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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불비 Nov 23. 2022

인간은 문화적 동물이어야 한다

우리 인간은 ‘문화’라는 동굴에서만 살아야 하는 존재라고 했다. 그리고 이런 문화의 동굴에서 살아남기 위해, 혹은 죽지 않기 위해, 계속 생존하기 위해 우리 인간은 ‘창의적 동물’이어야 하고, ‘문화적 동물’이어야 하고, ‘공공적 동물’이어야 한다는 것이 슬링거랜드 교수의 주장이다. 창의적 동물이 되어야 한다는 내용은 이미 살펴보았다. 오늘은 인간이 생존을 위해 문화적 동물이 되어야 한다는 내용을 살펴보고자 한다.

문화적 동물로서 우리 인간

인간의 창의성은 한 개인의 수준에서 머무는 것이 아니라 문화 속에서 작동할 때 문화적 혁신을 일궈내고 문화 수준은 증대된다. 누구도 아무리 통찰력과 창의성이 뛰어나더라도 혼자서는 말 그대로 걸작인 예술작품을 창작하지 못했을 것이고, 아이폰과 같은 최신 기술을 만들어내지 못했을 것이다. 물론 때로는 예술이 개인의 영역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예술가가 만들어내는 작품은 그가 인정하든 그렇지 않든 간에 혹은 암묵적이든 명시적이든 간에 문화로부터 도움을 받아왔음이 틀림없다. 근대 과학혁명을 완성한 과학자 아이작 뉴턴은 1676년에 “만약 내가 더 멀리 봤다면, 이는 내가 거인들의 어깨 위에 올라서 있었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한 인간의 천재성은 자기 혼자만의 것이 아닌 그 사람 이전에 존재했던 위대한 거인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실용성과 효율성을 얻지 못했을 것이 자명하다. 


인간의 뇌는 나 개인의 뇌가 아니라 내가 속해 있는 문화 속에서 작동하므로 거대한 ‘집단적 뇌’ 속에 있는 한 조각에 지나지 않는다. 나의 뇌와 너의 뇌, 그리고 그 외 모든 이들의 뇌들이 네트워크를 이루는 집단적 뇌의 한 부분임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개인적 뇌는 그냥 물질 덩어리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인간이 이 세상에서 생존하기 위해서는 창의적인 발견을 이루어야 하는데, 그런 창의적인 발견은 이런 네트워크인 집단적 뇌를 통해 가능한 것이다. 


우리가 문화에 의존한다는 것은 우리의 마음이 타인에게 열려 있어야 그들에게서 배울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 인간은 침팬지 같은 영장류이다. 침팬지처럼 우리 인간은 이기적이고 자신의 사리사욕을 채우는 것을 우선시한다. 이기적인 우리 인간이 타인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마음을 열어두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인간 중에서 성인과 달리 어린아이는 지구상에서 가장 강력한 학습 기계이다. 어린아이들이 배우는 능력은 특출 나다. 또한 어린아이들의 특징은 주의가 산만하고 온갖 것에 관심을 두며 질문을 쏟아낸다는 것이다. 그래서 어린아이들은 외국어도 빨리 잘 배운다. 어릴 때부터 테니스를 배운 사람들은 자세도 예쁘고 샷도 강력하다. 성인이 되어서야 테니스를 배운 사람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실력을 뿜어낼 수 있다. 그리고 아장아장 걸어 다니는 아기는 소꿉놀이하고, 청소년들은 혼자 놀거나 가족들과 지내기보단 친구를 찾아 밖으로 나간다. 즉, 문화를 형성하는 것을 좋아한다. 이 모든 것은 우리 아이들이 이기적이지 않고 타인에게서 배우려고 마음을 열 줄 알기 때문이다. 


하지만 성인들은 어떤가?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을 해서 새로운 사회적 관행과 규범을 배울 때 모두가 어려움을 겪는다. 사람마다 차이가 있지만 어려움을 겪지 않고 적응하는 사람은 없다고 봐야 한다. 이는 성인은 타인에게 자신의 마음을 열어두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이가 더 들수록 마음을 열어두는 것이 어려울 뿐만 아니라 마음의 문을 더욱 잠그는 경향이 늘어난다. 나만 해도 그렇다. 나이가 들수록 모임 자체가 부담되고, 재미있는 운동도 나와 성향이 맞지 않는 사람이 나오면 그 운동을 하지 않게 되는 일이 생긴다. 즉, 나이가 들수록 타인에게서 배우려는 마음이 줄어드는 것이다. 


아이들과 달리 성인은 왜 타인에게서 배우기 위해 마음을 열어두는 것을 어려워하고, 갈수록 그 마음을 아예 닫아버리려고 할까? 왜 문화 속에서 다른 사람들과 집단적 뇌를 형성하고 있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을까? 그 책임은 20살 이후로 완전히 형성되는 전전두피질(prefrontal cortex; PFC)에게 돌릴 수 있다. PFC는 이성의 자리라고 했다. 이성의 자리가 늘어나고 확고해지면서 감성의 자리를 침투해 감정의 자리는 협소하고 흐릿해진다. 즉, 상대와 공감하는 능력이 떨어지게 되는 것이다. 공감의 능력이 떨어지면 타인에게 배우려는 경향, 그들에게 자신의 마음을 열어두기란 쉽지 않다. 


PFC가 완전히 성숙하면 새로운 지식과 기술에 상대적으로 스며들지 않게 된다. 그래서 인간에게 있어서 PFC가 완전히 성숙하는데 20년이라는 긴 시간이 걸린다. 우리는 PFC가 완전히 발달하기 전인 이 20년 동안 산만한 것이 아니라 유연하고 수용적인 태도로 타인들에게 배우는 태도를 일관했었다. 성인이 PFC가 완전히 성숙해서 마음을 열어두기란 쉽지 않지만 그렇다고 마음을 열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이미 20년 동안 그런 마음을 여는 연습을 몸으로 많이 했기 때문에 특정한 자극만 주어지면 다시 마음을 열 수 있다. 우리가 머리로 익힌 것은 기억력의 용량 때문에 오래가지 못하지만, 몸으로 익힌 것은 인식과 상관없이 내 몸에 묻어 있으므로 기억하지 않으려고 해도 기억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몸 기억(body memory)’이다. 


성인이 되어서 타인에게 마음을 열고 기꺼이 그들에게서 배우려는 태도를 다시 취하는 방법, 즉 우리의 몸 기억을 활성화해서 타인에게 마음을 여는 방법으로, 《취함의 미학》에서 슬링거랜드 교수가 제안하는 방법은 술취함이다. 성인일 때 문화에 흡수되지 못하는 가장 큰 적이 전전두피질(PFC)이라고 했다. 이 PFC의 작동을 잠시 멈추는 방법은 많다. 그중에서 슬링거랜드 교수는 술취함의 방법을 제안하고 있다. 이성으로 똘똘 뭉쳐진 인간은 이기심으로 가득하고 사리사욕으로 채워져 있어서 절대 자기 것을 남한테 주거나 자신을 희생하지 못한다. 이성은 결국 개인의 층위에서 작동하기 때문이다. 이 이성의 층위에 머물게 하는 것이 20살 이후에 완성되는 PFC이다. 이 PFC의 작동을 잠시 멈추게 하여 이성이 얼마간 자리를 비우게 해야 한다. 그러면 다시 20년 동안 몸으로 배웠던 공감의 능력이 잠시 모습을 드러내고 제 역할을 하고 다시 무의식의 층위로 되돌아갈 것이다. 이 험악한 세상에서 평생 상대를 믿고 자기를 희생할 수는 없다. 그렇게 하는 것은 잠시이고 다시 현실로 돌아가야 한다. 짧은 순간 이성을 내려놓게 하는 술취함이 바로 여기에서 그 미학을 드러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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