사람들은 구속받지 않고 여러 방면으로 돌아다닐 수 있지만 그다지 효율적이지는 않다. 멋진 블랙베리 덤불에서 열매를 따 먹기 위해서는 초목과 얕은 개울을 제치고 길을 내면서 나아가야 한다. 백질이 회백질을 점진적으로 교체하는 것은 이 들판의 발전을 반영한다. 도로가 깔리고 다리가 건설되면서 쉽고 빠르게 이동할 수 있다. 하지만, 이제는 이렇게 굳어진 길을 따라서만 이동하게 된다. 블랙베리 덤불로 가는 새로운 포장도로는 블랙베리를 더 편리하게 채집하게 하지만, 새로운 길을 따라 달려가면 숲에서 우연히 마주칠 수 있는 맛있는 산딸기는 놓치게 될 것이다. 새로 난 포장도로를 이용해 블랙베리를 더 편리하게 채집하는 것은 효율성이고, 숲에서 우연히 맛있는 산딸기를 발견하는 것은 창의성이다. 이처럼 효율성과 창의성 사이에는 상충하는 관계가 있는 것이다.


뇌가 성숙할수록, 회백질 밀도는 감소하고 백질은 연속적으로 증가한다. 이는 성숙도와 기능적 효율성의 증가를 반영한다. 이 부위가 바로 전전두피질(PFC)이다. 이 부위는 추상적 추론과 ‘인지 제어(cognitive control)’를 위한 자리이다. 인지 제어란 현재의 업무 요구와 사회적 맥락에 따라 사고, 감정, 행동을 의도적으로 선택하고, 부적절한 습관적 행동을 동시에 억제하는 것을 말한다. 인터넷을 하고 싶은 충동을 억제하면서 시험공부를 하거나, 다이어트 중에 디저트 대신 과일을 먹거나, 카펫에 주스를 쏟았다고 아이들에게 소리치는 대신 인내심을 갖는 것 등이 인지 제어에 해당하는 일반적인 상황이다. PFC를 비롯한 전두피질이 신경 가지치기 과정을 마치려면 오랜 시간이 걸린다. 사실 20대 초가 되어서야 성숙 상태에 이르면서 마지막에 성숙하는 부위가 PFC이다. 


PFC는 임무를 계속 수행하며 만족을 지연시키는 것에는 핵심적이지만, 창의성에는 치명적인 적이다. PFC는 우리에게 일에 초집중하게 하지만, 먼 미래의 가능성은 못 보게 한다. 창의성은 인지 제어를 완화할 것을 요구하며, 이런 완화는 마음을 방랑하게 하는 것이다. 마음이 집중하지 못하고 분주하게 움직이는 상태가 되도록 하는 것이다. 어린아이는 아직 뇌가 성숙하지 않았기 때문에 매우 창의적이다. 어린아이의 생각을 감시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렇다고 해서 가늘고 효율적인 PFC를 가진 어른이 창의성과 혁신에 있어서 전혀 쓸모가 없다는 뜻은 아니다. 실제로 우리 문화에서 역할을 하는 창의적인 기술은 아이가 만든 것이 아니라 우리 성인이 만든 것이다. 그렇다고 아이의 창의성에서 도움을 받았다고 볼 수도 없다. 즉, 아이의 창의성은 우리 문화에서 말하는 창의성이 아니다. 그렇다면 우리 동굴이라는 문화에서 진정 필요한 것은 성인의 창의성인 것이다. 그래서 성인의 창의성을 어떻게 향상할 것인가 하는 것이 풀어야 할 문제이다.


창의성은 이성의 힘이 아닌 정서의 힘에서 나온다. 이성의 힘은 모두 전전두피질(PFC)에 모여 있다. 이런 이성의 힘을 잠시 내려놓아야 정서의 힘이 발휘되어 창의성을 발휘할 수 있다. 이때 이성의 힘을 잠시 내려놓게 하는 것이 술이라는 것이다. 즉, 냉철한 ‘차가운 인지’가 아닌 ‘뜨거운 인지’가 작동하기 위해 합리적이고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마음에 화학적 변화를 일으켜야 하며, 그것은 술로 가능하다. 니체는 놀이하는 아이를 철학적·실존적 이상으로 본다. 이성이 아닌 정서로 가득한 존재는 어른이 아닌 아이이고, 아이야말로 창의성의 근원이다. 이런 점에서 슬링거랜드는 니체의 사유 프레임을 갖고 온다. 하지만 그는 한 단계 더 나아간다. 슬링거랜드 교수는 진정한 창의성이 어른의 마음도 아니고 아이의 마음이 아닌 ‘아이 같은 마음’에서 나온다고 본다. 창의성의 대표적인 예는 특허로서, 이런 특허를 아이가 내는 예는 없다. 대부분 어른의 마음에서 나온다. 여기서 말하는 성인의 마음은 아이의 마음을 되찾은 마음이다. 즉, ‘창의적인 어른의 마음’은 ‘어른의 몸’과 ‘아이의 마음’이 혼성된 것이다. 슬링거랜드는 어른이 창의성을 실현하기 위해 아이의 마음을 가질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바로 술이라고 본다. 그래서 창의적인 어른의 마음은 ‘술취한 마음’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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